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원명원(圓明園)은 어떻게 파괴되었는가?

중은우시 2007. 2. 28. 16:05

원명원은 비록 1860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의 공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전체 부지에는 여전히 적지 않는 건축유적이 남아 있었다. 최소한 1870년대까지는 서양루(西洋樓)의 일부 건물은 완전하다고 할 수 있었고, 동치제는 재위기간동안 원명원내의 중국식 건축물에 대하여 중도에 그만두기는 했지만, 대규모의 수선을 한 바 있었다. 1895년에 캉유웨이(강유위, 康有爲)가 원명원을 찾았을 때 아직도, "비록 풀이 가득 자라고 부러진 돌들이 있어 황량함이 온 눈에 가득했으나, 수산복해에는 여전히 무수한 정자와 전각이 있었다. 겨우 한쪽 구석만을 둘러보았는데, 백석루 3층짜리는 문호가 영롱하고 화훼를 그렸는데 모두 유럽식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원명원을 철저히 파괴했단 말인가?

 

화겁(火劫) : 연합군. 토비(土匪)와 사토적(篩土賊)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원명원에 대하여 미친듯이 약탈해갈 때, 적지 않은 토비들도 강탈에 참가했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은 가장 귀종한 물건을 약탈했고, 토비들은 남아 있는 괜찮은 물건들을 강탈했다. 일반 백성들은 길거리에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갔다. 심지어 원명원을 수비하던 태감도 불난 틈을 타서 물건을 약탈해갔다. 가장 쉽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은 금방 다 없어졌고, 어떤 사람은 여기저기 흩어지거나 땅에 묻힌 것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원명원의 내에서 여기저기 땅을 파헤치고 흙을 고르면서 물건을 찾았다. 이들을 수비태감과 관리들은 "사토적"이라고 불렀다. 다행히 이때만 해도 건물에까지 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목겁(木劫) : 원명원이 목탄공장으로 바뀜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서쪽 교외의 황실정원은 다시 한번 약탈당했다. 이번에, 청나라 정부는 원명원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 때 약탈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양인들이 남긴 물건에만 만족하지 않고, 원명원내에 남아 있던 건축, 나무다리의 기둥, 난간까지 톱으로 잘라서, 밧줄로 끌고 갔다. 원명원내의 크고 작은 나무들도 모두 벌채되어 남지를 않게 되었다. 당시 청하진에는 목재가 산처럼 쌓여 있었으며 거래로 바빴다고 한다. 원명원내에는 목탄공장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서 나무가지, 나무뿌리등도 모두 목탄으로 바뀌었다. 몇 달이 되지 않아. 화겁후에도 남아 있던 건축물은 오래된 나무나 잡목까지도 전혀 남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사람들은 원명원 "화겁" 후의 "목겁"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원명원에는 그저 산, 돌, 호수와 샘만 남았다.

 

석겁(石劫) : 돌판매로도 돈을 벌다.

 

민국초기에 주마등처럼 군벌들이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원명원에서 건축재료를 무궁무진하게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부의시대의 자료에는 이 때의 기록이 남아 있다. "군인이 차를 끌고와서 매일 10여차량분의 원명원의 태호석을 가져갔다" 실제로, 기록에 남아 있는 것보다는 돌을 떼어내서 파는 것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서세창은 원명원의 명춘원과 경춘원의 목재를 철거해서 가져갔고, 왕회경은 안우궁의 벽과 서양루의 석재를 가져갔다. 이로써 원명원 폐허는 그저 건축재료를 가져가는 곳으로 되었다. 지상의 벽돌, 기와, 바닥재, 돌, 기하의 나무못, 나무목책, 동파이프등 모두 가져갔으며, 이것은 20여년간 계속되었다.

 

후인들은 이를 원명원 "화겁"후의 "석겁"이라고 부른다. 석겁중 가장 크게 손실을 입은 것은 서양루의 유럽식 건축물이었다. 원명원의 서북쪽 귀퉁이에 있는 안우궁은 청나라 황가의 원명원내의 조상묘였고, 기세가 대단했으며 건물앞의 두 쌍의 화표(華表)는 조각이 아주 뛰어났다. 여러번 재난을 거쳐, 안우궁과 주위의 패방과 나무는 모두 사라졌고, 겨우 두 쌍의 화표만이 남았다.

 

1925년초, 연경대학의 목사는 사사로이 화표를 철거했다. 그 이유는 "내가 원명원내의 돌기둥을 보니 옛날 물건인데, 그냥두면 다른 사람이 훼손할 것같아서 우리 학교로 옮겨서 보관하고자 한다. 중국에서 사용한다면 다시 돌려주겠다" 현재 이 화표는 여전히 북경대학 서문내의 교학루앞에 서 있다. 또 다른 한 쌍의 화표는 민국시대 성내에 새로 지은 옛날식 도서관의 문앞에 장식물로 세웠다. 이를 전후하여 중앙공원(현재의 중산공원)을 만들때, 그리고 심지어 향산유아원을 만들 때도 '정당'한 이유를 들어서 원명원내의 진귀한 문화재들을 반출해갔다. 화표는 공개적으로 운송되었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원영관의 남은 돌과 부러진 기둥은 사람들이 봐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후인들에게 교육을 시키기 위한 마지막 교재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모양이 너무 괴이하여 어디다 쓰기 힘들어 가져가지 않았을 것이다.

 

토겁(土劫) :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다

 

원명원은 아직도 마지막의 가장 철저한 '토겁'을 거쳐야 했다. 선통제 말년, 현지의 만주족들은 원명원내의 부지위에 집을 짓고 엣날의 황가원림과 마주보았다. 1940년후에는 일본군이 점령하였으며, 북경의 식량이 부족하자, 이곳을 개간하도록 장려했다. 이때부터 농민들이 계속 원명원에 들어와서 산을 깍고 호수를 메워서 농사를 지었다. 청나라초의 성세로부터 150여년동안 정력을 기울여 만든 원명원이 이로써 그 면목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