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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소기)

유소기(劉少奇)의 아홉 자녀

by 중은우시 2006. 10. 24.

유소기는 일생동안 9명의 자녀를 둔다. 첫부인인 하보정 열사와의 사이에 이남일녀, 즉, 장남 유윤빈, 장녀 유애금, 차남 유약윤이 있고, 왕전과의 사이에 일남일녀, 즉 차녀 유도, 삼자 유윤진이 있으며, 왕광미와의 사이에 1남3녀, 즉 삼녀 유평평, 사남 유원, 사녀 유정정, 오녀 유소소가 있다.

 

유윤빈(劉允斌)

 

1925년생. 유소기의 장남. 태어나자마자 호남농촌의 한 농민에게 맡겨짐.

13살 때 당조직에 의해 연안으로 보내짐

1930년 여름 유윤빈은 주은래를 따라 소련으로 감

1945년 2월 모스크바강철학원에 입학. 같은 해 공산당 입당. 이후 모스크바대학 화학과로 옮김. 졸업후 연구생시험합격. 당시 소련유학생중 유일하게 부박사학위를 취득함. 모스크바에서 유윤빈은 소련여자와 결혼. 딸을 하나 낳음. 이름은 소피아임.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이름은 알료샤임. 중국어 이름은 "요요"와 "소소"임.

나중에 중소관계가 악화되어 유소기는 유윤빈에게 귀국을 종용하여, 그들은 이혼함.

딸은 소련에 남은. 유윤빈은 귀국후 서북고비사막의 핵실험기지에서 부공정사 겸 부문당위서기를 맡음. 중국의 최초원자탄연구제조자의 한 명. 고비사망에서 엔지니어인 여자와 새로운 가정을 꾸림. 결혼후 아들 둘을 낳음. 문혁기간중에 유윤빈은 박해를 받아 1967년 12월 포두시 교외의 철괴에서 차륜에 깔린 그의 사체를 발견함. 당시 42세.

 

유애금(劉愛琴)

 

1927년생. 그녀는 1살도 되기 전에 왕정위의 "5.15" 대학살을 당하여 무한의 한 노동자에게 맡겨짐. 오래지 않아 이 노동자도 살해되고, 노동자의 처는 그녀를 기를 수 없어 삼륜차노동자의 동양식(童養[女息], 어릴 때 데려와서 기른 후 부인으로 삼는 것)으로 보내짐.

11살때 주은래가 사람을 보내어 찾음. 연안보육원에서 공부. 다음 해, 유애금은 오빠와 함께 소련에 유학감. 유애금은 스페인 유학생과 결혼. 유소기는 딸의 결혼에 매우 불만이 많았음. 자기의 딸이 외국인의 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음.

1949년 7월, 유애금은 모스크바통신기술학교를 졸업. 이 때 유소기가 소련을 방면하여 딸을 데리고 귀국함. 유애금은 귀국후 7,8년을 독신으로 지냄. 그 후 정치조건이 매우 좋고 용모가 평범한 남자에게 시집감. 결혼후 자식을 셋 낳음.

유소기가 박해를 받은 후, 그 정치조건이 좋은 남편은 세 아이를 데리고 그녀를 떠남. 문혁때 유애금은 감옥에 갇히지는 않음. 내몽고초원은 도시만큼 투쟁이 격렬하지는 않아서 생명을 보존함.

유소기가 명예회복된 후 하북성 석가장에서 일함. 현재는 중국공안대학의 러시아어과 교수. 그녀는 일찌기 부친을 그리워하는 회고록 <<딸의 추억>>을 썼고, 러시아어로 번역했음.

 

유윤약(劉允若)

 

1931년생. 그가 겪은 고통도 그의 형이나 누나에 못지 않음. 3살때부터 상해에서 유랑생활을 함. 그를 거둔 것은 거지였음.

1946년 사람들이 그를 찾았을 때 거리에서 신문을 팔고 있었고, 옷은 거지옷이었고, 피골이 상접했음.

1949년,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감. 시험을 통해 북경사범대학 제1부속중학에 입학.

1954년, 자신의ㅣ시험성적으로 모스크바항공학원 무선전의표 전공으로 입학함. 나중에 유윤약은 소련여자와 사랑에 빠짐. 1960년 결혼준비할 때, 아직 졸업하지 않은 유윤약은 귀국하라는 통지를 받음. 유소기가 보낸 것임. 북경으로 왔다가 다시 소련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다 문혁을 맞이함.

문혁후 유윤약은 7기부 "916"홍위병조직의 지도자가 됨.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강청이 유윤약은 외국과 내통했다고 체포함. 유윤약은 북경제1감옥에 들어가서 8년을 갇혀 있음

1974년에 석ㄷ방되고, 1977년 유윤약은 급성간염으로 병원에서 사망함. 일생 결혼하지 않음.

 

유도(劉濤)

 

1944년생. 연안 조원에서 탄생. 그녀는 북경사범대학 여자부속중학을 다님. 1962년 문혁전에 청화대학 자동제어과에 시험으로 입학함. 홍색공주로 학교내에서 매우 유명했음. 문혁이 시작되자 그녀는 청화대학 문혁준비위원회 부주임이 됨. 나중에 유도는 섭원재, 붕대부의 진영에 가담하여 무력투쟁을 함. 그녀는 1966년말에 단독으로 강청과 만나는데, 강청은 그녀에게 부친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쓰게 함. 어쩔 수 없이 유도는 부친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쓰게 됨. 이후 하북성 승덕시로 보내어졌다가 다시 북경으로 옮김. 북경에 돌아온 후 그녀는 대학동기인 만윤남과 결혼함. 결혼후 아들 만방을 낳음. 1977년, 유도와 만윤남은 불화로 이혼하고, 아이는 만윤남에게 맡김.

유도는 두번째 남편과 운남과 버마 국경선에서 월경하려다가 체포됨. 심문을 거쳐 그녀는 미국으로 도망치려 했다는 것이 밝혀짐. 유도는 자료를 몇 가지 들고 나갔는데, 유소기와 관련된 자료였음. 그러나 정보가치는 별로 없는 것이었다고 함.

 

유윤진(劉允眞)

 

그는 초중3학년을 다니고 풍태농업학교에 입학함. 문혁당시 당해 학교의 단위서기를 맡은 바 있음. 자녀들중 유일하게 대학을 다니지도 않고, 유학을 가지도 않았음. 이후 장사의 장사상업은행에서 부행장까지 지내다가 은퇴하고 평안한 생활을 지냄.

 

유평평(劉平平)

 

1969년, 20세도 되지 않은 유평평은 감옥에 갇힌다. 나중에 산동연해의 양마장에서 노동개조를 받는다. 명예회복후 그녀는 미국의 컬럼비아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5년간 공부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한 학기에 12학점을 딸 때, 그녀는 24학점을 따낸다. 식품전공 학사, 식품영양학과 석사, 그리고 영양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유학시 그녀는 유소기의 딸임을 숨기기 위하여 왕청(王晴)이라는 이름으로 생활한다. 1987년 귀국후 그녀는 중국식품연구소 소장이 된다. 1990년 그녀는 국가상업부 과기부 부사장이 되고, 1994년 국내무역부 과기무역사 부사장, 사장이 된다.

 

유원(劉源)

 

1951년생, 문혁이 시작되었을 때 북경4중의 1년생이었다. 얼마되지 않아 유원은 학교에서 심사와 비판을 받았다. 나중에 산서 안북으로 가서 감독노동을 받았다. 거기에서 8년을 보내고, 거기서 감옥에서 지낸다.

1976년 유원은 북경으로 돌아와서 중기공장에서 보통노동자로 지낸다.

1977년 문혁후의 제1차 대학입시에서 북경사범대학 역사과에 합격한다. 1982년초 대학졸업후 유원은 부친 유소기가 사망한 하남성 신향현 칠리영향으로 가기를 원한다. 그는 보통농민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향정부로 보내어지고 일찌기 향장, 신향현 부현장을 맡는다.

1984년 7월, 유원은 정주시 부시장으로 선임되고, 1987년부터 1988년에는 하남성에서 개최된 제7기 인민대표대회에서 비교적 많은 득표로 부성장에 당선된다.1992년 유원은 무경 수전지휘부에서 소장 정치위원이 된다. 이후 2000년 중장으로 승진한 후, 무경총부 부정치위원으로 갔다가, 총후근부 부정치위원이 되었으며, 2005년 12월에는 중국인민해방군군사과학원 정치위원이 된다.

 

유정정(劉亭亭)

 

문혁기전에 북경사대 여자부중의 학생이었다. 그녀는 문혁중에 일하면서 스스로 공부하였고, 문혁이 끝난 후 순조롭게 중국인민대학 외국어과에 입학한다.

1981년 유정정은 대학졸업후 미국 보스톤대학에 입학한다. 4년후 경영대학원 석사연구생이 되고, 1년을 공부한 후 다시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에서 2년을 공부한다.

졸업후 미국뉴육에 남아서 록펠러회사에서 근무하고 이후 자기의 회사를 창업한다. 홍콩연아집단과 중무성가국제경매유한공사의 동사장 겸 총재를 맡고 있다. 그녀는 모친 왕광미가 맡았던 '행복공정'이라는 자선사업을 맡아서 하고 있다.

 

유소소(劉瀟瀟)

 

유소기의 가장 막내딸이다. 문혁때 유소기의 일가로서 유소소는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6살의 나이로 중남해에서 부모를 비판하는 대회에 참석해야 했다. 문혁후에 그녀는 1979년 북경시 대학입시 단과수석, 종합2등의 성적으로 북경대학에 입학한다. 이후 1980년 다시 높은 성적으로 상해동제대학 독일유학반에 합격한다. 이후 천성적인 총명함과 노력으로 서독 본대학, 칼스버그공학원에서 유전공학을 공부하고 생명공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현재는 서독에서 영주권을 얻었다. 현재는 남편과 상해에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