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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증국번)

증국번은 왜 이수성(李秀成)을 서둘러 처형했는가?

by 중은우시 2008. 12. 20.

 

 

 

글: 조염(趙焰)

 

1864년 7월 28일, 증국번(曾國藩)은 금릉(金陵, 남경, 즉, 태평천국의 천경)에 도착한다. 몇 시간후, 증국번은 밤을 새워 이수성을 심문한다. 이수성은 며칠 전에 체포되었다. 이수성은 소천왕의 일행을 엄호하여 포위망을 뚫을 때, 다리에 부상을 입어 말에서 떨어져, 성밖 방산 일대에 숨어 있다가, 현지의 촌민에게 붙잡힌 다음 꽁꽁 묶여 상군본영으로 압송되었다. 며칠전, 성격이 조급하고 폭력적인 증국전(曾國荃)이 이수성을 심문할 때, 옛날 원한이 생각나자, 칼로 이수성의 팔과 다리를 그어 선혈이 흘렀다. 이수성은 급히 소리쳤다: "노구(老九, 아홉째로 증국전) 우리는 각자 모시는 주인이 있었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증국전은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여 그만두었다.

 

증국번은 모든 승리자와 마찬가지로 높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먼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감옥의 어두운 등불을 이용하여, 그의 삼각눈으로 자세히 이 군사생애상의 적수를 살펴보았다. 증국번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문화수준도 높지 않고, 태평천국의 가장 걸출한 군사천재라는 인물이 이처럼 비쩍 마르고 키도 적으며, 용모에 특이할 점도 없고, 심지어 여자처럼 유약하고 섬세할 줄은. 증국번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깊이가 있고 느렸다. 마치 이수성을 고향으로 데려가는 것같았다. 증국번은 흥미를 가지고 이수성에게 태평천국에 관한 여러가지 상황을 물어본다. 이수성이 일부 사람들과 사건에 대하여 하는 평가를 자세히 들어보았다. 이번 담화는 증국번으로 하여금 태평천국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을 확인하도록 해주었다. 이수성도 아주 솔직하게 문제에 대답했다.

 

대부분은 증국번은 듣고 있고, 이수성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번 쌍방의 면담은 이수성이 며칠 후의 자술서에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글자 행간에서 증국번에 대하여 감격한 것이 드러난다. 증국번은 그날의 일기에서 아주 가볍게 이렇게 묘사했다: "술초(戌初), 붙잡은 태평천국 충왕을 친히 몇 마디 심문했다." 이 몇 글자에서 우리는 증국번이 이수성을 가볍게 대하고 무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증국번은 승리자였다. 당연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자격이 있다. 이외에 증국번은 문화나 사상에서도 그보다 뛰어났다. 당연히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바로 이 예전의 적수에 대하여 증국번은 크게 실망한 것이다. 그러나, 이수성을 만났을 때부터, 증국번은 이미 이수성을 죽이겠다고 결정한다. 다음 날, 증국번은 안경(安慶)의 아들 증기택(曾紀澤)에게 보낸 서신에서, "태평천국 충왕을 친히 한번 심문했다. 곧 이 곳에서 처결할 것이다"

 

증국번이 왜 이처럼 서둘러서 이수성을 죽이려고 했을까? 이것도 수수께끼라면 수수께끼이다. 아마도, 사람을 잘 알아보는 증국번은 이수성의 관상과 언행에서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가 보기에 이 태평천국의 충왕 이수성은 아주 교활했고, 또한 태평천국에서 아주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빨리 죽이는 것만이 잔여무리들에게 철저히 동산재기(東山再起)의 헛된 꿈을 품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그저 추측중 하나이다.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증국번이 이수성을 심문할 때, 이수성이 아마도 증국번에게 의거를 일으켜 청나라를 전복시키고 한족황실을 회복하라고 권했을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그가 십여만의 옛부하들을 모아서 증국번을 도와주겠다고 했을 수 있다. 이수성의 자술서에는 아마도 이와 관련한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증국번이 삭제해버린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증국번은 거리낌이 없을 수 없다. 이수성을 만일 북경으로 압송한다면, 분명히 이에 관련된 얘기를 꺼낼 것이다. 아니면 증씨형제에 불리한 말을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증국번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이외에 증국번이 꺼리는 또 하나는 만일 이수성을 북경으로 압송하는 도중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 호랑이를 산 속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큰 화근을 남기는 일이다. 종합하자면, 만일 이수성을 북경으로 압송하면 그 후는 그가 통제할 수 없어지니, 백해무익할 뿐이다. 그래서 아예 금릉에서 그를 속히 처결하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당연히,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이수성이 증국번과 얘기할 때, 금릉에서 빨리 죽여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 오래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 증국번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어, 금릉에서 죽인 것이다. 최소한 이렇게 하면 시원하게 죽을 수는 있다. 북경으로 간다면, 아마도 갖은 고생을 다하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능지(凌遲)'을 당하게 될 것이다. 증국번의 사람됨으로 봐서, 이 정도를 들어줄 도량은 된다. 이런 추측을 방증하는 것이라면, 이수성이 증국번을 한번 만난 후에, 자기가 죽을 날이 다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상처뿐인 몸으로, 거의 매일 7천자의 속도로 자서전을 썼다.

 

1864년 8월 7일, 이수성은 오전에 막 자서전을 끝내고, 저녁에 형장으로 끌려가서 처결당한다. 조열문(趙烈文)이 나중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이수성은 죽기 전에 계속 이렇게 말했다: "중당(증국번)의 후덕함은 각골난망이다. 이승에서는 이미 힘들어 졌으니, 내세에 갚겠다." 마치 증국번에게 크게 감사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죽기 전에, 이수성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죽어갔다. 비록 그의 문화수준은 낮았지만, 그래도 10수의 절명사(絶命詞)를 남겼다. 증국번은 명을 내려: "능지를 하지 말라. 그의 수급은 각 성에 보내어 전시하고, 몸은 관에 넣어서 염해주라" 이수성이 능지를 면했다는 것만 하더라도, 증국번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정의 관례로 보자면, 이같은 반란군의 두목에게는 항상 능지를 했었다. 증국번이 이수성을 금릉에서 죽인 것은 최소한 이수성에게 육체적인 고통은 면하게 해준 것이다.

 

나중에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증국번이 이수성을 친히 심문한 다음 날, 즉, 7월 29일 밤에 증국번은 증국전과 긴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홉째동생 증국전에 대하여 증국번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동생은 함풍6년 "길(吉)"자영을 만들어 증국번을 따라 전투를 시작한 이래로, 성과 산채를 공격하여 점령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좌종당(左宗棠)이 증국번에 게 물었다. 증국전에 대하여 형으로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고. 증국번의 대답은: "살인여마, 휘금여토(殺人如麻, 揮金如土, 사람을 무수히 죽이고, 돈은 흙처럼 마구 쓴다)"였다. 증국번이 보기에, 증국전은 군사기재였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거나, 인간관계를 처리하는데에는 지혜가 부족하고 성숙되지 못했다. 현재 상군(湘軍)을 감축하려면 가장 먼저 얻어야 하는 것이 증국전의 동의이다.

 

야사에서는 형제 두 사람의 담화내용을 이렇게 기술한다. 두 사람이 만난 후, 증국전은 형의 마음을 알고, 시원하게 털어놓고 말한다: "동남의 반벽강산에 주인이 없는데, 형께서는 뜻이 없으신지?" 이것은 실제로 그가 증국번에게 반란을 일으킬 뜻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증국번은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그런 머리가 달아날 말을 네가 감히 하다니, 멍청하구나!" 증국전은 불복하듯이 해명했다: "양강총독도 형이고, 민절총독은 좌종당이며, 사천총독은 나병상이고, 강소총독은 이홍장이다. 이외에 3명의 현임 총독, 5명의 현임 순무가 모두 상군(湘軍)의 사람들이다. 형의 수중에는 20여만의 상군 정예병이 있는데,필요하다면, 현재 붙잡아둔 이수성을 설득하여, 그가 부른다면 10만의 태평천국에서 항복한 자들도 형을 따라서 의거에 나설 것이다. 이렇게 하면, 수중에 30여만의 정예병사를 갖는 것이다. 이런 병마라면 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한족강산을 회복하여, 일대제왕에 오르는 것도 가능하다. 형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증국번은 고개를 흔들면서 천천히 말했다: "아홉째,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환난은 함께 할 수 있지만, 부귀영화를 함께 할 수는 없다. 좌종당은 일대효웅이다. 사야(師爺)로 있을 때도 남의 아래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은 나와 평기평좌(平起平坐)하고 있다. 그가 내 아래에서 신하로 있을 것같은가? 나는 확신한다. 만일 거사한다면 제일 먼저 병사를 이끌고 토벌하러 나타날 것이 좌종당이다; 다시 이홍장을 보자. 내가 순조로울 때라면 이홍장은 항상 나의 학생일 것이다, 만일 순조롭지 않으면 이홍장은 반드시 창을 거꾸로 들고 공격해올 것이다. 이홍장이 얼마나 총명한다. 명리심도 아주 강하다. 그는 당연히 현재의 권력과 지위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상군을 보라. 여러해동안 전투를 하면서 정예병사들은 일찌감치 다 죽었다. 우수한 사람들은 일찌기 희생되었고, 부대도 이미 늙었다. 다시 싸울 힘도 없다. 그리고 이수성을 보자. 그가 투항하지 않았다면 다시 떨치고 일어설 수 있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가 일단 투항하면, 바로 주구이다. 누가 그의 말을 듣겠는가?" 이 말을 듣고 증국전은 할 말이 없었다. 증국번은 덧붙여 말한다. "병사들은 밥을 먹고, 관직을 얻고 돈을 벌기 위해서 따른다. 마치 한 무리의 개를 기르는 것과 같다. 네가 뼈다귀를 던져주면 그는 너를 따를 것이다. 다른 사람이 더 큰 뼈다귀를 던져주면 그는 당연히 너를 팔아먹을 것이다. 내가 지금 상황에서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뼈다귀를 던져줄 수 있을 것같은가?"

 

증국번과 증국전의 이 대화는 당연히 야사에서 상상한 부분이다. 그러나, 증국번과 증국전의 성격과 관계로 보아서 이러한 얘기가 오갔을 것이라는 것은 이치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증국번이 금릉에 도착한 후, 그의 많은 심복들 예를 들어, 팽옥린(彭玉麟), 조열문등의 사람들, 그리고 저명한 '제왕지학'을 연구했다는 학자 왕개운등이 모두 증국번을 찾아와서 의도를 탐색했다. 그들은 모두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숨겨서 말했다. 어떤 사람은 조정의 포상이 불공평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증국번이 억울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함풍제는 일찌기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는데, '금릉을 함락시켜 되찾아 오는 자는 왕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증씨형제가 금릉을 함락시키자, 서태후와 동치제는 인색하게도 증국번에게 "일등의용후(一等毅勇侯)"를 내렸을 뿐이다. "왕"과 "후"는 차이가 천리만리나 난다. 부하와 막료들의 탐색에도 증국번은 전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점점 더 말들이 많아지자, 증국번은 아예 대련을 하나 친필로 썼다. "의천조해화무수, 유수고산심자지(倚天照海花無數, 流水高山心自知, 하늘에 기대고 바다에 비추어보면 꽃은 무수히 많고, 흐르는 물과 높은 산은 스스로 마음을 안다)". 그리고는 금릉의 거주지에 걸어두었다. 이렇게 하자, 증국번의 마음을 탐색하려던 사람들은 이 대련을 보고는 증국번의 결심을 분명히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