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창은 청나라때는 군기대신으로 신하로서 최고의 직위에 까지 오르고, 원세개가 집권하였을 때는 국무경(國務卿)에 올랐으며, 민국시대 북양정부에서는 대총통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요직을 차지하였는데, 그의 정치적인 특색을 보면 이렇다. 정치적인 업적은 거의 없다. 정치적으로 실패한 일은 많지만 그가 최대의 원흉은 아니다. 처세나 모양은 아주 뛰어나고 누구나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업적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원세개를 도와 소참(小站, 천진의 한 지명)에서 병사를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았는데, 그가 한 일은 거의 없다. 그는 청나라의 첫번째 경부상서이나 경찰조직을 만드는데 한 일은 없다. 동삼성의 총독을 맡았는데, 무슨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없다. 원세개의 국무경을 맡았으면서 원세개를 황제로 옹립하는데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민국시대에 대총통이 되긴 했으나, 역시 허수아비이므로 업적이랄 것이 없다.
다만, 그는 관운이 억세게 좋았고, 아무도 막을 수 없었을 뿐이다. 증국번은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월은 죽어라고 학문을 하고, 이홍장은 죽어라고 관직에 있는다. 나는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죽어라고 관직을 원했던 이홍장도 서세창에는 미치지 못한다. 대총통에는 오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서세창도 처음부터 관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한림이 되고 나서 8,9년간은 외관말직조차 받지 못했다.
청나라의 한림은 흑홍(黑紅)의 둘로 나뉜다. 홍한림은 상천입지(上天入地)를 할 수 있다. 상천이라 함은 황제의 신변에서 "행주(行走)"를 하는 일이고 황제의 은전을 받는 일이다. 입지라 함은 바깥으로 가서 학관이 되어 주고(主考, 주시험관)이 되거나 학정(學政)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많은 제자, 문생을 받아들여 제자들이 모셔주는 것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흑한림은 이것 두가지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동향이나 동년의 지방관들이 북경에 들어올 때 잠깐 같이 노는 것 이외에는 스스로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한 수준이다. 서세창은 당연히 흑한림이었다.
원세개가 갑오전쟁에서 패한 후에, 소참에서 병사를 훈련시킬 때, 서세창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하였다. 세세창은 바로 응하여 그의 육군영무처에 가서 일을 한다. 그 시절에 한림은 청고한 직위였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었으므로 아무리 흑한림이라고 하더라도 군영에 가서 일을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한 것이 서세창이었다. 결과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의 한림의 기준으로 보면 그의 선택은 황당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전혀 반대로 성공적이었다. 서세창이 원세개의 밑으로 들어간 것은 그의 관운이 트이게 하는 시작이었다. 잠재력이 무한한 우량주를 잡은 것이다. 당시 원세개는 아직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상태이므로 그를 따라온 서세창이 고마웠던 것이다. 서세창과 같은 한림이 자신의 막료가 된다는 것은 자기의 몸값을 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원세개가 이홍장의 뒤를 이어 중국정계의 기둥으로 떠오르자, 서세창도 바로 최고위층에 진입했다. 상서도 하고, 총독도 했으며, 군기대신도 했다. 기묘한 것은 1908년에 서태후와 광서제가 죽은 후 만주귀족들이 작당하여 원세개를 몰아낸 후에도 서세창은 관직을 보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황족내각에서 두명밖에 없는 협리대신(協理大臣)이 되는데, 지금의 부총리에 해당한다. 이 내각에서 모두 만주족이고 한족은 딱 4명이 들어갔는데, 그 중 서세창의 직위가 가장 높았다. 그는 순경부, 우전부, 동삼성총독, 내각협리대신을 돌아가며 맡는다. 이후 신해혁명의 와중에는 태부와 태보라는 신하로서의 최고의 직위를 받아낸다.
신해혁명후에는 바로 민국의 관리를 하기가 쑥스러웠던지, 그는 청도로 가서 청나라의 옛 신하들과 어울린다. 그러다가 원세개의 부름을 받고 바로 국무경이 된다. 그러나, 원세개가 황제가 된 이후에 그는 '숭산사우'로 현직에서 물러난다.
다행히 원세개의 황제꿈은 단명으로 끝나고, 이후의 군벌투쟁시에 서세창은 일찌기 소참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킨 인연으로 하여 민국대총통에까지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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