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증국번)

증국번(曾國藩)은 왜 황제에 오르지 않았는가?

중은우시 2006. 11. 8. 17:52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후, 증국번은 호남에서 상군(湘軍, 상은 호남성을 의미함)을 조직하였고, 상군은 운세를 타고 급속히 세를 불려갔고, 청나라정부가 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군대가 되었다. 증국번도 당시 중국에서 가장 실력있는 인물로 등장했으며,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는 주목을 받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황제가 탄생할 것으로 보았다. 증국번의 당시의 권력, 지위 및 영향력에다가 주변에서 그에게 황제가 되라고 종용하는 부장과 정객들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에게는 황포를 몸에 걸치고 황제에 등극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증국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부하들의 그러한 진언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저 청나라의 충신으로 남았다.

 

증국번에게 진언하는 사람중에서 초지일관하고 가장 강력하게 권했던 사람은 호남의 유명한 재자 왕개운이었다. 왕개운은 경, 사, 문학에 모두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고, 그는 학문을 실제에 응용하는데 관심이 많았으며, 기회를 잡아 그의 '제왕지학'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스스로 강태공, 장량, 제갈량, 유백온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왕개운이 여러차례 증국번에 글을 올렸고, 증국번도 그를 중용했다. 이후 그는 세번이나 증국번을 찾아가서 설득하였다. 증국번에게 호림익 및 태평군과 연합하여 청나라를 무너뜨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증국번은 그를 그저 광방불기한 문사로만 여겼고, 비록 예를 다하여 대하기는 했으나,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증국번이 금릉을 함락시키고,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였다. 원래, 함풍제의 임종유언에는 금릉을 함락시키는 자는 왕으로 봉하겠다고 하였었다. 그러나, 자희태후(서태후)를 대표로 하는 조정은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에게 겨우 일등후(一等候)를 봉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명을 내려 증국번과 각급장령들은 신속히 군비를 정산하라고 지시했다. 이 명이 내려오자, 증국전(曾國筌, 증국번의 동생), 팽옥린(彭玉麟), 좌종당(左宗棠), 포초(鮑超)등 4사람은 비밀리에 증국번을 황제로 옹립하기 위하여 약30여명의 고급장령을 모아서 밤중에 증국번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증국번은 그저 "의천조해화무수, 유수고산심자지(依天照海花無數, 流水高山心自知, 하늘을 의지하고 바다를 비추는 꽃은 그 수가 무한하고, 흐르는 물과 높은 산은 마음을 스스로 안다)"는 수수께끼와 같은 글을 그들에게 던진다. 네 사람은 증국번이 던진 글의 뜻을 풀지 못하고, 결국 증국번을 옹립하려던 일은 흐지부지 물건너가고 만다.

 

사실, 일찌기 안경(安慶) 전투후에 증국번의 부장은 그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한적이 있었다. 당시 호림익, 좌종당도 모두 즉위를 찬성하는 편이었다. 가장 강하게 즉위를 건의한 자는 곽송도, 이차청이었다. 이차청은 일찌기 증국번에게 "왕후장상에 종자가 없다. 진짜 제왕이 있다"는 내용을 써올린 적도 있고, 호림익은 증국번의 생일잔치때 "번개와 같은 수단으로, 보살의 마음가짐으로"라는 글을 쓴 적도 있고, 좌종당도 "정(鼎)의 경중을 물을만 하지 않은가"라고 쓴 적이 있으며, 팽옥린은 직접 서신을 보내어 "동남의 반쪽의 땅이 주인이 없는데, 선생께서는 뜻이 없으신지?"라고 적은 적도 있었다.

 

이 때, 스스로 재주가 있다고 자부하던 왕개운은 다시 안경까지 와서 두번째로 증국번에게 "종횡술"을 시행하도록 권한다. 증국번에게 두가지 방책을 건넨다. 첫째는 병사를 이끌고 북경으로 올라가서 서태후의 수렴청정이 조상대대로의 규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 고명대신이 되겠다고 하는 것, 둘째는 아예 동남지역에서 의거를 일으켜 만민을 위하여 군주에 오르라는 것. 그러면서 그에게 공고진주(功高震主, 공이 너무 높으면 군주가 상을 더 이상 줄 수 없어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의 사실을 기억하고 토사구팽의 전철을 밟지말 것을 권하였다.

 

마지막으로 증국번에게 황제에 오르라고 권한 것도 왕개운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이후에 증국번은 스스로 손발과 날개를 자르고, 상군을 감군한지 1년이후였다. 왕개운은 이때 이미 이름을 천하에 떨치는 학자가 되어 있었다. 학문토론을 빌어 증국번에게 조조가 되도록 권한다. 그러나 증국번은 그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하고 지나간다. 왕개운은 자신의 제왕지술을 더 이상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하며 쓸쓸히 돌아갔다.

 

증국번이 권고를 듣지 않고 황제가 되지 않은 것은 그의 머리속에  뿌리깊은 유가의 충군사상도 관련이 되지만, 실제로 더 큰 것은 당시의 상황이 황제가 되기는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증국번은 청정부가 서양인들에 대하여나 관리를 다스리는 것 및 민생을 보살피는 데 무능한 것은 알고 있지만, 대신 한족관리에 대한 방어태세는 결코 늦추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시 상군의 병력은 강남의 몇개 성에서는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청나라의 관문이 장강상류를 점거하고 있었고, 부명아, 풍자재가 양주와 진강을 지키고 있었으며 승격임심이 광동과 안휘의 중간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것은 청정부가 일찌기 상군에 대하여 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둘째, 절강의 좌종당, 강서의 심보정은 증국번이 그들의 권고를 듣지 않자, 이미 증국번으로부터 마음이 떠났고, 청나라정부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상군 배후의 두개의 날카로운 검과 같았다.

 

셋째, 상군은 30만이라고 큰소리쳤지만, 증국번이 움직일 수 있는 군대는 10여만에 불과했다. 그 중에 이홍장은 비록 증국번이 키운 인물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증국전, 팽옥린, 포초와 같이 생사를 걸고 그를 따를 것인지, 청나라 정부의 반대편에 설 수 있을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넷째, 상군은 이미 장기간의 전투를 거쳐 당년의 기세가 많이 꺾였다. 군기가 부패하고 심지어 부패정도가 청나라때 녹영(綠營, 한족군대)을 능가했다. 이처럼 이미 명성이 많이 나빠진 군대를 이끌고 천하를 얻으려고 한다면 따르는 백성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증국번은 황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는 여러가지 조치를 취해서 병권을 줄이고, 권력도 줄여서 청나라정부의 의심을 벗어났던 것이다. 당시 증국번이 권고를 들어 만청을 몰아내자는 기치를 내걸고 한족의 부흥을 외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중국근대역사는 아마도 달리 쓰여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