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남의 명나라 점령이전 역사
968년, 정부령(丁部領)는 정조(丁朝)를 건립한다. 이것은 월남에 세워진 첫번째 왕조였다. 13년간 재위(968-980)하였다. 979년에 정조는 왕위계승문제로 궁중변란이 일어났고, 정조의 대장군인 여환(黎桓)이 정부령의 아들인 정경(丁敬)을 즉위하게 하고는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다.
980년, 여환이 정권을 찬탈하니 전여조(前黎朝)이다. 전여조는 30년간 존속했다(980-1009). 1006년 여환이 죽자, 그 아들 용정이 즉위하였고, 용정이 1009년에 죽자, 여조의 전전지휘(금위군 사령관)인 이공온(李公蘊)이 왕위를 빼앗아 이조(李朝)를 연다.
이조는 9대에 이어지며 모두 215년(1010-1225)간 존속한다. 이공온은 즉위하자마자, 1010년 왕조를 화려에서 대라성으로 천도하고, 승룡(현재의 하노이)으로 개명한다. 이일존(성종)에 이르러 국호를 대월(大越)로 바꾼다. 1225년, 이조의 대권을 장악했던 보국대위 진승(陳承)과 전전지휘사 진수도(陳守度)는 어린 여황제인 이소성으로 하여금 진승의 아들인 진거(陳炬)에게 양위하도록 한다. 이로써 이조는 멸망한다. 진조는 175년간 존속한다(1225-1400). 1400년, 진조는 외척인 호계무에 의하여 왕위를 찬탈당하고, 이후 호조(胡朝)가 건립된다 국호는 대우(大虞)로 하고, 겨우 7년간(1400-1407) 존속한다.
1406년 10월, 중국의 봉건왕조인 명나라는 진조를 회복한다는 명분하에 장보(張輔)에 별사를 딸려 월남에 보낸다. 1407년 승룡을 점령하고 호계무 부자를 생포한다. 이때, 명나라는 안남에 군현을 설치하고, 안남을 교지로 개명하며, 짧은 "명나라속국시기"가 이어진다. 명성조(영락제)는 안남(安南, 지금의 베트남)을 귀속시킨 후, 공신들에게 크게 상을 내렸다. 그 중 장보(張輔)는 영국공(英國公)에 봉했고, 목성(沐晟)은 검국공(黔國公)에 봉했다. 그러나, 이후 월남지역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명선종의 말에 의하면 "한 해도 전쟁이 없었던 때가 없었다" 월남은 이와 같은 완강한 반항을 거쳐 다시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2. 간정제(簡定帝)
장보는 영락6년 6월 북경으로 돌아가자. 진(陳)씨성을 가진 인물이 병사를 일으키고, 스스로 진조(陳朝)의 후손이라고 칭한다. 이 사람이 월남역사상 간정제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명나라때 사료에는 그를 진나라의 신하이며 성이 간(簡)이고 이름이 정(定)이라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
명성조는 먼저 목성에게 병사 수만명을 이끌고 진압하도록 보냈다. 그러나, 궐강에서 대패하고, 명나라군대를 딸라갔던 병부상서마저도 사망하고 만다.
명성조는 어쩔 수 없이 장보에게 총병관(總兵官)의 직위를 내리고, 20만의 병사를 이끌고 월남을 치게 한다. 이 때 간정제는 이미 태상황으로 오르고, 조카인 진계확(陳季擴)을 대월황제(大越皇帝)로 앉혔다. 영락7년 가을 장보의 대군은 월남으로 밀려오고, 연전연승한다. 간정제를 생포한 후 북경으로 보내어 처단한다.
영락8년 봄, 장보는 동조주에서 대월군을 대패시키고, 약2천명의 포로를 생매장한다. 이후 장보는 북경으로 돌아가고, 목성이 월남에 남아 지키게 된다. 년말이 되어, 진계확은 글을 써서 항복을 청한다. 그는 우포정사(右布政使)에 봉해진다. 그러나, 진계확이 투항한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완병지계(緩兵之計)였으며, 부임하지는 않고, 계속 명나라군대와 충돌한다.
영락9년 9월, 명성조는 장보에게 명하여 제3차 출정을 시작하고, 대월군에 연전연승한다. 영락11년 12월이 되어서는 진계확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라오스로 도망간다. 장보가 라오스의 세개의 관문을 부수고 진격하자, 놀란 라오스 사람들은 진계확과 그의 처자를 체포하여 보내고, 그들은 북경으로 압송된다.
3. 여리
영락13년봄, 장보는 북경으로 돌아온다. 여름이 되자, 명성조는 월남에 대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고 다시 장보를 월남으로 보낸다. 이 때는 장보가 네번째로 월남에 오는 것이었다. 장보는 세번이나 월남왕을 생포한 것으로 명성을 떨쳐 동남아시아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당시 월남에 파견나와 있던 황복은 민심을 얻은 좋은 관리였다. 만일, 명나라가 이 때의 교훈을 되살려 월남에서 관리들을 징치하고 좋은 정치를 펼쳤으면 월남사람들이 이후 계속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은 현지인들을 심하게 핍박했다. 다만, 월남인들이 장보를 겁내다보니 한동안 아무 일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장보가 북경으로 돌아가자 즉시 여리(黎利)가 반란을 일으킨다.
장보는 영락14년에 북경으로 불려간다. 이유는 감군이던 마기(馬騏)가 명성조에게 그를 고발하였기때문이라고 한다. 의심이 든 명성조는 총병관으로 아무런 군사적인 재능이 없는 풍성후(豊城侯) 이빈(李彬)을 임명한다.
여리는 청화부(淸華府) 사람이며, 평민출신이다. 일찌기 진계확의 수하에서 금오장군(金吾將軍)을 지낸 바 있으며 나중에 명군에 투항했으며, 순검(巡檢)의 직을 맡았다. 그의 딸은 9살에 불과했는데, 마기에 의하여 끌려가서 궁중의 궁녀가 되었고, 그는 이로 인하여 명나라조정에 원한을 품게 된다. 그래서 장보가 떠나자마자 바로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평정왕(平定王)에 오른다. 그는 사방에서 출몰하며, 유격전을 펼쳤고, 이빈은 그와 피곤하게 싸우다가 사망하고, 결국 난을 다스리지 못한다. 영락20년 이빈이 병으로 죽자 영창백(榮昌伯) 진지(陳智)가 총병관의 직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그도 여리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그를 라오스로 쫓아보내면 얼마있다 또 돌아오고, 세력은 갈수록 커져갔다.
영락20년, 인종이 즉위한다. 황복이 오랫동안 외지에 일한 것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병부상서 징흡으로 하여금 포정사사의 업무를 대신하도록 한다. 황복이 떠날 때, 월남의 사람들이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가 떠난 후 월남의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선덕원년, 선종은 진지의 직위를 박탈하고, 성산후(成山侯) 왕통(王通)을 정이장군(征夷將軍)으로 임명하고, 병부상서 진흡(陳洽)을 참찬군무로 임명하여 여리를 토벌하러 같다. 왕통은 부친이 정난지역(영락제가 건문제를 몰아낸 사건)때 사망한 것으로 인하여 제후에 봉해진 자였으나, 작전경험이 전혀 없었고, 진지보다도 훨씬 능력이 못미쳤다. 겨울인 10월, 명나라군은 석실현에서 병사를 모았다. 진흡은 여러차례 왕통에게 지세가 험악하니 쉽게 사하를 건너지 말라고 권하였으나, 왕통은 이를 듣지 않고 강을 건너도록 명령한다. 이 때 하늘에서는 큰 비를 내리고 있었고, 길에는 진흙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복병이 사방에서 나타나니, 명나라군사는 대패하였고, 2,3만명이 전사했다. 진흡은 부끄러움에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을 몇명 죽이고 자결하였다. 왕통은 이 싸움에 깜짝 놀랐으나, 스스로 나서서 여리와 강화협상을 하고, 여리를 왕으로 봉하겠다고 응락하고, 청화의 남쪽 땅을 떼어서 여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
명선종은 패배소식을 듣고는 다시 안원후(安遠侯) 유승(柳昇)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광서에서 떠나 토벌하게 한다. 목성은 운남에서 병사를 이끌고 도와주게 한다. 교지아문(交趾衙門, 월남을 담당하던 관청)에서 황복을 다시 보내서 월남의 민심을 수습하자고 건의하자, 명선종은 즉시 응락하고, 황복에게 군대와 함께 떠나도록 한다. 유승은 용기와 지략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처음 전투에서 승리하자 교만해졌다.
선덕2년 9월, 군대가 도마파에 이르렀을 때, 유승과 백여명의 기병은 먼저 다리를 건넜다. 건너편이 도착했을 때, 다리가 무너졌고, 뒷쪽의 대군은 일시에 건너올 수가 없었다. 건너편에서는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유승은 표적이 되어 사망한다. 명나라군사는 부장의 인솔하에 창강에 이른다. 여기서 월남군과 만났으나, 명나라군대는 이미 장수를 잃어 투지가 없었고, 대패하였으며, 병사 7만여명이 사망한다. 황복도 포로로 잡혀버린다. 월남군은 황복을 보자 모두 말에서 내려 절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의 부모와 같은 분이다. 공께서 북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이 지경까지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복은 그들로부터 계속 우대를 받았다. 이후 월남군은 황복에게 예물을 주고, 가마에 태워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황복은 북경으로 돌아온 후, 예물로 받은 것을 국고에 넣었고, 여전히 공부상서를 지냈으며 78세까지 살았다.
목성은 이때 여리의 부대와 이화관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유승의 군대가 패배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수습하여 돌아갔다. 동도(東都, 하노이)에 갇혀 있던 왕통은 이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라서 여리에게 강화협상을 요청하였다. 두 사람은 11월에 성밖에서 단을 만들고 맹서를 하였으며 12월에 명나라군대가 철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철수시키기는 하였으나 2만명만 철수시켰다. 왕통은 다시 여리로 하여금 명나라조정에 글을 올리게 하였으며, 교지의 옛 진조의 후예인 진고를 찾았다고 하였다. 마침 선종은 11월에 이미 교지(월남)을 포기함으로써 매년 병사를 일으키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여리의 글이 도착하자 선종은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장보는 교지를 포기하는데 적극 반대하였고, 상서인 건의와 하원길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대학사인 양사기와 양영은 적극 찬성하였다. 그래서 선종은 비록 옛왕의 후예라는 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예부시랑 이기등의 사람을 교지로 보내어 여리를 위무하고 그의 반란죄를 사면하였으며, 진고로 하여금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도록 허용하였다. 동시에 교지삼사를 폐지하고, 관리와 군민 합계86000명을 복귀시켰다. 그러나, 여리에게 구금되어 있던 자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지도 못한다.
왕통, 마기등이 북경으로 돌아오자, 만조백관의 분노를 샀다. 왕통에 대하여 군율을 어기고, 병사를 잃고, 땅을 빼앗긴 죄를 물었고, 마기에게는 백성들을 학대하여 변란을 일으킨 죄를 물어 모두 사형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감옥에 갇히기만 하였고,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선덕3년, 여리는 진고가 이미 죽어, 진씨의 세계는 단절되었다고 하였다. 명선종은 그것이 허위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더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여리는 스스로 "순천승운예문영무대왕, 남산동주"라고 하고, 국호를 "대월(大越)"이라고 하였으며 연호를 순천(順天)이라고 하였고, 동도를 동경으로, 서도를 서경으로 삼았고, 전국을 5도(이후 13도)로 나누었다.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중국의 경의시부로 관리를 뽑았으며, 제도는 명나라의 것을 모방했다.
선덕6년, 명나라조정은 정식으로 여리를 "권서안남국가"에 임명한다.
선덕8년, 여리가 병으로 죽고, 아들인 여원룡(黎元龍, 명나라조정에는 黎麟이라고 칭함)이 즉위한다. 여린은 명나라 조정에 대하여 공손하였으며, 영종 정통원년에 명나라조정으로부터 "안남국왕(安南國王)"에 봉해진다. 여리는 월남역사상 나중의 후여조(後黎朝, 1428-1788, 17세에 이어지며 360년간 통치함)의 태조고황제이고, 여린은 태종문황제가 된다.
4. 월남의 이후 역사
이후 월남은 1527년, 후여조의 대신인 막등용(莫登庸)이 왕위를 찬탈하고, 승룡을 수도로 정하고 막조(莫朝)를 연다. 그리고는 청화이북지역을 통치하는데 이를 월남사에서는 북조(北朝)라 한다. 대장군인 완금(阮금)은 여소종의 아들인 여녕을 황제로 모시어 여장종이라고 하며, 청화이남지역을 통치한다. 월남사에서 이를 남조(南朝)라 한다. 1527-1592년까지는 월남이 남북조시대에 들어간다. 1592년 여조가 복벽하나, 실권은 정송(鄭松)과 완구(阮口)의 두 대신의 손에 장악된다. 이로 인하여 1627년부터 17세기 중엽까지는 월남에 북정과 남완의 혼전국면이 이어진다.
18세기, 월남사회의 위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농민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1771년, 완악, 완혜, 완려 삼형제가 이끄는 월남역사상 최대규모의 서산농민반란이 일어난다. 20여년의 투쟁을 거쳐, 1776년 반란군은 여조를 무너뜨린다. 1789년 청나라군대의 간섭을 물리치고, 월남을 통일한다. 1787년, 완악은 귀인에서 황제에 오르고, 광남에서 순화에 이르는 중부의 지역을 통치한다. 다음 해, 완혜는 순화에서 황제에 오른다. 연호를 광중으로 하고 서산왕조를 건립하여, 월남북부를 통치한다. 완려는 동정왕으로 칭하며 남부를 통치한다. 원래의 광남왕 완복순의 조카인 완복영은 프랑스 식민통치자의 도움을 받아 1802년 서산조를 무너뜨리고, 완조를 건립하며 부춘(순화)에 수도를 둔다. 국호를 "월남(越南)"으로 고친다. 완조는 월남역사상 최후의 봉건왕조이다. 완조의 전기에는 사회경제가 비교적 많이 발달하였으나, 후기에 이르러 위기가 가중되고, 농민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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