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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동림당과 엄당(閹黨)

by 중은우시 2006. 10. 17.

명나라의 천계제가 들어서면서 그를 황제로 올리는데 공을 세운 동림당 사람들이 중용되기 시작한다. 이미 은퇴하였던 섭향고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서 내각수보를 맡는다. 한광과 유일경은 내각대학사가 된다. 그리고 조남성은 이부상서를 맡고, 손신행은 예부상서를 추원표는 좌도어사를 맡는다. 다른 당과 비교하면 독림당이 독보적으로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동림당들의 일부 주장들이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광산감독관, 세리를 폐지한 것외에, 그들은 북경, 천진, 보정등에서 둔전을 개발하고, 수리시설을 보수하며, 벼를 심도록 한다. 동북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만주족 지방영수인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유일경은 웅정필을 추천하여 요동경락사로 보낸다. 나중에 동림당 일파의 내각대학사인 손승종은 스스로 산해관으로 간다. 그리고 원숭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녕원을 수비하게 한다. 이 웅정필, 손승종, 원숭환의 세 사람은 바로 명말에 후금의 진공을 방지한 유명한 세 사람의 장수이다. 추원표와 풍종오는 북경 선무문내에 수선서원을 내고, 일반 선비 외에 시만과 하층민중에게도 강연을 시작한다. 수선서원은 덕업을 숭상하고, 기절을 중시하며, 북경의 선비들의 기풍을 진작시키는데 좋은 역할을 하였다.

 

동림당사람들은 장거정(張居正)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매우 노력한다. 장거정은 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자기에 반대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보복을 가하곤 하였다. 나중에 동림당이 된 일부 관리들도 그로부터 타격을 받았었다. 장거정의 부친이 사망하였을 때, 예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서 묘를 지키지 않았는데, 추원표는 상소를 올려 그를 공박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태장을 맞고 변방으로 쫓겨간다. 장거정이 죽은 후에야 북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장거정이 죽은 후에 신정은 폐지되고, 장거정 본인의 관직도 박탈되며 집안의 가산을 몰수되었다. 전체 만력제의 통치기간동안 아무도 장거정을 위하여 명예회복을 주장한 자는 없었다. 천계2년(1622년)에 추원표가 상소를 올려 장거정의 공은 대단하다고 칭송하였고, 명예회복을 주장하였다. 당시에 적지 않은 동림당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고 있었고, 조정에서는 장거정의 원래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예에 따라 장사를 지내주었다. 이 일로 볼 때, 동림당 사람들은 장거정의 업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들이 개인적인 은원으로 인하여 국가대사를 그르치지는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좋은 세월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동림당 사람들이 정권을 장악한 것은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다. 위충현을 대표로 하는 엄당세력들이 신속히 팽창하였다. 결국은 위충현이 거의 독재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위충현 본인은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뢰한이며 먹고 마시고 계집질에 도박을 하여, 가산을 탕진한 다음에 환관이 되었다. 그는 아부에 재능이 있었으며 천계제의 환심을 샀다. 그리하여 사례감병필태감이 되었다. 사례감은 명나라때 환관기구 24개감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았다. 사례감병필태감은 황제를 대신하여 신하의 상소문에 대한 회답을 적었고, 대외적으로 황제의 뜻을 전달하였으며, 국가의 기밀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의 의사를 왜곡하거나 가짜로 전달할 수도 있었다. 나중에 위충현은 동창(東廠) 제독이 된다. 그리고 그의 동료인 허현순으로 하여금 금의위(錦衣衛)를 장악하게 한다. 그리고 궁중에 만여명의 환관으로 무장부대를 만든다. 동창과 금의위는 직접 황제의 명을 들으며 수사와 군사를 담당하는 기구였다. 위충현은 천계제로 하여금 종일 황궁내에서 즐기고 놀게 만들고, 또한 천계제가 좋아하는 유모 객씨와 한통속이 되어 천계제의 무능을 이용하여, 최고권력을 찬탈하였다.

 

많은 동림당의 반대당에 속하는 관리들은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의탁하기 시작하였다. 위충현은 내각, 6부와 외지의 총둑, 순무등에 자기의 일파를 앉혔다. 위충현을 위시한 환관과 동림당에 반대하는 각당이 결합하여 극단적인 반동정치집단이 나타난 것이다. 환관은 예로부터 "엄(閹, 고자라는 의미임)"이라고 칭하였으므로 이 집단을 동림당인들이 폄하하여 "엄당"이라고 불렀다. 당시내 내외의 대권은 하나로 모여 위충현에게 집중되었다. 내각의 고병겸, 위광징등은 모두 위충현의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으니 노비와 같았다. 어떤 신하들은 위충현을 만나면 길옆으로 가서 부복하였고, "구천세"라고 소리높여 불렀다. 전국의 각 부주현과 심지어 북경성내에도 위충현을 위하여 사당을 만들었다. 어떤 신하는 살아있는 위충현을 위하여 사당을 만드는데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위충현의 일파중에서 가장 악랄한 자들은 소위 "오호(五虎), 오표(五彪), 십구(十狗), 십해아(十孩兒), 사십손(四十孫)"이 있었다. 북경내외에 위충현의 밀정들이 활동했고 어떤 사람이 뒤에서 나쁜 말을 하면, 바로 밀정에 보고되고,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였다. 혀가 뽑히고 살을 벗기는 형도 당하였다.

 

동림당 사람들이 엄당에 반대하는 투쟁은 처음에는 위충현을 따르는 내각과 그 손발들이었다. 천계제에게 주위의 환관들에게 휘둘리지 말 것을 권고하는 수준이었다. 위충현은 자기를 따르지 않는 동림당 사람들을 더욱 배척하였다. 그의 계획적인 배척하에 천계2년(1622년) 대학사 유일경, 예부상서 손시행, 좌도어사 추원표와 부도어사 풍종오등이 관직을 사직하게 된다.

 

천계4년(1624년) 3월, 동림당 사람인 황존소가 상소를 올리는 중에 위충현과 객씨에 대하여 망국의 걱정이 있다고 언급하게 된다. 위충현은 대노하여 태질을 하게 한다. 다행히 한광이 극력 말리는 바람에 녹봉1년치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같은 해 6월, 좌부어사 양련이 위충현의 24개 죄상을 상소하게 된다. 이로써 위충현에 반대하는 투쟁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어서 동림당인 황존소, 이응승, 위대중, 원화중등의 많은 신하들이 봉건시대의 최고학부인 국자감의 모든 스승과 학생 천여명을 이끌고 계속 상소를 올려 위충현을 탄핵한다. 양련등이 위충현의 아픈 곳을 건드리자, 그는 매우 당황하게 된다. 천계제가 멍청하였으므로 위충현은 처벌을 받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위충현은 보복을 위하여, 탄핵상소를 울렸던 형부랑중, 동림당인 만경을 태질하여 죽게 만든다. 이로써 자신의 위엄을 세운다. 그러나 이번 탄핵에 참여한 신하는 70여명이고, 앞뒤로 100여건의 상소가 올라왔다. 그리고 동림당인들은 조정에서 어느 정도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위충현도 즉시 반격을 하지는 못하였고, 먼저 동림당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자 한다.

 

엄당으로부터의 타격으로, 천계4년(1624년) 7월, 내각수보 섭향고가 사직한다. 10월, 이부상서 조남성과 좌도어사 고반룡이 뇌물을 받은 어사 최정수를 처벌하려고 한다. 최정수는 밤새 위충현에게 달려가 구해달라고 애걸한다. "고반룡과 조남성은 모두 동림당입니다. 남성, 반룡등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에서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위충현의 양자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는 얼마되지 않아 위충현의 "오호"중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어서 위충현은 성지를 위조하여 고, 조 두 사람이 붕당을 결성하였다고 질책한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11월, 위충현은 또 한번 죄명을 날조하여 부도어사 양련과 첨도어사 좌광두를 삭탈관직하여 평민으로 만든다. 그의 핍박하에, 내각수보 한광도 사직한다. 그리고, 엄당은 산해관을 지키던 대학사 손승종이 황제를 만나는 것을 저지한다. 다음 해에는 관직을 박탈한다. 이렇게 하여, 동림당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조정에 참여할 기회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엄당은 또한 동림당에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여론을 불러 일으킨다.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중상모략을 한다. 그들은 <<진신편람>>, <<천감록>>, <<동지록>>, <<점장록>>(숭정년간에 그들이 만든 <<뇌평록>>, <<치비록>>, <<승내록>>, <<황남록>>과 천계년간에 만든 뒤의 3개를 합쳐서 동림칠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안에 이름이 든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예를 들어, <<천감록>>에는 동림당의 영수인 섭향고, 양련, 고반룡, 좌광두 등이 들어있고, <<동지록>>에는 동림당의 중요인물인 황존소, 이응승 등이 들어있으며, <<점장록>>은 수호전을 본따서 108명의 동림당인을 기재하였다. 그 중에 가장 앞에 거론한 것은 "천강성 탁탑천왕 이삼재"이고 "급시우 섭향고", "대도 양련"등등으로 기재하였다. 이 명단에는 원래 동림당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는데, 동림당 사람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동림당으로 지목된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계획을 거쳐, 위충현은 동림당인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천계5년(1625년) 3월, 허현순은 이미 감옥에 갇힌 왕문언을 고문해서 그로 하여금 양련, 좌광두등을 모함하게 한다. "봉강안"에서 웅정필의 뇌물을 받았다고 실토하게 한다. 소위 "봉강안"은 웅정필이 요동경락사로 있으면서 방어에 공이 많았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군사를 전혀 모르는 환관 왕화정을 요동순무로 파견하였다. 천계2년, 후금군대가 진공할 때 황화정은 광녕을 잃고 일패도지한다. 조정에서는 웅정필, 왕화정 두 사람에게 사형을 내렸으나 아직 집행되지 않고 있었다. 이 때, 엄당은 동림당인들을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왕문언은 죽어도 양련등의 사람을 무고하고자 하지 않았고, 그는 형을 당하면서도 큰 소리로 외쳤따. "세상에 어찌 재물을 탐하는 양대홍(대홍은 양련의 자)이 있단 말인가" 허현순은 독형으로 왕문언을 죽이고, 진술서를 날조하였으며 양련등 6사람이 뇌물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위충현은 황제의 명의로 동림당인 양련, 좌광두, 원화중, 위대중, 주조서, 고대장(당시에 6군자로 칭함)를 체포하게 하고, 연루된 조남성등 15인은 관직을 박탈하여 백성으로 만들었다.

 

"6군자"는 6개월간 옥에 갇혀 있으면서 갖은 혹형을 당하고, 옥중에서 사망한다. 양련은 흙으로 몸을 묻히기도 하고, 쇠못을 귀에 박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의연히 버텼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당시 수재인 사가법(史可法)이 있었는데, 그의 스승인 좌광두가 포락의 형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는 옥졸을 매수하여 감옥에 들어갔다. 좌광두의 얼굴이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불에 타 있었고, 왼쪽 무릎은 뼈가 전부 드러나 있었다. 좌광두는 이미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열었고, 눈빛이 형형하게 사가법에게 말하였다. "여기가 어떤 곳인데, 네가 왔느냐. 국가의 일이 이 정도로 부패하였다니. 이 늙은이는 이미 끝났다. 너는 몸을 가벼이해서 다시 알아보려고 하지 말라(뜻은 다시 옥리를 매수하는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 천하의 일을 누가 버텨줄 수 있겠는가" 그는 죽기 전에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사가법이 말한대로 "나의 스승의 폐와 간은 모두 쇠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좌광두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고, 국가대사였다. 그는 자기는 죽을 것을 알고 있었고, 사가법이 그의 뜻을 이어 천하를 지탱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랬다.

 

위충현은 동림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천계5년 12월, 조정의 명의로 동림당인의 성명을 전국에 방으로 붙혔다. 모두 309명이었다. 방에는 동림당인 이외에 동림당인을 동정하는 자와 비록 동림당인은 아니지만 엄당에 반대하는 정직한 관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방에 이름이 있는 자는 산 자는 관직을 박탈당하여 평민이 되고, 죽은 자는 관직이 추탈되었다. 같은 해 엄당의 조종하에 조정에서는 전국의 서원을 폐쇄한다. 북경의 수선서원과 무석의 동림서원도 그 중의 하나이다. 동림당인은 강학의 권리조차 박탈당한 것이다. 위충현은 옛 사건을 들춰내는 방식으로 천계6년(1626년) 정월, 정격, 홍환, 이궁의 세 가지 사건에 대하여 사실을 왜곡하여, 책을 만들고 <<삼조요전>>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황제의 성유의 방식으로 시비를 뒤집고, 흑백을 섞어버리며 동림당인이 세 사건을 빌려 사사로이 분을 풀었고, 공을 내세웠다고 적었다. 이 책이 만들어져 전국에 반포되자 다시 한번 동림당인을 박해하는 도구가 되었다.

 

천계6년 2월, 엄당은 다시 동림당인을 도살하는 큰 사건을 일으킨다. 위충현은 이미 파면되어 집에 있던 고반룡, 주순창, 요창기, 이응승, 주종건, 황준소, 주기원등 7명("역사에서는 7군자라 칭한다)를 뇌물죄로 체포한다. 고반룡은 체포된다는 소식을 듣고 호수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그는 천계제에게 올리는 유서에서 굴원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나머지 6명은 옥중에서 모두 혹형을 못견디고 사망한다. 주순창은 매번 혹형을 당할 때마다 위충현에 대하여 욕을 크게 해댔다. 허현순은 그의 이빨을 부러뜨린 후에 그래도 위공을 욕하겠느냐고 하자. 주순창은 입안의 피를 뿜으면서 더욱 심하게 욕했다. 이들 7명도 양련등 6명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굽히지 않았다.

 

엄당은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시행한다. 일찌기 이에 대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위충현은 각지에 포졸을 보내서 동림당인을 붙잡도록 하였고,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6군자, 7군자를 잡아들일 때도 군중들의 시위와 격렬한 반항에 부딪쳤었다.

 

소주에서 주순창을 체포할 때의 인민항거를 주도한 사람은 안패위, 양념여, 심양, 마걸, 주문원등 5의사였다. 그들은 모두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는데, 마걸은 형을 받을 때, "대장부가 병들어 죽으면 풀이나 나무와 같이 썩게 된다. 이제 우리는 악당에게 해를 입으니, 천고에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다섯 의사가 해를 당한 후 11개월이 지나서 위충현이 권력을 잃는다. 소주의 백성들은 그들의 유체를 호구산 아래에 합장하였다. 장소는 바로 위충현의 사당이 있던 장소로 하였다. 묘비에는 "오인지묘"라고 적고  "의풍천고"라는 네 개의 큰 글자를 새겼다.

 

다섯 의사는 비록 희생당하였지만, 군중들이 분노로 항거하는 것을 보고는 위충현은 많이 놀랐다. 이후로 위충현의 체포조들은 북경성을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는 함부로 외지로 나가서 사람을 붙잡아오지 못했다. 동림당인들의 피는 헛되이 흘린 것은 아니었다. 황존소의 아들인 황종희는 나중에 역사적인 교훈을 집대성해서 <<명이대방록>>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었다.

 

천계7년(1627년) 8월, 천계제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주유검(숭정제)이 즉위하였다. 그러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숭정제는 최고권력을 자신이 장악하고자 한다. 조정신하들은 그가 엄당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탄핵상소를 계속 올린다. 숭정제는 위충현은 안휘 봉양으로 귀양보낸다. 위충현이 도중에 자살한 후 그의 시체를 육시하고, 효수하여 군중에 보인다. 객씨도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한다. 엄당의 다른 중요인물들은 하나하나 처벌받는다. 숭정원년(1628년) <<삼조요전>>은 불태워지고, 피해입은 동림당인들은 명예회복을 한다. 살아있던 유일경은 조정으로 되돌아 온다. 한호는 되돌아와 내각수보를 맡고, 한광의 제자인 원숭환이 병부상서가 된다. 숭정2년 3월에는 "흠정역안"을 공포하여 역신 위충현, 객씨 두 사람 이외에 위충현을 따르던 엄당 이백수십명을 6등급으로 나누어 참수, 충군, 도형, 혁직등의 벌을 내린다. 그러나, 엄당의 세력은 이로써 완전히 제거되지는 못하였고, 동림당과 그들의 투쟁은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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