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재의 부친은 성진(盛振)으로 요녕성 개원현 성둔촌의 유명한 지방유지였다. 그 후에 성세재는 부모를 따라 신강으로 가서 생활한다. 모친이 죽은 후 부친은 다시 후처를 얻어 아들을 하나 더 낳았다.
성세재는 형제자매가 8명이었으며, 그가 장남이었다.
차남 성세영은 신강의 교통과 변방독판공서의 물자조달을 맡았다.
삼남 성세준은 원래 장사를 하였는데, 나중에 성세재의 경위단장이 되어, 전문으로 성세재의 호위업무를 맡았다.
사남 성세기는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세재의 경위단장을 맡다가 소련홍군학원에서 군사를 배우고 졸업하여 돌아온 후 신강의 기계화사단의 사단장을 맡는다.
오남 성세기는 소련유학을 하였고,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변무처장을 맡다가 나중에 정훈처부처장을 맡았다.
육남은 당시 아직 강보에 쌓여 있어, 아무런 직위도 맡고 있지 않았다.
성세재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장녀는 팽길원에게 시집을 갔다. 팽길원은 신강지방법원 원장을 맡았고, 나중에 신강성은행 행장을 맡다가, 나중에 신강성 재정청장을 맡았다. 성세재가 국민당의 농림부장으로 옮긴 후에는 팽길원도 국민당 중앙정무차장을 맡아 성세재와 함께 중경으로 옮겨간다.
차녀인 성세동은 신강여자학원을 졸업한 후, 소련공산당원 왕수성과 결혼한다. 왕수성은 신강의 정훈처처장, 신강학원원장등의 직위를 맡는다. 나중에 성세재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힌다. 그는 성세재를 "반혁명"으로 욕하면서, 심리를 받을 때 "성세재가 누이를 나에게 시집보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 그의 모친이 나에게 시집왔다고 하더라도 나는 마찬가지로 그를 반대할 것이다" 나중에 왕은 소련으로 압송된다. 1939년 2월 소련의 반대파숙청때 처형당한다. 왕이 체포된 후, 성세동은 성세재를 찾아가서 따졌으나, 성세재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정치문제는 어쩔 수 없다고만 하였다.
성세재의 전처는 농촌여자였다. 그래서 일찌기 성세재와 이혼했다.
나중에 성세재는 구소방과 결혼한다. 구소방의 부친, 성세재의 장인인 구종준은 신강에서 민정청장을 지내다가 나중에 이리하전구의 최고행정장관이 된다. 구종준에게는 구소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소련유학을 마친 후, 신강군관학교의 정치교관을 맡는다. 나중에는 신강변방독판의 정훈처 처장을 맡는다.
구씨 집안은 신강에서 하고 싶은대로 행동했다. 성세재의 정치세력에 의지하여 재산을 끌어모았다. 신강의 황금, 녹용, 서각, 영양각, 백금등의 귀중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긁어모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구씨집안은 신강성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 되고, 성세재의 경제적인 지주가 된다. 1943년 구씨 집안은 감숙성 난주시 중산림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왕홍조는 성세재의 동서이다. 왕의 처인 구소영은 성세재의 처의 언니이다. 왕홍조는 동북강무당을 졸업했고, 당시 신강변방독판서의 참모장 겸 신강육군군관학교의 교육장(교장은 성세재가 겸임)을 맡았다. 왕홍조는 신강의 군사력을 장악했다. 그의 처인 구소영은 당시의 환경을 이용하여 경제활동을 활발히 벌였고, 곳곳에서 백성의 고혈을 짜냈으며 밀수와 장사를 하여 왕씨 집안도 신강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하나가 되었다.
성세재에게는 아들 둘과 딸 둘이 있다.
큰 딸 성극근은 성세재가 농림부장을 할 때, 신강여자학원 문과에서 공부했다. 예술에 재능이 있어 연극과 글을 썼다.
장남 성극경은 신강학원부속고중 문과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둘째 딸과 차남은 모두 당시 소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외에 유정흔은 그의 처도 구씨이고, 성세재와는 인척간이었다. 유정흔 또한 동북강무당을 졸업했고, 성세재에 의하여 채용되어, 우루무치시 방어연대의 연대장을 맡았고, 나중에 기계화사단의 사단장을 맡았다. 나중에 성세재에 의하여 체포된다.
이부림은 동북항일연군의 명장인 이두 장군의 의자이다. 그도 동북강무당을 졸업했다.재정감찰위원장등 요직을 맡았다. 그는 성세재가 농림부장을 맡을 때, 행정원 참사가 되었고, 나중에 대만으로 건너갔다.
이영기는 개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나중에 동북항일연군 소병문장군의 수하에서 일했다. 신강에 온 후에 성세재와 동향이고, 서법에 조예가 있어, 성세재에 의하여 발탁된다. 나중에 재정감찰위원회 부위원장, 공안관리처장, 신강경관학교교장등의 요직을 맡고, 육군중장의 계급을 단다. 그는 성세재의 충실한 호위업무책임자였다.1952년에 이영기는 중공정부에 의하여 처형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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