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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오늘

국가도서관의 4대진관지보(四大鎭館之寶)

by 중은우시 2006. 11. 15.

중국의 국가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큰 중문 고본수장기구이다. 특히 국가도서관의 <<돈황유서(敦煌遺書)>>, <<조성금장(趙城金藏)>>, <<영락대전(永樂大典)>>, <<사고전서(四庫全書)>>는 국가도서관의 4대보물로 "진관지보"로 일컬어지고 있다.

 

1. 돈황유서

 

돈황유서는 1900년 6월 22일 왕(王)씨성의 도사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막고굴 장경동(제17동)의 9평방미터가 되지 않는 곳의 안쪽에 개략 4,5만건의 돈황유서가 발견된 것이다. 이 유서는 한문, 장문(藏文)등 여러 언어로 쓰여져 있고, 내용도 경제, 의약, 문학, 정치등 여러 방면이었다. 시간적으로는 대략 5세기-11세기의 문헌이며, 마침 이 시기의 문헌자료가 아주 결핍되어 있는 터였다. 그래서 이 발견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청나라 정부가 무능하여, 발견후 함참이 지날 때까지 외국의 침략자들에게 침략당하는 것을 방관하다가 1910년에 비로소 청정부가 명을 내려 잔여 문헌을 돈황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국가도서관은 <<돈황유서>>를 보존하기 위한 지역은 특수하게 만들었다. 원래 국가도서관은 돈황유서를 궤짝안에 넣어두었었는데 매우 좁았었다. 나중에 국가에서 돈을 내서 돈황서고를 따로 만들었으며 144개의 단목으로 만든 서가를 만들고, 돈황유서의 수량에 따라 1만여개의 상자를 만들었다. 매 상자마다 1권의 경서를 보관하고 있다.

 

2. 조장금장

 

조장금장은 금나라때 인쇄한 대장경이다. 이것이 조성현(趙城縣)의 광승사(廣勝寺)에 보관되어 있었으므로 조성금장이라고 부른다. 전해오는 말로는 금장은 노주(지금의 산서성 장치)의 민녀인 최법진이 팔을 자르고 모은 자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1930,40년대에 조성금장은 하마터면 일군에 약탈당할 뻔하였다. 현지의 스님과 팔로군이 합작하여 여러 지방을 전전한 끝에 기본적으로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존상황이 아주 좋지 않아서 어떤 경서는 습기를 먹은 후에 곰팡이가 피었고, 어떤 경서는 찢어져서 별로 남아있지 않게 되기도 하였다.

 

1949년 조성금장은 북경으로 이송되고, 당시의 북평도서관(지금의 국가도서관)에서 수장하게 된다. 이것은 정부가 돈을 낸 첫번째 진귀한 고본이다. 국가는 4명의 표구선생의 도움을 받아 17년의 기간에 걸쳐 1965년에 비로소 복구작업을 완료하게 된다.

 

3. 영락대전

 

영락대전은 명나라 영락제때 편찬한 대형 유서이다. 전책은 11095책이었다. 규모가 크고, 당시에는 인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황가에 놔두었다. 명나라 가정황제는 이 책을 매우 좋아해서 어느날 궁중에 큰 불이 났는데, 가정황제는 하룻밤에 연속 세번을 성지를 내려 영락대전을 구하게 한다. 이후 가정황제는 명을 내려 원본을 초록하여 부본을 만들게 하여 따로 보존한다. 현재 수장하고 있는 것은 모두 가정연간에 초록한 부본이다. 영락연간의 원본에 대하여는 보존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훼손되어 없어졌다는 기록도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황제의 능묘안에 있을 것이라고 하나, 능묘를 열기 전까지는 사실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국가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영락대전은 모두 221책이다. 실제 수장량은 161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60권은 문화재를 남쪽으로 옮길 때, 미국으로 옮겨서 보관하였는데, 미국이 나중에 대만에 반환했다. 그러나, 이 책은 여전히 "평관장서(북평도서관장서)"라는 도장이 찍혀 있으므로 여전히 국가도서관의 보유품으로 봐야 한다. 돈황유서의 서고를 만들 때, 3개의 큰 서가를 만들어 영락대전을 보관하고 있다. 그 중 60개의 서랍은 비어 있는데, 바로 대만에서 보관하고 있는 60책을 위한 자리이다.

 

국가도서관이 수장하고 있는 마지막 영락대전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1983년, 산동 액현 문화관에 근무하는 손홍림은 당시 달력에 인쇄되어 있는 영락대전을 보고는 자기 집에서 보관해오던 낡은 책이 바로 국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손홍림이 그 책을 찾았을 때는 책은 여기저기 잘려져 있었다. 원래 손홍림의 할머니는 그 책의 종이가 좋으므로 잘라서 신발양식을 삼거나 말아서 담배를 피우는데 쓰곤 했던 것이다. 다행히, 할머니는 글을 모르지만,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글과 종이를 아끼는 전통은 있어서, 글자가 있는 곳은 자르지 않았고, 글자가 없는 곳만 잘라서 썼던 것이다. 나중에 국가도서관에 보내어져서 업무인원들이 다시 보완하였다.

 

4. 사고전서

 

사고전서는 건륭연간에 만든 총서이다. 당시에 모두 7부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4부를 만들었는데, 각각 자금성 문화전뒤의 문연각(文淵閣), 원명원의 문원각(文源閣), 승덕피서산장의 문진각(文津閣), 심양고궁의 문소각(文溯閣)이 그것인데 합쳐서 북사각(北四閣)이라 불렀다. 이후 남방의 선비들의 독서를 위하여 다시 세 부를 초록하여 각각 양주의 문회각(文匯閣), 진강의 문종각(文宗閣), 항주의 문란각(文瀾閣)으로 합쳐서 남삼각(南三閣)이라 불렀다.

 

문직각본은 1913년 승덕에서 옮겨와서 1914년 고궁의 문화전에 잠시 보관하다가 1915년 경사도서관이 정식 수장하게 된다. 이것은 사고전서중 현존하는 유일하게 원래의 서가, 원래의 함, 원래의 책이 일체로 보관된 것이고, 모두 128가, 6144함, 36304책이 있다.

 

과거에는 사고전서 7부는 모두 같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대만의 상무인서관이 문연각본 사고전서를 영인본으로 출판하였는데, 1991년말에, 국가도서관의 양눌 연구원이 주재하여 문연각 사고전서의 영인본과 문진각본의 원서를 대조하여보았는데, 완성된 집부와 사부중에서 집부는 1273종중 차이가 있는 것이 788종으로 62%에 달하였고, 사부의 수록책 566종중 290종이 차이가 있어 51%에 달하였다. 서로 차이나는 정도는 경우마다 모두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