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는 인물들이 백출한 시기었다. 근대 인물중에 특이한 인물들이 많은데, 그 중에 양도(楊度, 1875-1931)라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자가 석자(晳子)이고 호남 상담 사람이다. 그는 일생동안, 재자, 거인, 제왕술의 마지막 전인, 명사, 저명한 해외유학파, 헌정의 대가, 청나라의 정사품관리, 원세개의 총애를 받은 주안육군자의 하나, 상해탄의 흑사회거두 두월생의 문객, 중국공산당의 비밀당원등 여러 신분을 거쳤다.
첫째, 대재자(大才子). 양도는 젊었을 때부터 재주가 넘쳤고, 스스로 문장을 천하제일로 여겼다. 그는 일찌기 "당송팔대가의 문장은 아이들 장난이다" "그들이 명인이 된 것은 정말 괴이하다"라고 한 바 있다. 양도는 그저 큰소리나 친 것이 아니라 소년시절에 이미 "약도중화국과망, 제비호남인진사(若道中華國果亡, 除非湖南人盡死, 만일 중화국가가 진짜로 망한다면, 호남을 빼고는 사람이 다 죽을 것이다)"라는 명구를 남기기도 했고, 이 글은 금방 대강남북에 퍼져갔다. 18세때 초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된다.
둘째, 제왕학의 마지막 전인. 양도는 소년시절에 재주가 뛰어나 호남의 고수인 왕개운이 자신의 마지막 제자로 거둔다. 왕개운은 당시 저명한 경제학자(경제는 이때는 경세제민으로 제왕술을 가리키는 말이다)로서 증국번에게 몇번이나 의거를 권했던 인물이다. 왕개운은 제가 양도가 총명하자 그를 제왕지학을 가르칠 좋은 재목으로 보고, 평생의 절학을 모두 그에게 전수한다.
셋째, 헌정제일인. 1902년, 양도는 일본으로 유학간다. <<유학역편>>을 창간한다. 다음해에 다시 일본유학을 떠나, 동경법정대학에 입학하여 서방의 헌정사상을 공부한다. 그 동안 그는 양계초, 손중산등과 교류한다. 그러나, 혁명사상은 받아들이지 않고, 입헌군주제의 이상을 받아들인다. 양도는 일본의 입헌군주제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서도 입헌군주제가 실정에 맞다고 보았다. 이로 인하여 양도는 당시에 명성이 있어 입헌군주제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의 지위를 차지한다. 1906년, 청정부가 헌정을 모방하여 시행하기로 하고, 5대신을 서양으로 보내어 각국의 제도를 고찰한다. 이 오대신의 보고서중 일본에 대한 보고서는 바로 양계초와 양도가 작성한 것이었다. 1908년 장지동과 원세개의 추천하에 양도는 4품 경당후보의 관직을 받아, 당시 헌정최고기구인 헌전편사관에 들어간다. 동시에 이화원 황족헌법강사도 맡는다.
넷째, 원세개의 측근. 민국초기 양도는 원세개에게 군주입헌제를 시행하도록 건의한다. 그리하여 "주안육군자"의 우두머리가 되어, 적극적으로 원세개를 위하여 기획을 내어, 원세개의 황제즉위의 발걸음을 앞당기게 한다. 원세개는 양도가 쓴 <<군헌구국론>>을 읽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광대일재(曠代逸才)"라는 글을 써서 내린다. 원세개가 죽은 후, 양도는 황제제도의 화근으로 지목되어, 지명수배된다. 1918년에서야 해금된다. 이후, 그는 최종적으로 "머리를 풀고 산에 들어가며, 이후로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은거생활에 들어간다.
다섯째, 명사(名士). 양도는 경사문철(經史文哲)에 조예가 깊을 뿐아니라, 개성이 뛰어나고, 고인의 풍도를 지녔다. 그는 일찌기 팔고문(八股文)으로 수재, 거인에 뽑히지만, 팔고문에 반대하여 회시(會試)때에는 변체를 써서 불합격하고 만다. 양도는 일찌기 장사에서 양계초를 만났고 춘추를 논한다. 양도는 양계초에 대하여 "나이가 어리고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면서도 "춘추로 사기치는" 자로 보며, "아깝다, 아깝다"고 연발하며 떠나버린다. 자식의 결혼식때에는 그는 "육조단경"을 한권 선물로 보내면서, 아들에게는 "너는 처를 보기를 할머니를 보듯이 하라"고 하고, 며느리에게는 "너는 남편을 보기를 거지를 보듯이 하라"고 한다.
여섯째, 두월생의 문객. 두월생은 당시 상해 암흑가의 삼대두목의 하나였다. 만년의 양도는 생활이 힘들었는데, 두월생이 그를 청하자 그의 문객이 되었다. 두월생은 그에게 방을 구해주고, 양도는 글과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였다. 하연의 회고에 따르면 비록 어려운 처지였지만, 양도는 여전히 고담준론을 펼쳤고, 기발한 말로 사람을 놀래켰다고 한다. 양도는 두월생을 유협(遊俠)과 같은 인물로 보았다. "그의 행적은 옛날의 유협과 비슷한 류이다. 의리를 중시하고, 약속을 중시하며, 다른 사람과 환난을 같이했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교유를 중시했다. 손님이 매우 많았으며, 가마와 차량이 매일 모여들었다. 문객들이 요청하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대강남북에 떨쳤고, 아는 자이건 모르는 자이건 모두 그의 풍모를 흠모했다"
일곱째, 중국공산당의 비밀당원. 하연의 회고에 따르면, 1929년 가을 주은래 총리의 소개로 양도는 중국공산당에 정식 입당하여, 비밀당원이 되었다. "그는 동지들간에도 동지라고 칭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젊은 연락원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은래 동지를 언급할 때도 그는 여전히 상우형(翔宇兄, 주은래의 자가 상우)이나 오호(伍豪, 주은래의 별명)선생이라고 불렀다"
중국근대사에서 양도처럼 변화막측했던 인물도 찾기는 힘들 것이다. 불행히도 그는 군주입헌제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으며, 제왕술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않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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