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홍무, 영락(명의 창립황제 주원장 및 영락제 시절)때의 대이민은 파란만장하며, 슬프고 길이남을 역사적 대사건이다. 지금은 시간적으로 근 600여년이 흘렀음에도, 그들이 옮겨간 비장한 이야기는 아직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각지의 후손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노래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묻노니 나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산서홍동(山西洪洞)의 대괴수(大槐樹, 큰 홰나무)에서..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산서홍동의 노관와(老鸛窩, 오래된 황새의 집)이라네.
수백년동안 이 민요는 중국의 산동, 하남, 하북, 북경, 안휘, 강소, 절강 일대에서 연면히 전해져 내려왔고,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가가호호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명나라때의 이민역사는 그의 후손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살아서 남아 있는 것이었다.
<<홍동현지(洪洞縣誌)>>의 기록에 의하면 "대괴수는 성의 북쪽 광제사(廣濟寺)의 왼쪽에 있다. <<문헌통고>>에 따르면, 명나라 홍무, 영락제때, 산서의 백성들을 북경, 산동, 하남 등의 곳으로 강제이주시켰는데, 나무아래가 집합장소였다. 전해지는 바로는 광제사에 주재관서를 두고, 증빙을 보고 노자돈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대괴수는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절도 병난에 훼멸되었다..." 이 문헌의 기록을 보면, 바로 중국의 화동, 중원등지에서 불리우는 민요와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때 산서홍동의 대괴수에서 백성들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도 믿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명왕조는 왜 이처럼 대규모의 백성을 이주시켰는가? 민간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정해진다 "호대해복수기"등.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전쟁이 빈번했고, 홍수로 인한 재해와 역벽으로 인한 재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 흐르는 황하는 중화민족의 요람이고, 염황자손의 어머니강이다. 동시에 황하 중하류에 사는 백성들은 계속하여 재난을 당하고 있었다. 원나라 지순1년에서 명나라 홍무2년(1330-1369)까지 40년의 기간동안, 황하중하류는 7번이나 제방이 무너져 범람하였다. 홍수가 마을을 삼키고, 논밭을 삼켜서 수많은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게 만들었다. 홍수가 지난 후에는 시체가 썪고 역병이 유행하며 마을에는 사람들이 살지를 못하였다. 비옥한 하남, 산동의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뒤바뀌었으며,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원나라 말기, 조정부패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당시 황하양안에는 이런 민요가 전해지고 있었다. "석두인, 일지안, 도동황하천하반(돌로 된 사람. 외눈. 황하를 움직이니 천하가 뒤집어진다)" 이 노래는 농민반란을 암시하는 전조이다. 원나라 지정11년(1351년), 황하의 제방이 무너졌다. 중원과 화중일대의 백성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의 사활은 도외시하고, 강제로 변량, 대명등 14로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황하를 소통시키는 공사를 하게 하였다. 그해 4월, 백성들은 난고황릉강 하오의 아래에서 눈하나를 가진 석인상을 파낸다. 석상의 등에는 이런 두 문구가 쓰여 있었다. "석상이 눈이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지 말라. 이 물건이 한번 나오면 천하가 뒤집어진다(莫道石人一只眼, 此物一出天下反)"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역사상 유명한 홍건적의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이어서, 서수위가 계주에서, 장사성이 태주에서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오래지 않아. 주원장, 곽자흥도 호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원나라 정권은 군대를 모아서 각지의 농민군과 중원일대에서 결전을 벌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하남, 하북, 산동, 강소북쪽, 안휘북쪽 일대의 사람들 10에 8,9은 죽게 되었다. 원라나 군대는 농민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 땅을 뽑아버리고, 그 성을 도륙내는" 방식을 택하여서,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봄에 제비가 다시 돌아왔는데, 천리나 되는 빈땅에 사람이 거의 없네(春燕歸來物棲地, 赤地千里少人煙)"의 경지였다. 주원장의 농민군이 원나라 조정을 멸망시킨 후에야 16년에 걸친 전란은 끝이 났다.
전란이 있으면, 재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원나라 말기에는 곳곳에서 전쟁이 있었고, 홍수와 메뚜기떼의 해도 이어졌다. 1341년에서 1368년의 사이에, 황하, 회하는 자주 붕괴되었고, 거의 매년 홍수가 범람했다. 산동, 하남, 하북, 양회일대에는 백성의 집이 잠기고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마을과 도시가 대부분 폐허로 바뀌었다. 곡물을 땅에 심지 못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었다. 집이 10개 있으면 9개는 빈집이었다. 천재에 인재가 겹치고 기근과 전염병이 돌아서 중원의 몇 개 성의 백성들은 엄청난 재난을 당하였다. 이 곳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바뀌었다.
주원장은 휘주의 이승이 제출한 "성벽을 높이 쌓고, 양식을 많이 준비하며, 황제에 오르는 것은 늦춘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명나라 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런데 중원, 화중일대에는 토지가 황폐하고 사람이 살지 않아, 조세수입이 오르지 않았으며, 명나라 왕조의 통치에 부담을 주었다. 주원장은 소기, 유구등 대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성을 이주시키는 거대한 정책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대규모의 백성이주이벤트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주원장 집권초기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중원지역이 전쟁과 재난에 휩싸여 있을 때, 내지에 있던 산서성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보냈다. 산서는 지리환경이 독특하여, 동쪽에는 태행산이 병풍역할을 하고, 서쪽에는 여량산이 막아주고 있다. 가운데로는 분하가 흐르고 있는데, 그 중에서 진남평원은 아주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토지도 비옥하고 날씨도 좋아서 물산도 풍부하고 사람도 많았다. 원나라 말기의 전쟁도 이 지역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산서성에는 아직도 원나라때의 건축물이 남아있는 것만 300여개 되는데, 이것은 바로 이 지역이 원말에 전쟁에 휩싸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구로 보아서, 홍무14년의 기록에 의하면 하남과 하북의 인구는 모두 189만인데 반하여, 산서의 인구는 400여만에 달하였다. 즉, 산서성의 인구가 하남, 하북 두개 성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았던 것이다.
중국의 각 지방간 인구균형이 맞지 않은 것을 보고 주원장과 그의 후계자인 영락제는 산서를 주시했다. 당시 홍동현은 진남(산서남부)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었고, 남북왕래의 교통요지였다. 그래서 이민은 이 곳을 중심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관청에서는 백성이주를 책임지는 부서를 홍동에 두고 거기에서도 성북쪽의 광제사에 두었다. 이 절은 분하의 옆에 있고, 길옆에 있어서 지리적인 위치가 좋았다. 절앞에는 큰 홰나무가 있었고, 홰나무 위에는 황새들의 집이 있었으니, 이 곳을 상징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것들이었다.
대괴수, 노관와, 홍동현은 중국의 명나라때 대이민을 상징하는 말들이 되어 중국인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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