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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 의안황후(懿安皇后)의 행방에 대한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6. 10. 23.

의안황후(懿安皇后) 장씨(張氏)는 명희종(明熹宗) 천계제(天啓帝) 주유교(朱由校)의 황후이다. 천계제 시절에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했는데, 장황후는 이에 매우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병석의 천계제로 하여금 천계제의 다섯째 동생인 주유검(朱由檢)을 황위계승자로 삼도록 노력한다. 이에 따라 주유교는 주유검을 불러서 후사를 부탁하고 형수를 잘 돌봐주도록 부탁한다. 이후 주유검이 황제위에 오르니 그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명사종(明思宗) 숭정제(崇禎帝)이다.

 

명나라가 이자성의 군대의 북경점령으로 멸망할 때인 숭전17년(1644년), 숭정제는 매산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고, 숭정제의 황후인 주씨는 궁중에서 자살한다. 그런데, 궁중에 남아 있던 의안황후의 생사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며, 서로 다른 기록이 남아 있어, 명말의 하나의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첫째, 항복설, 이것은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먼저 퍼진 소문이다. 조사금이 지은 <<갑신기사>>에는 "전하는 바로는 의안황후는 나가서 맞이하고, 금은을 바쳤다, 황후의 이후의 행방은 모른다"고 적고 있다.

 

둘째, 도피설. 곡응태의 <<명사기사본말. 갑인지변>>에서는 숭정제가 사람을 의안황후의 거주지로 보내어 그녀에게 자결을 권고했으나, 창졸간에 자결할 수 없었다. 의안황후는 궁중의 어지러움을 틈타, 청의의 머리를 풀어 헝크리고 걸어서 성국공의 집으로 갔다. 이 설은 나중에 장대의 <<석궤서후집>.과 계육기의 <<명계북략>>에서도 채택한 것이다. 담천의 <<국확>>에서도 이 설을 주로 하였다.

 

셋째, 포로설, 담천의 <<국확>>에서는 양사총의 말에 따라 의안황후가 "적에게 포로로 되었으며, 형벌을 받고 금은을 빼앗겼다"라고 적고 있다. 유월의 <<호동만록>>은 왕원의 <<거업당집>>을 인용하여 의안황후가 포로로 된후 즉시 피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 책에서는 영상의 고택생이 왕원에게 말하기를 하남의 위지 사람인 왕대본은 농민반란군의 장수였는데, 북경을 점령한 후 왕은 다른 4명과 의안황후를 포로로 잡았다. 어떤 사람이 황후에게 불손하게 대하였다. 왕대본은 대노하여 "이 사람은 일대의 국모인데, 어찌 함부로 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칼을 뽑아 황후를 죽여버렸고, 다른 사람에게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넷째, 구조후 자결설, 의안황후가 사람들에게 구해졌으나 나중에 자결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녀를 구한 사람에 대하여는 세가지 설로 나뉜다. (1) 이암(李巖). 오매촌은 <<수구기략. 통성격>>에서 이암이 "대의를 쫓아 의안황후를 액에서 구해내었으나, 그녀는 스스로 자결했다"라고 적고 있다. 공정얼의 <<성후견정기>>, 대립의 <<회릉유구시종록>>권17, 팽손이의 <<평구지>> 권9, 왕굉의 <<산지>. 2집권9, 왕용장의 <<갑신일기>>등의 책에는 약간씩의 내용이 다르기는 하나 모두 이암이 그녀를 보호해서 스스로 자결하도록 해주었다고 적고 있다. (2) 유종민(劉宗敏). 담천의 <<북유록. 기문>>에서는 내시 조박의 말을 인용하여 "의안황후가 난을 당했는데, 반란군장수 유종민이 말하기를 국모이므로 욕을 보일 수는 없다고 하고 외척인 장씨에게 보내주었고, 장씨의 모친은 의안황후와 같이 죽었다고 적고 있다 (3) 통칭하여 "적(賊)"이라고만 적은 경우, <<국확>> 권100에서 "적은 성국공의 집을 수색하여 의안황후를 찾았다. 견여로 태강후 장씨집에 보냈다"고 적고 있다.

 

다섯째, 궁중자결설. 하숙의 <<의안사략>>은 이 설을 주로 취하고 있다. 그는 환관 왕영수가 말한 바대로 농민군이 경성에 진입할 때, "궁중에서 황후는 변고를 듣고는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적고 있다. 납란성덕의 <<녹수정잡식>>에서도 그가 왕영수가 의안황후가 궁중에서 자결한 것을 들었다고 한다. 주동곡의 <<상원집>>에서는 "서안의 장맹견이 적을 따라 궁에 들어갔는데, 친히 황후가 죽은 것을 보았고, 일찌기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명사. 후비전2>>에서는 비교적 불명확하게 적고 있다. "이자성이 도성을 함락하였고, 황후는 스스로 목을 매었다. 순치원년 세조 장황제는 희종릉에 합장하도록 명했다"

 

이상의 여러가지 주장은 서로 다른 점이 많다. 하나하나 분석해보기로 하자.

 

조사금의 <<갑신기사>>는 비록 들은바를 적은 것이지만, 그가 당시 농민군에 의하여 감옥에 갇혀 있었으므로 소식을 듣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적은 것이 정확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항복했다는 것은 그저 소문이었고, 당시에 이미 반박이 나와 있었다. 하숙은 <<의안사략>>에서 의안황후가 항복하였다는 것은 매우 의문이 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의안황후가 엄정하고 장부의 기개가 있었다고 하면서 난을 당해서 구차하게 삶을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순치 17년(1660년)에 북경에 왔을 때, 옛날 궁중에서 일했던 내시 왕영수를 만나 물어보았더니, 항복한 것은 희종의 임귀비(任貴妃)였다는 것이다. 임귀비는 위충현의 양녀로 총명하고 미모가 뛰어났으며 나중에 입궁했다. 이자성이 부대를 이끌고 북경을 함락시킬 때, 궁중은 어지러웠으며, 의안황후는 변고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 그러나 임귀비는 옷을 차려입고 나가서 항복했는데, 스스로 천계제의 황후라고 칭했으며, 농민군이 바로 데려갔다. 나중에 농민군이 황망히 도망칠 때, 그녀는 금은재화를 가지고 도망쳤으며, 북경의 어린 소년과 수백리밖으로 도망쳐서 살았다. 두사람 다 살림에는 재주가 없어서 곧 돈이 떨어지고 말았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천계제의 황후라고 얘기했고, 동네사람들은 바로 관아에 알렸다. 그녀는 북경으로 붙들려왔으며, 사약을 받았다. 왕영수는 아주 분명하게 얘기했고, 이로써 항복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조사금은 비록 오기하였으나, 우리에게 이런 느낌을 남긴다. 그는 농민군에 의하여 갇혀 있으면서, 의안황후가 항복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암 또는 유종민이 구해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한다. 만일 구해주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에 분명히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사금의 기록은 어느 정도 반란군이 구해주었다는 설을 부인하는 역할을 한다.

 

현존하는 사료로 보면, 의안황후가 다른 사람이 구해준 후에 집으로 보내어져 자결하였다거나 이암의 보호하에 자결하였다는 것은 모두 나중에 기록한 것들이고, 적지 않은 기술자들도 이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팽손이는 <<평구지>>를 쓰면서 이암이 보내주었다는 설을 채택하였지만, 그러나 하숙은 <<의안사략>>에서 후세 사가의 고증을 바란다고 적었다. 담천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북유록>>을 쓰면서 유종민이 구해주었다는 설을 채택했지만, 그러나 <<국확>>을 쓸 때는 누구인지를 명확히 적지 않았고 그냥 "적"이라고만 하였다. 왕영수는 순치17년(1660년)에 하숙에게 의안황후의 최후를 얘기할 때, 당연히 이 일과 관련된 여러가지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저 자기가 그녀의 죽음을 목도하였다는 것과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만을 얘기했고, 농민군이 구해주었다는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볼 때, 농민군이 구해주었다는 것이 그다지 널리 퍼져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암이 구해주었다는 것은 원래 <<신편소탕소설>>에서 처음 쓰여진 것이, 나중에 여러번 돌고 돈 것이고 영향력이 커진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외에 "적"에 붙잡혔다는 두 가지 설은 그저 한 개의 증빙이 있을 뿐이고, 고증이 되지 않는다. 그 중 왕대본은 위의 책에서만 나오고, 위지현방지에도 이러한 기재는 없어, 상세한 점을 알 수가 없다. "도피설"은 소문에 불과하다. 맹삼선생은 일찌기 상세히 고증한 바 있는데,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궁중관사태감인 왕영수의 구술사료는 이 설을 더 이상 주장하기 힘들게 만든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내시 조박의 설에 대하여도 언급할 것이다. 이 설은 그저 담천의 기록에만 남아 있을 뿐이므로, 증빙으로 삼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종합하면, 의안황후의 행방에 대한 여러 주장중에서 하숙과 납란성덕이 기록한 왕영수가 친히 목도한 자결설이 가장 믿을만하다. 의안황후의 사체에 대한 처리는 <<명사>. <<청사고>> 및 왕선겸의 <<동화록>>등에서 모두 순치원년에 희종의 덕릉에 합장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설이 정확한지는 나중에 덕릉의 지궁을 발굴하면 확인될 것이다.

 

의안황후의 행방에 대하여 여러가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주로 세가지 이유때문일 것이다.

 

첫째, 대순군(농민군)이 성을 함락시켰을 때, 숭정제와 주황후는 자결하였고, 궁중은 극도로 혼란했으며, 진제생의 <<재생기략>>에 의하면 당시 외인은 궁내의 일에 대하여 알지를 못했고, 궁녀들이 도망쳐나와서 길을 묻고 나서야 궁중에 변고가 있었던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숭정제와 주황후의 사체는 나왔으나 사람들이 의안황후의 사체는 보지를 봇하였다. 여기에 임귀비가 스스로 황후라고 자칭하며 항복함에 따라 여러가지 소문이 돌게 되었다.

 

둘째, 의안황후는 엄당(위충현등)을 반대하고 나중에 숭정제의 즉위와 객씨와 위충현을 죽인 일에 공로가 있었으므로 당시 사대부들이 존경했다. 그들은 항복했다는 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의안황후가 포로로 붙잡혀 욕을 당했다는 내용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농민군이 구해주었다는 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소창소사>>등이 대표적이다. 이암이 구해주었다는 것을 두찬하였다. 환관 조박은 아마도 이암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잘 알고 있는 유종민을 들었을 것이다. 나중에 기효람이 여러 사서를 종합하고, 소설의 형식으로 의안황후가 궁중에서 자살미수에 그치고, 욕을 당하려고 하는 위기상황에 이암이 나타나고, 그녀가 궁중에서 자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기효람은 아마도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이암을 끌어들인 것일 것이고, 평민옷에 머리를 헝크리고 나간 것은 그저 궁녀일 뿐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