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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오늘

북경의 일환로(一環路)는 어디에 있는가?

by 중은우시 2006. 11. 16.

북경의 사통팔달의 교통노선도는 지도상에 이미 거미줄같은 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환로, 삼환로, 사환로, 오환로, 육환로, 심지어 칠환로, 환로가 계속 연결되어 있고, 방사형의 고속도로가 사방으로 펼쳐나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가장 안쪽의 환로가 왜 이환로인가? 일환로는 어디로 갔는가?

 

일환로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견해 : 옛날 궤도전차의 노선이라는 설

 

명청의 북경은 성내에 환로가 하나도 없었다. 1920년대에 북양정부 내무총장 주계금은 북경의 교통을 개선하기 위하여 북경에 많은 길을 내고, 1921년에 궤도전차노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4년 12월 18일에 차량통행이 시작되었다. 궤도전차노선은 천안문앞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서단까지 가고, 다시 북쪽으로 향하며 서사(西四)를 지나서 평안리(현재의 평안대도)에 이른다. 다시 동쪼긍로 방향을 틀어 지안문까지 간 후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고루에 이른다. 다시 동쪽으로 가서 교도구를 거쳐 북신교에 이른다. 남쪽으로 꺽어 동사를 거쳐 동단에 이르고, 서쪽으로 꺽어 천안문 앞까지 간다. 길이는 17킬로미터이고, 환형로(環形路)이다. 이것이 북경으 첫번째 환형로라는 것이다. 1950년대에 북경은 이 궤도노선을 철거했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도 환형로라고 칭한다.

 

1950년대의 북경지도상에서 우리는 자금성벽을 따라 또 하나의 환형 철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전문(前門)의 동서에 연결된 두 개의 기차역과 일체가 되어 외부로 향하게 되어 있다. 비록 나중에 북경성벽을 허물면서 철로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지만, 원 북경의 옛 성벽이 있던 자리에 다시 하나의 환형 도로가 생겨나게 되었다. 북경에는 이미 환형로라고 부르는 도로가 있었으므로 새로 만든 환형로를 이환로라고 불렀고, 이환로의 아래는 2호선 지하철이 다닌다.

 

둘째 견해: 자금성 주위의 1호로라는 설.

 

이런 견해는 1환로는 명나라초에 자금성을 만들 때 나타났다고 본다. 자금성을 둘러썬 1호로(一號路)가 바로 1환로라는 것이다.

 

명나라때 북경성의 내성의 성벽은 1420년에 원나라 대도의 도성위치에 건립하였다. 둘레는 35.5킬로미터이다. 그러나, 북경내성의 안에는 다시 자금성과 황성의 두 개의 성이 있다. 자금성이 가장 중심이고, 황제가 업무를 보며 황제와 후궁이 거주하는 곳이다. 주위는 3.42킬로미터이고, 호성하(護城河)가 흐르고 있다. 여기가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황궁, 궁성이다. 부의가 쫓겨한 후에는 고궁이라고 불렀다. 자금성바깥에 도 하나의 성이 있는데 황성이라고 부르고 주위는 9킬로미터이다. 이것은 황실을 위하여 일하는 32개의 서로 다른 작방(作坊)과 전문적으로 훈척(勛戚)과 환관을 위한 것이다. 황실이 설치한 내시(內市)도 황성내에 있다. 황성에는 네개의 문이 있는데, 남문이 바로 지금의 천안문이다.

 

명조의 황제는 자금성을 둘러싼 호성하의 변에 "1환로"를 만들었다. 사실 이것은 황제와 그의 후비들이 놀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일"은 숫자의 우두머리이고, 크고 하늘이다. 환은 원이고 환형로는 즉 원형로를 의미한다.

 

셋째 견해: 먼저 삼환로가 있고, 다음에 이환로가 있었으며, 일환로는 없다는 견해

 

건설한 역사로 보면, 북경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삼환로이다. 1950년대후반에 이미 있었다. 당시에는 인민대학에서 동쪽으로 우왕묘(지금의 삼원교)를 거쳐 다시 남쪽으로 대북요, 분종사를 거쳐 서쪽으로 목서원에 이르는 길을 각각 북환로, 동환로, 남환로로 불렀고, 통칭하여 삼환로라고 불렀다(아마도, 이것이, 삼환로라는 명칭의 유래일 것이다). 목서원에서 서쪽으로 옥천영을 거쳐 공부분 인민대학에 이르는 남삼환 서단과 서삼환은 70년대말에 완성된다. 당시에는 아직 입체교차로도 없었다. 1994년 9월에 삼환로를 완성하고 입체교차로를 세운다.

 

이환로는 지하철환선을 만든 다음에 나타났다. 최초에 나타난 것은 70년대 초기이다. 먼저 서직문에서 부흥문, 동직문을 거쳐 건국문에 이르는 두개의 도로였다. 이전에는 도로가 없었다. 성벽 또는 호성하였다. 도로가 출현할 때 동시에 북경최초의 입체교차로도 출현했다, 1992년 9월에 전노선이 완공되고 입체교차로가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전국에서 첫번째로 신호등이 없는 도시의 고속로가 되었다.

 

사환로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학원로에서 사원교에 이르는 도로이다. 이것은 80년대후반에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을 맞이하기 위한 공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전노선이 완성되고 입체교차로가 건설된 것은 2001년 6월이다.

 

오환로는 처음부터 고속도로로 설계되고 시공되었다. 전체노선에 차량이 통행할 수 있게 된 것은 2003년 11월이다.

 

1환로에 대하여는 아직 아무도 권위있는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처음에 나타난 환로가 삼환로이므로 이후에 출현한 것은 삼환이내에는 이환로라고 부르고, 삼환바깥은 사환로, 오환로라고 부른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환로 이내에 다시 환로를 만들고, 입체교차로를 만들 만한 곳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북경에는 1환로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이환로 이내에는 시내지역이므로 도로가 밀집해서 있으므로 아무 도로들이나 둥글게 연결해서 1환로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도시계획상의 1환로

 

아주 우연한 신문기사로 필자는 마침내 북경도시계획에서의 진정한 1환로를 찾을 수 있었다.

 

2001년 7월 5일 "숭문과 선무의 두 구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가가 만들어진 후, 앞으로 동산, 서단대가의 연장선 및 북쪽의 평안대가와 함께 북경도로망의 내환(內環)을 구성할 것이다. 내환이 연결되면 북경내의 도심부분이 교통정체상황은 앞으로 개선될 것이다"

 

원래, 북경성의 도시계획에 계속 내환이라는 하나의 도로가 존재했던 것이다. 바로 이 내환이라는 것이 있었으므로 오늘날의 이환로가 생긴 것이다. 내환로가 바로 일환로였던 것이다.

 

광안대가의 도로계획설명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북경시 환로계획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1992년, 북경시는 <<북경도시총체계획>>에 수정을 가했다. 수정과정에서 광안대가의 공능과 작용에 다혀여 추가로 심화연구를 진행하였다. 총체계획에서는 광안대가는 도시내환로의 일부분이고, 중심도시지구에서 일정한 병풍작용을 한다. 광안대가는 남성지구의 유일한 동서관통의 주요핵심도로이므로 북경시동서 6개의 주요교통도로의 하나이다. 남성지구교통집산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다. 광안대교는 내환과 이환로, 삼환로간의 연락선이고, 내성과 외성간의 연계통로이다. 북경시가도분포격국은 고궁을 중심으로, 외부를 바둑판처럼 도로를 형성하여 하나하나를 상대적으로 봉쇄된 환(사실은 북경사합원에서 중원과 원간을 서로 통하게 하는 회랑)으로 연결시킨다. 광안대가는 채시구에서 자기구까지의 도로는 내환로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평안대가, 서단(서사) 남북대가, 동단(동사)남북대가와 공동으로 "회랑"을 구성하고, 북경구성의 내성, 외성을 분리하여 상호 독립된 원락으로 하며 동시에 그들을 상호 연락시킨다. "회랑"의 사람과 차량이 이동하고, "원락"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취한다. 이로서 원내와 원외를 조용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누린다.(작자: 북경시도시계획설계연구원 곽점전)

 

해방초기의 계획도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내환로의 주요한 길에는 입체교차로가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1환로는 고속로로 구상된 것이다. 그러나 철거이전, 문화재보호, 고도풍모등의 원인으로 내환로의 건설은 이, 삼. 사, 오, 육환의 건설보다 늦어진 것이다. 내환북단의 평안대가는 1999년 9월에 차량통행이 개시되었다. 남단의 광안대가는 2001년에 차량통행이 이루어졌다. 동단, 서단대가는 현재 아직 개조를 완성하지 못했다. 원래 설계된 입체교차로는 이미 취소되었다. 예를 들어, 서단입구에 일찌기 입체교차로가 예정되어 있는데, 장안가의 전체적인 일체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1999년 사단에 평면 입체교차로를 건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