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홍명(1857-1928) 청나라말 민국초기의 유명한 문화괴걸이다. 당시의 서양인들은 중국에 가면 삼대전은 보지 않더라도 고홍명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외국에 많이 알려진 중국의 인물이었다.
고홍명의 선조는 원래 성이 진(陳)씨였다. 대대로 복건성의 하문 동안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살았다. 진돈원(陳敦源)에 이르러 술에 취해서 사람을 다치게 하였는데 관청에 붙잡혀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가솔을 이끌고 남양(동남아)로 갔고 마지막으로 말레이시아의 페낭섬에 자리잡았다. 그는 밀림을 개간한 중국인들의 선구가 되었고, 영국인들보다도 먼저 정착했다. 진돈원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쳤다는데 대하여 부끄러움을 가지고 원래의 성을 고(辜, 허물이라는 뜻)로 바꾸어, 참회의 뜻을 나타냈다.
1857년 7월 18일에 고홍명이 태어났다. 이 때 남양의 작은 섬인 페낭섬은 이미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웨일즈 프린스 아일랜드"로 개명되었다. 고홍명의 부친은 영국식민자들과 교분이 있었다. 고홍명의 증조부인 고예환(高禮歡)은 당시 말레이지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중국계 인물이었고, 말레이시아반도에 처음 도착한 영국식민자들이 그를 제1기 갑필단(甲必丹, Captain)으로 임명했다. 고예환은 아들 여덟과 딸 셋을 두었는데, 아들 중에서 고안평, 고국재, 고용지의 세명이 뛰어났다. 고안평은 중국으로 돌아가 글을 읽었고, 나중에 임칙서의 수하가 되었으며 대만으로 가서 봉직했고, 나중에 대만에 자리를 잡았다. 고국재와 고용지는 공환의 의발을 전수받았고, 정치적으로는 영국식민자들과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고국재는 영국인을 따라 싱가포르로 갔으며, 싱가포르를 가장 먼저 개척한 중국인중의 한 명이 되었다. 고용지는 지방정부에서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중 고자운(辜紫雲)은 정치에 뜻이 없었으며, 영국상인 브랑이 경영하는 고무농장에서 일을 했는데, 브랑이 매우 아꼈고, 친한 친구가 되었다. 고홍명은 바로 고자운의 둘째아들이었고, 영문이름은 톰슨(Thomson)이었다. 그의 모친은 서양인으로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하였다.
브랑은 자식이 없었는데, 고홍명을 매우 아껴서 양자로 삼았다. 이후 1867년 브랑부부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 고홍명은 브랑 부부를 따라서 영국의 스코틀랜드로 간다. 브랑부부는 고홍명을 공부에 세밀하게 신경을 썼으며 14살때는 독일로 보내어져서 라이프찌히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후에는 에딘버러대학에서 공부한다. Hong Beng Kaw는 고홍명의 복건말발음을 영어로 적은 것이다. 고홍명은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일본어, 말레이시아어등 9개 언어에 정통했고, 박사학위만 13개를 받았다. 그는 스스로 남양(南洋, 동남아)에서 태어나고, 서양(西洋)에서 공부하고, 동양(東洋, 여기서는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북양(北洋, 중국대륙)에서 벼슬을 했다고 한 바 있다. 그는 논어와 중용을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며, 일본수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에 예학을 강의하고, 대문호 톨스토이와 서신왕래를 하며, 인도의 간디에 의하여 "가장 존경하는 중국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고홍명은 서양에서의 공부를 마친 후, 싱가포르의 언어학대가 마건충의 권고를 받아, 중화문화를 연구한다. 그리고는 중국대륙으로 가서 중국고전을 연구한다. 이후 청나라 말기의 실권파 대신인 장지동(張之洞)의 막료로 20년을 일한다.
그와 관련해서는 여러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번은 장지동의 막료로 있을 때, 효흠황태후의 생일축하연이 열리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새로 만든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성상의 만수무강을 비는 그런 내용이었다. 고홍명은 부르지 않았을 뿐아니라 불만을 가득담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물으니 그는 이런 "애국가"는 하도 들어서 질렸는데, 왜 "애민가"는 나오지 않는 것이냐. 상대방은 그럼 당신이 한번 지어보면 어떻겠는가? 라고 하니, 고홍명은 그자리에서 "천자만년, 백성화전, 만수무강, 백성조앙(천자가 만년을 비는 것은 백성들이 돈을 그만큼 쓰게 되는 것이고, 만수무강하게 된다면 백성들에게는 재앙이로다)"라고 했다고 한다.
고홍명은 또한 원세개의 발호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는데, 1907년 장지동이 군기대신을 맡아 북경으로 오게 되었다. 1916년 원세개가 사망하자 당시 북양정부는 공고를 내서 일체의 오락을 금지시켰고, 3일간을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 북경대학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던 고홍명은 일부러 연회를 베풀고 극단을 불러서 노래를 부르고 즐겼다. 경찰이 와서 죄를 물으려고 하자 고홍명은 "총통은 공복이고 국민이 주인인데, 공복이 죽었다고 하여 주인이 못할 게 뭐가 있느냐.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이 술은 먹어야 겠고, 이 극은 계속 해야 겠다"라고 하니, 경찰도 할말이 없어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고홍명은 중국에 온 후에는 괴벽이 있었는데, 서양옷을 전혀 입지 않고 중국옷을 입었으며, 머리에 변발을 길렀다고 한다. 청나라가 망한 후에도 계속 길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한번은 이 변발을 자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영국에서 있은 일이다. 이유는 영국의 어떤 여성이 그의 변발에 관심을 보이자, 잘라서 그녀에게 줘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머리카락을 길렀다. 그는 또한 여자의 전족도 특히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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