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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법률/사건이야기

왕건광: 온주 제일 사기극의 시말

by 중은우시 2006. 10. 24.

2006년 8월 14일, 온주제일사기꾼이라고 불리우는 "왕건광(王建光)"이 북경시 공안국 조양분국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두가지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데, 불법공중자금모집죄와 상업프로젝트조작사기죄이다. 그의 사건이 심리되면서 진상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1년반동안 70여명의 피해자로부터 피해금액만 3.4억위안을 사기쳤다.

 

사기꾼 왕건광

 

왕건광은 1967년에 온주시 영가현 교하진에서 보통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교하진에서는 완구생산이 한참 인기있었으므로, 그 영향을 받아, 왕건광은 어려서부터 비지니스를 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1987년 20세가 된 왕건광은 고모부인 진중재를 따라 북경으로 왔고, 수천위안을 빌려서 북경 "절강촌"에 살았다. 목서원(木[木+犀]園)의 경온북장시장에서 교육완구 및 복장원재료 장사를 시작했다. 이것은 왕건광이 처음으로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왕건광은 기적을 창조하지 못하고, 3년후에, 그의 장사는 망해버렸다. 1990년, 왕건군은 장소를 옮겨서 북경에서 다른 출로를 찾았다. 실제로 그가 건드린 분야는 매우 많았다. 무역, 복장, 신발, 금속등인데, 그 기간동안 잘된 것도 있었고, 실패한 것도 있었다.

 

1992년까지 황건광은 북경으로 와서 장사를 하는 온주의 소상인중의 하나였다. "그는 하는 것마다 실패하고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는 개인사업가였다" 그의 좋은 친구인 장현량의 말에서 왕건광은 창업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하고, 온주상인의 특유한 고생을 견디고 힘들게 노력하며 영원히 멈추지 않는 창업정신을 가지고 있었음은 알 수 있다.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왕건광은 모든 기회를 노렸다. 그 동안 그는 재산은 얻지 못했지만, 과감한 결단, 모험, 신중의 비지니스 소질은 닦을 수 있었다.

 

1992년, 왕건군은 그의 창업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국내 주식시장이 점점 뜨거워지면서 그에게 기회는 왔다. 주식거래소로 갈 때 그에게는 남에게 빌린 5만위안이 있을 뿐이었다.

 

그 후의 왕건광은 진정으로 "점석성금(點石成金, 돌을 만지면 황금이 되는)"의 기쁨을 맛보았다. 성장기의 국내 주식시장은 그에게 상상하기 힘든 재산을 가져왔다. 평생 처음으로 100만위안을 손에 만지는 기쁨도 ㅜ렸고, 은행부채 180만위안으로 법원에 제소되어 존망의 기로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 때, 주식시장에서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본 왕건광은 좀더 통크게 자본시장에서 실력을 겨뤄보기로 결심한다. 장현량이 표현한 바에 의하면, 이후 왕건광은 자주 얼굴을 드러냈고, BMW, 벤츠등을 타고 다녔고, 고위관료들과의 왕래도 많아졌다.

 

지금 보면, 왕건광이 당시에 과시했던 "위로는 하늘에 통한다"는 겉모습은 조금 후에 진행되는 "불법자금모집"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기극의 시작

 

왕건광에 접근했던 또다른 서(徐)씨 성의 인사에 따르면 왕건군이 주식시장에서 잘나갈 때, 자금소요량이 더욱 많아졌다. 비록 그는 3년이 되기 전에 "5000만 내지 7000만위안"의 이익을 얻었지만, 더욱 큰 수익을 노렸던 왕건광은 얼마되지 않아 지하축구도박시장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여러해동안 사업을 했던 왕건군의 주위에는 일군의 긴밀한 비지니스 파트너들이 몰려들었다. 1992년 주식투자를 시작한 후 그의 주변에는 투자팀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왕부림, 운건등의 주요인물이 속속 왕건광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이후는 왕건광의 "휘황기"였고, 그들은 "왕씨팀"으로 불리웠다. 이사람중의 일부분은 왕건광과 함께 기소되었다.

 

왕씨팀의 집단실력과 주식시장에서 얻은 거대한 이익을 믿고, 왕건광은 한단계 더 나아가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2004년, 왕건군은 진중재를 회사총경리로 앉히고, 당해 회사이름으로 투자를 진행했다. 이것이 나중의 온주 제일 사기극의 시작이었다.

 

회사로 만든 후에, 왕건광의 새사업은 규모에 있어서 이전의 개인사업자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비록 "왕건광 보인은 주식, 선물, 옵션등에 대하여 하나도 몰랐지만", 고액연봉을 받고 모셔온 직원들에 의하여 왕씨팀은 자본시장에서 속속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이런 좋은 추세는 2005년까지 계속되었다.

 

2005년 상반기에 주식시장은 휴면기에 들어갔다. 여기에 왕건광이 돈을 많이 들인 지하축구도박사업은 잘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주위의 친척, 친구들로부터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 행위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왕건광이 사기의 길로 들어선 첫걸음이라고 얘기한다.

 

"그의 축구도박장은 전 북경에서 제일 컸다" 이것은 교하진 사람 서민의 말이며, 일찌기 그는 왕건광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2005년이후, 왕건광은 고향인 교하진에 몇번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예전보다는 확실히 많이 나타났다. "매번 올 때마다 앞뒤로 사람들이 몰려왔고, BMW등은 모두 군대번호판이었다"

 

자금모집에 먼저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왕건광과 손을 잡고자 하는 친척 친구는 널려 있었고, 그들은 적극적으로 왕건광이 친척의 정분을 봐서 한자리끼워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왕건광은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말할 필요도 없이 수백만의 자금이 그의 주머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서씨성의 인사는 사람들이 욕심이 많았다고 한다. 왕건광은 최소한 20%의 이익을 보장해주겠다고 그들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사기당한 사람들은 한동안 고액의 이윤을 얻었다고 한다. 10만을 가져간 후 3주만에 12만을 벌었으니, 수익율이 년70%에 달했다는 것이고, 전부 현금으로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투자한 사람들이 원금을 달라고 할 생각은 하지 않았고,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당연히, 자금모집한 지역은 교하지역뿐은 아니었다. 북경의 목서원, 광주일대의 온주장사꾼들도 속속 가입했다. 이 때 왕건광의 신용도와 그의 몸값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50만위안의 현금을 왕건광에게 던져주면서, 영수증도 받지 않았다. 그저 "왕건광이 불쾌하게 생각하면 투자기회를 잃어버릴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기극의 들통

 

3억여위안의 자금을 가지자, 왕건광의 욕심은 더욱 커졌다. 그는 하루빨리 닭이 알을 낳게 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왕씨팀은 심천과 상해의 주식시장과 국채선물시장에서 활을 최대한 당겼다.

 

그러나, 왕건군과 그의 팀이 주식시장에서 보여준 전적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2006년 5월에 이르러, 소식이 정통한 인사들은 왕건광이 주식시장에서 근 1억위안의 손실을 봤다고 전했다. 심지어 자세히 관찰한 사람들은 운건이 타고 다니던 BMW745마저도 왕건광이 팔아버렸다는 것을 주목했다.

 

이 시기가 나중에 관련인사들이 분석한 바에 의하면, 왕건광에게는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최소한 3억위안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이정도에서 그만둘 수도 있었는데, 주식시장에 대한 미련은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후에 왕건광은 마음을 바꿔 축구도박에 주력했으나, 왕건광이 최후로 한번 더 승부를 걸어본 것이었다.

 

2006년 6월, 독일월드컵이 열렸고, 왕건광은 그동안 길러온 닭이 알을 낳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보았다. 지하축구도박업에서 왕씨팀은 이전의 자그마하게 벌이던데서 벗어나, 대량으로 도박금을 받아들였다.

 

당시 북경에서 그의 지하축구도박장은 가장 큰 것이었고, 그는 직접 영국쪽과 거래했다. 장현량이 토로한 바에 의하면 월드컵기간동안 왕건광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매우 컸다. 그리고 그 때 그는 무엇인가를 예감한 듯이, 장현량이 그가 투자한 60만위안을 돌려달라고 하였지만 계속 미루기만 하였다.

 

장현량은 60만의 돈을 받지 못하자, 여러번 재촉한 끝에, 왕건광으로부터 "60만위안을 수령함"이라는 영수증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장현량은 행운아이다. 왜냐하면 사건이 터진후에는 왕건량의 통장에 겨우 5000만위안의 정도의 현금밖에는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련법률규정에 의하면 영수증을 가지고 있는 장현량은 그래도 약20%의 돈은 회수할 수 있게 되었다.

 

왕건광은 이런 스트레스를 그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풀었다. 2006년 7월초, 고향에서 온 몇몇의 피해자들이 공동으로 왕건광을 핍박하였다. 오랬동안 찾은 끝에 한 호텔에서 왕건광을 찾아서, 영수증을 쓰도록 강요했다. 이후 왕건광은 사라졌다.

 

그러나, 소식은 교두진의 사람들의 귀에 바로 들어갔다. "왕건광이 월드컵기간동안 축구도박으로 1.3억위안을 잃었고, 사람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섭씨 성의 기업가에 의하면 이런 상황하에서 이것은 사기극이라는 판단하에 산리툰프로젝트투자상들은 경찰에 신고했다.

 

2006년 8월 14일, 북경의 작은 호텔에서 한 피해자에게 영수증을 써주던 왕건광은 북경공안국 조양분국의 경찰에 체포되었다.

 

"친우팀"모델의 폐단

 

엄격하게 얘기하면, 불법자금모집이건 비지니스프로젝트사기이건, 왕건광의 수단은 그다지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똑똑한 온주상인들이 다 속아넘어갔는가?

 

욕심때문이다라는 것이 광주절강상회 판공실 부주임 임붕의 분석이다. 자본의 욕심이외에 온주상인들간에는 뿌리깊은 친척, 고향개념이 있어 같은 고향사람들끼리의 신뢰도와 정이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친척친구팀과 같은 비지니스 폐단은 이번 사기사건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실 왕건광이 제공한 프로젝트설명서와 고찰시 제출한 프로젝트심사허가표를 믿고, 산리툰프로젝트에 투자했던 '주주'들은 다른 법률적인 증빙은 전혀 보지 못했다. 이것은 비지니스투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일한 해석은 왕건광의 성공한 모습에 온주의 고향사람들이 미혹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사기극이 폭로되기 전에, 피해자들간에 투자건에 대하여 서로 교류하거나 의견을 나눈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서로 친한 친구간이면서도 상대방이 거기에 투자했는지를 몰랐다고 한다. 서씨 성의 인사는 이것은 왕건광이 일부러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영수증마저도 받지 않았다는 데서는 온주상인들의 원시적인 특색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경찰이 최종적으로 사기금액을 확정하는데 매우 골치아팠다. 북경공안부서는 온주로 가서 이 사건을 조사하고, 현재까지 관련된 금액은 신고된 것만 3.4억위안이라고 한다. 반달전까지는 2.8억위안이었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왕건광은 3.6억위안을 모집했다고 한다.

 

동시에 산리툰프로젝트의 피해자들이 이 사건에 대하여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이다. 소수의 피해자들이 이 건을 얘기하는 외에 대부분은 이 건을 얘기조차 하고 싶어하지 않거나 부인한다. 그들은 "가족이 그 일에 관여했나보다"라는 정도만 얘기한다.

 

당연히 이런 기업가들에게 손실은 기업의 정상적인 운영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4000만, 2000만은 고사하고 1000만위안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기업이 이런 유동자금을 버텨낼 수 있겠는가. 광주온주상회의 판공실 주임은 온주상인들의 잠재의식속에 있는 가족색채가 농후한 투자모델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피해자인 온주상인들의 입장이 곤란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외국의 유명브랜드 대리상인 기업도 이번 투자에서 1000만위안을 손실입어 매우 곤란하다고 한다. 그러나, 신용문제가 나타날 것이 두려워 내놓고 피해자라고 말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피해를 입은 상인들도 사기당했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드러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온주 제일 사기극"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