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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조원임(趙元任)과 양보위(楊步偉)

by 중은우시 2007. 4. 25.

 

 

1930년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당시 유행했던 <<내가 어떻게 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 가르쳐달라>>는 노래를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의 작곡자가 조원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원임은 박학다식한 인물이다. 그는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를 거쳐 나중에 언어학을 전공하여 "한어언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동시에 그는 음악가이기도 한다.

 

그는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신사상을 가지고, 여자가 나이 두 살이 많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를 거절하였으면서, 다시 자기보다 3살이 많고 성격도 다른 양보위와 결혼하게 된다.

 

조원임은 어려서부터 자유연애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14세때(1906년) 그의 큰고모가 진씨성을 가진 여자와 정혼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자,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혼인의 자유가 없다. 나는 아주 마음이 아프다" 나중에 이 혼약은 결국 해지하고 만다.

 

조원임은 1920년에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다. 이해 8월에 그는 의사 양보위를 만나게 된다. 양보위는 남경의 명문집안출신으로, 아주 뛰어난 자질을 지닌 여자이다. 1912년(22세), 그녀는 중국의 첫번째, "숭실여자중학"의 교장이 된다. 나중에 일본에 의학을 공부하러 떠나서, 1919년 동경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한다. 귀국후에는 북경융선후통에서 다른 동료와 함께 "삼인의원(森仁醫院)"을 개설한다. 이 두 사람의 결혼은 중국에서 최초의 "문명결혼"에 속한다.

 

1920년 8월의 어느 날, 조원임은 남경의 한 친구집의 식탁에서 두 명의 여의사를 만나게 된다. 한 명은 이관중(李貫中)이고, 다른 하나가 양보위였다. 그녀들 둘은 융선후통에 합작으로 "삼인의원"을 차렸는데, 그녀들 둘의 의과대학 친구인 임관홍(林貫虹)은 그 전에 죽었다. 그녀들 세 사람은 모두 성이 목(木)자가 들어있어 세개의 목을 합하여 삼(森)자를 따고, 그중 한 사람이 죽어 이제는 두사람(二人)만 남았다고 하여 인(仁)자를 따서, 삼인의원이라고 지었다.

 

다음 날, 이 두 사람의 여의사는 조원임의 친구를 초청했는데, 마침 조원임도 그 친구의 집에 기숙하고 있어서 함께 초청받았다. 조원임은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 두 의사는 100% 개명되었다" 양보위 의사는 집안에서 정해준 미혼부가 있었다. 그러나, 그 혼약도 그녀가 깨어버렸다. 조원임은 이후 거의 이틀걸이로 한번씩 삼인의원을 찾아갔다. 9월 25일, 그는 두 여의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아마도 너무 바빠서(당시 그는 양계초등 명가들이 만든 '강학사'에서 초청을 받아 중국에 강연하러 온 영국철학자 루소의 통역을 해야 했다), 만일 내가 다시 오지 못하더라도 개의치 말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그는 다시 찾아왔다.

 

조원임은 남쪽으로 내려가 루소를 맞이했다. 먼저 한구(漢口)로 갔다가 상해에서 잠시 머무른 후, 루소일행과 항주, 남경, 장사를 거쳐, 다시 북상하여 북경으로 돌아왔다. 북경에 돌아오자 활동이 빈번하여, 교장 김방정은 그를 '강학사'에 1년간 빌려준다. 그래서 청화대학에서 다시 성내로 들어왔다...그는 두 여의사와 삼인의원에서 만날 기회가 더 많아졌다. 그래서, 조원임과 양보위는 급속히 열애에 빠지게 된다.

 

한번은 루소가 북경사범대학에서 강연을 했다. 조원임과 양보위는 둘 다 늦게 도착했다. 루소는 강연대 위에 앉아 있었는데,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나와 여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루소)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쁜 사람, 나쁜 사람' 그때 나는 누구를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원래 이관중 의사도 조용히 그러나 열렬하게 조원임을 좋아하고 있었었다.

 

"불행히도 이관중 의사는 비교적 천진난만했다. 나는 그녀에게 긴 편지를 보내어, 우호적인 말투로 나의 감정을 설명했다. 먼저 운경(양보위의 별호)에게 보여주었더니, 그녀는 이 의사가 나의 뜻을 못알아볼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편지를 그녀(이관중)에게 건냈다. 역시 그녀는 내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할 수없이 그녀에게 내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뜻을 직접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이 의사는 신경성으로 탕산온천에 가서 요양을 하게 된다..."

 

아래의 내용은 조원임이 쓴 양보위와 사랑에 빠지는 경과이다.

 

하룻저녁에, 나는 전화를 걸어 운경에게 다음 날 아침에 그녀를 볼 수 있겠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괜찮다고 하였고, 집에 있을 거라고 하였다. 나는 중산공원의 서산파에서 그녀를 보자고 얘기했다. 7시쯤 그녀가 올때, 나는 이미 산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 높은 곳에 있네. 조선생"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녀의 아침인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나는 산언덕을 내려오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양 의사(나는 그녀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했다. 마음 속에서만 빼고), 나는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친구를 그렇게 잘 대해주는 것에 감복하고 있으나, 나는 당신이 그녀에게 상처를 줄 것이 겁나고, 그녀에게도 좋을 것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모든 것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계속 오해하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내가 이전에 말한 것처럼 내가 당신들을 보러 좀 적게 와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내가 마지막 말을 중단하고 잇지 않으면서, 그녀와 공원을 조용히 걸었다. 마침내, "공리전승비"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녀가 말했다. "맞아요. 조선생. 당신이 우리들을 만나러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신에게 제일 좋고, 우리에게도 제일 좋아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운경" 나는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운경" 나는 다시 한번 불렀다. "그럼 그렇게 끝나는 겁니까?...내 말은 우리 둘..." 나는 그녀가 "우리 둘...어째서 우리 둘...?"이라고 물을까봐 두려웠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소리없이 나에게 다가왔다.

 

마침내 우리는 동성구의 아름다운 곳에 집 한채를 찾아냈다. 소아보후통 49호(이전에는 소아파후통이라고 불렀다). 방은 주 편안했고, 옥상에 꽃밭도 있었다. 거주할 곳도 생겼고, 그리고 처리해야할 일들도 많았다. 우리는 중산공원에 갔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격언정에서 찍은 사진 1장을 우리 결혼(결혼식없는 결혼)통지서와 함께 우리 친구들에게 보냈다. 모두 4백장정도였다. 사진에 나타난 격언은 "양명의 격언은 지식이 행동의 시작이고, 행동은 지식의 완성이다", "단서의 말은 공겸함이 태만함을 이기는 자는 승하고, 태만함이 공경함을 이기는 자는 망한다"라는 댓구였다. 나의 같은 반 친구인 호적(胡適)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방법으로 두 명의 증인에게 서명을 받고, 4마오의 돈을 내고 인지를 붙여야 합법적일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래의 내용은 호적의 회고이다:

 

조원임은 자주 우리 집에 왔다. 그리고 음운학과 언어의 로마화문제를 얘기했다. 우리는 코넬대에서 공부할 때도 자주 이렇게 했었다. 나중에 나는 그가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고, 우리가 토론하는 것도 그다지 철저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나는 그가 나의 고향사람인 양보위(운경) 누나와 자주 왕래하는 것을 주의했다. 하루는 조원임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나에게 다음날 밤에 시간을 내서 소아보후통 49호로 와서 그와 양보위 소저, 그리고 또 다른 친구인 주춘국 소저와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성안의 그 곳에는 식당이나 클럽같은 식시할 곳이 없었다. 나는 어떤 일이지 궁금했다. 유비무환의 심정으로 나는 내가 주석한 <<홍루몽>>을 가지고 갔다. 선물처럼 예쁘게 포장했다. 혹시 내가 잘못 추측했을 수도 있어서, 바깥에는 보통의 종이로 싸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 우리는 정교한 집에서 아름다운 저녁식사를 했다. 모두 네 가지의 아주 입에 맞는 요리가 나왔는데, 바로 양보위 소저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식사후, 조원임은 손으로 쓴 종이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주 의사와 내가 서명해서 증인이 되어 달라고 했다. 그러면 그와 운경은 아주 감사해 하겠다고 했다. 조원임과 양보위는 이렇게 결혼했다. 나는 그들에게 선물을 준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이하는 다시 조원임의 회고이다:

 

우리가 친우에게 보낸 통지서에서 이렇게 썼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우린 이미 1921년 6월 1일 오후 3시에 결혼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축하선물을 일체 사양하겠다. 예외의 하나는 서신, 시문 혹은 음악곡보등이다. 예외의 둘째는 중국과학사에 대한 기증이다. 결혼서상에서 정한 결혼시간은 사실 우리가 우체국에서 통지서와 사진을 부친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큰 활자로 <<신인물의 신식결혼>>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나중에 나는 루소선생에게 우리의 결혼방식이 너무 보수적이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는데 ,그의 대답은 '충분히 급진적"이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이런 급진적인 결혼방식은 우리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몇몇 사람들의 화를 돋구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모는 나에게 꽃바구니를 보냈는데, 나는 운경의 권고도 듣지 않고, 돌려보냈다. 문자도 아니고 음악작품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나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 꽃바구니는 정성들여만든 축하카드로 볼 수도 있었다.

 

조원임과 양보위의 결합은 현대의 가장 아름다운 결혼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존중하고 서로 사랑하며 백발이 되도록 해로했다. 일찌기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한쌍", "신선반려"라고 칭해지기도 했다.

 

1981년 3월, 양보위 여사가 서거했는데, 향년 91세였다. 1년도 되지 않아, 1982년 2월 조원임 선생도 서거했다. 향년 9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