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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만주족의 입장에서 본 정묘호란, 병자호란 (1)

by 중은우시 2006. 10. 23.

작자: 예허나라 위린(葉赫那拉. 煜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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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나라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고, 후금(이후 "청"으로 국호를 바꿈)과도 이웃이다. 당시 명나라와 후금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후금은 계속 서쪽으로 진격하여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쪽에 위치한 조선의 행동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향배는 아주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후금 통치집단에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즉, 홍타이시(후의 청태종)을 대표로 하는 주전파와 다이샨(대패륵)을 대표로 하는 주화파이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셋째 아들 홍타이시는 항상 부친에게 우리나라(조선)를 침범하도록 권유했다. 큰 아들 귀영개(貴永介, 즉 代善)는 매번 우리는 사면에 적을 마주하고 있어서 적이 너무 많습니다. 조선을 치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극력 유화책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양쪽에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조선에 대하여는 회유책을 사용했다. 여러차례 사신을 파병하여 조선에 글을 보냈고, 조선이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후금과 관계를 맺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전혀 듣지 않았고, 여전히 명나라를 지지하고, 후금에 반대하였다.

 

이 때, 명나라 요동순무 왕화정(王化貞)은 명나라군대를 조직하여 광녕(廣寧)을 나가서, 요하(遼河)를 건너고, 정면으로 후금을 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수하의 연병유격인 모문룡(毛文龍)에게 200여명의 병사를 딸려서, 적의 후방에 깊숙히 배치해서 요동의 백성과 연락하고, 후금의 병력을 견제하고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모문룡은 조선의 피도(皮島, 한국에서는 가도라고 함)에 진주하였다. 조선은 후금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모문룡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리하여 모문룡의 세력은 날로 증대되었으며, 후금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조선에 사람을 보내어 모문룡과의 관계를 끊도록 요구하였으나 조선에서는 거절하였다. 홍타이시가 청태종으로 죽위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부왕께서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으셨다. 그러나, 임종시에는 후회하셨다...나는 동강(즉 가도)에 대하여는 참지를 못하겠다.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으며 앞뒤로 매복이 있으며, 그들의 간첩활동이 아주 교모해서 나의 동정이나 말이 삽시간에 그들에게 알려진다. 정말 한스럽다. 정말 한스럽다" 청태종은 명나라, 몽고, 조선의 삼면으로부터 포위 협공을 당하는 국면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사신을 요동순무인 원숭환(袁崇煥)에게 보내서 화의를 요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공의 창뿌리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렸고, 적극적으로 조선을 치고, 모문룡을 제거함으로써 후금의 후고지우(後顧之憂, 뒷통수의 걱정거리)를 없애고자 하였다.

 

천총원년(1627년) 정월 초팔일. 홍타이시는 아민(阿敏, 이패륵), 지얼하랑(濟爾哈朗), 웨투오(岳托)등에게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정벌하게 한다. 그는 친히 방략을 주어서 말하기를 "조선은 여러 대에 걸쳐 우리 나라에 죄를 범했으니, 마땅히 성토하여야 한다. 이번에는 조선만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다. 명나라의 모문룡은 그들에 가까운 바다의 섬에 숨어서 조선에 의지하여 창궐하고 있고, 우리의 배반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병사를 정돈하여 정벌하는 것이니, 너희는 둘 다 도모하도록 하여라." 아민은 3만의 기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은 후, 의주를 점령한다. 이 때 아민은 지얼하랑등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모문룡이 주돈하고 있는 철산으로 진공한다. 모몬룡의 병사는 패배하여 가도로 들어가서 방어하므로, 사로잡을 수 없었다. 단지 철산의 수비장수인 모유준, 유문거등은 죽였고, 많은 명나라 병사와 요동백성들이 해를 입었다.

 

아민등은 형세가 바뀌고, 모문룡이 섬으로 대피하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게 되자, 수군을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진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후금은 의주를 쉽게 공격하여 얻자, 조선의 방어능력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후금은 공격목표를 모문룡에서 조선으로 바꾸었다. 아민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며, "화의가 될 때까지 남하하였다"

 

조선국왕은 후금군이 남하하고, 정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먼저 후비를 강화도로 보내어 난을 피하게 한다. 아민의 군대가 안주를 점령하고, 평양을 점령한 후, 중화에 이르러 부대를 정비하고, 사신을 한양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한다. 이 때 조선국왕은 한양을 떠나 강화도로 피난가 있었다. 그리고는 강수, 박립등을 후금의 부대로 보내어 화의와 항복을 요청한다. 아민은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만일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자 한다면, 속히 사자를 파견하라. 내가 들어주겠다"고 한다. 며칠 후 아민은 부대를 이끌고 황주를 점령한다. 그는 사신을 보내여 세 가지를 요구하였는데, 하나는 할지(割地,, 영토를 떼어달라), 둘째는 착문룡(捉文龍, 모문룡을 체포하라), 셋째는 차병일만(借兵一萬, 1만의 군사를 빌려달라)이었다. 병사를 빌리는 것은 명나라를 치기 위함이었다. 조선국왕은 강수, 박운을 보내어 아민에게 화의협상을 할 의향이 있다고 알린다.

 

아민은 부장인 유흥조(劉興祚)를 강화도로 보내고, 조선에 화의조건을 제시한다. 조선은 영원히 명나라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쳐야 한다. 명나라의 연호 "천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맹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쌍방은 1개월여의 협상을 거쳐, 조선에서는 후금의 군사적인 압력에 밀려 기본적으로 후금의 조건을 모두 받아들인다. 다만,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겠다는 조항만은 끝가지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민도 더 이상 조선조정에 이는 강요하지 않게 된다. 3월 초사흘, 조선국왕은 군신을 이끌고 후금의 대표인 남목태(南木太)등 팔대신과 강화도에서 맹서를 한다. 비록 아민은 맹세서에 서명은 하였지만, 청태종은 조선의 맹세문에 만족하지 못하여, 맹세후에 이를 승인하지 않는다. 아민이 병사를 돌려 평양에 이르렀을 때, 청태종으로부터 지시를 받는다. '더 이상 후퇴하지 말라. 대동강 서쪽은 돌려줄 수 없다" "그리고, 모문룡은 반드시 잡아서 돌아와라". 그래서 조선국왕은 어쩔 수 없이 동생 이각(李覺)을 평양으로 보내서 다시 맹세를 한다. 후금은 더 많은 이익을 얻어냈고, 조선과 중강, 회녕의 두곳에서 개시를 열게 되었으며, 도망온 자들을 돌려보내고, 공물은 증가되었다. 청태종은 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아민의 조선에서의 행동은 자신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시켰기 때문이다. 4월 17일 아민등이 심양으로 돌아왔을 때, 융중한 환영을 받는다.

 

청태종은 이번 조선공격은 후금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주로, 정치상으로 고립된 곤경에서 벗어났다는 것이고, 경제적으로 봉쇄를 뚫었다는 것이며, 군사적으로 명나라군대의 포위를 돌파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서쪽으로 진군하는데 배후의 근심거리를 없앴으며, 이후 후금은 요서지역과 막남의 몽고지역을 정복하고 세력을 점차 키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