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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중관촌(中關村)의 유래

by 중은우시 2006. 10. 23.

북경의 중관촌은 중국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울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러나, 중관촌의 명칭유래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중관촌에 오래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마도 그 유래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랄 것이다. 많은 중관촌을 소개하는 자료에서도, 옛날에 왜 중관촌이라고 불렀는지, 어떠했는지를 언급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중관촌의 옛모습은 어떠했는가?

 

중관촌의 최초의 위치는 중관촌가도판사처 관할구역중의 서북부이다. 동남쪽으로는 보복사(保福寺), 서남쪽으로 해전진(海澱鎭), 동북쪽으로 삼재당, 서북쪽으로 성부(成府)를 끼고 있는 위치이다. 처음에는 이름없는 촌마을에 불과했다. 역사적으로 중관촌의 소재지인 해전진은 북경서북쪽의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해전"이라는 이름은 처음 문자로 나타난 것은 원나라때 왕혼(王渾)의 저서인 <<중당기사>>에서였다. 원나라 이전에, 해전진의 부근은 자연늪지대였으므로 "해전"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아직 주민이 사는 마을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청나라 중엽에 이르러 "삼산오원(황제의 별장)"을 만들게 되면서 해전진은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중관촌"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중관(中官)"이라는 주민거주지와 관계가 있다. 이 주민거주지의 명칭은 역사적으로 명확하지는 않다. 서로 다른 시기에 중관(中官), 종관(鍾關), 중관(中關), 중관촌(中關村), 중관아(中官兒), 중관촌(中官村), 중관둔(中關屯)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 환관들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관촌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견이 있고, 하나로 통일되지는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청나라때 중관(中官, 환관을 말한다)이 여기에 밭을 샀기 때문에, 중관촌(中官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른 설은 이 지역의 원래 이름이 중관분(中官墳)인데, 왜냐하면 여기에 적지 않은 환관들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관", 중관촌, 중관분의 명칭의 기원은 명나라 청나라때의 환관의 사당, 묘지에서 유래했다. 중관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때이다. 명나라때는 환관의 세력이 아주 강성했던 때이고, 환관은 일반적으로 은퇴하고 살 땅들을 마련하게 된다. 많은 환관들은 해전지역에 사당을 만들었는데, 지금 북경대학 물리학과건물 북쪽에 있는 건물에는 바로 환관이 제사지내던 "강병묘(剛秉廟)"가 있다. 그리고 "강병"이라고 불리웠던 환관의 상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환관을 '중관'이라고 불렀으므로, 환관(태감)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관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견해로는, 청나라때, 중관촌은 환관의 묘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중관촌의원의 마당에는 아직까지도 환관의 비석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청나라 광서원년 4월 24일에 세운 묘비이다. 묘비의 위쪽에는 "만고유방"이라는 네 글자가 세워져 있고, 뒤에는 음각으로 "늑석각비"라고 되어 있으며, 비의 정면에는 "어선방흠가사품총관장진복지묘"라고 되어 있다. <<성부촌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건륭에서 도광연간에 지금의 성부촌의 홍호로의 동쪽에 있는 곳에 청나라 황실에서는 환관숙소를 만들었고, 원명원에서 일하게 하였다. 지위가 낮은 환관들이 죽은 후에 묻힐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환관들이 돈을 내어 현재의 중관촌에 토지를 구입했고, 일부 환관들은 죽은 후에 여기에 묻혔다. 그리고 묘를 지키는 사람을 고용하였고, 묘지기들은 여기에서 생활했으며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묘지가 바로 "중관분"이다.

 

중관촌이 "중관(中官)"에서 "중관(中關)"으로 바뀐 유래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 진다. 일설에서는 1913년 <<25000분의 1 경서지도>>에서 이미 "중관(中關)"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명칭에 대하여 사람들은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청나라 말기에 지도를 만들면서 "관(官)"이라는 글자가 환관을 나타내어 보기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관(關)으로 바꿨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서태후의 생일 때, 일찌기 이 곳에 성관(城關)을 세워서 축수에 썼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얻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해방전에 중관촌에는 70호정도의 사람이 살았고, 276명의 인구가 있던 작은 자연마을이었다. 농업을 중심으로 하였고 주위의 분묘가 토지의 30%이상을 점하였다. 작은 마을이므로 정확하게 부르는 명칭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중관분으로 어떤 사람은 중관둔으로 어떤 사람은 중관촌으로 불렀다. 당시 6,70세된 노인들은 종관아(鍾關兒)라고도 불렀다.

 

종관아에서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은 묘지기인 가난한 농민이었고, 행정상으로는 성부촌의 관할하에 있었다. <<성부촌지>>에 의하면 "종관"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청나라 말기에 종관아에 염화두를 판매하는 장씨성의 사람이 살았다. 사람들은 "종관아두아장"이라고 불렀다. 그가 볶은 황두는 경서에서 유명했고, 항상 공급이 딸릴 정도였다. 하루는 두아장이 예전처럼 좋은 황두를 볶고, 종이봉투에 황두를 담아서 등에 지고, 중관촌에서 성부를 거쳐 이화원으로 다니면서 팔았다. 그런데, 그의 황두를 파는 소리를 이화원안을 거닐던 서태후가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환관에게 명하여 사오게 하였다. 맛을 보내 아주 부드럽고, 향도 좋으며 입에 맞았다. 어선방에 명하여 똑같이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두아장이 만드는 것만 못하였다. 그래서 환관을 시켜 두아장을 불러서 어선방에서 이틀에 한번씩 황두를 볶게 하였고, 매월 은 두 냥을 내렸다.

 

실제로 중관촌이 정식으로 명명된 것은 해방후였다. 해방후에 여기에 중국과학원을 건립하게 되었는데, "중관(中官)"이라는 두 글자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북경사범대학의 교장이었던, 진원 선생의 제안하에 "중관촌(中關村)"으로 개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