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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북경의 건축세가 흥륭마가(興隆馬家)

by 중은우시 2006. 11. 10.

청나라때의 관목창(官木廠)은 8대창, 4소창 합쳐서 모두 12개의 관목창이 있었다. 그 중에 우두머리는 흥륭목창(興隆木廠)이었다. 모든 황가의 공사는, 공부(工部)에서 흥륭목창에 총도급을 주었고, 흥륭목창은 일을 나누어 나머지 7대 관목창에 하도급을 주었다. 나머지 8대관목창은 광풍(廣豊), 빈흥(賓興), 덕리(德利), 동천하(東天河), 서천하(西天河), 취원(聚源), 덕상(德祥)이었다. 정원과 같은 작은 일은 4소 관목창에서 맡겼는데, 그들은 각각 예화(藝和), 상화(祥和), 동승(東昇), 성상(盛祥)이었다.

 

명청시기의 관목창은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의 종합건설회사였다. 관목창안에는 와(瓦), 목(木), 토(土), 석(石), 찰(扎), 유칠(油漆), 채화(彩畵), 호(糊)의 팔대 장작(匠作)의 두목이 있으며, 매 작은 각각의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 원림첩석의 전문인원과 천문을 관찰하는 전문인원, 착공, 완공의 일자를 보는 음양선생등이 있었다.

 

각창의 주인은 동가(東家)라고 불렀다. 동가는 각작의 두목을 이끌고, 각 두목은 아래의 인원들과 기술자들을 이끌었다.

 

흥륭목창은 북경의 자금성, 이화원, 천단, 승덕피서산장의 네 곳을 지었고, 북해, 만춘원, 창춘원, 원명원 등등의 황가건물은 흥륭목창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흥륭목창을 이끈 집안은 바로 마씨(馬氏)집안이었다.

 

흥륭목창은 근 6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명나라 영락연간에 하묵심주의 장인인 마천록(馬天祿)은 흥륭목창을 설립하고, 건축팀원을 모아서 자금성을 짓는데 동원된다. 명나라에서 자금성을 짓는데 관여한 장인으로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모두 네 명이다. 괴상(蒯祥), 완안(阮安), 양구(梁九) 그리고 마천록이다. 이중 앞의 세 사람은 자금성을 지은데 참여한 공로로 완공후에 모두 관직을 받았다. 유일하게 마천록은 관직을 받지 않고 계속 흥륭목창을 운영했다.

 

마천록의 14대전인인 마욱초(馬旭初)에 따르면, "관리를 해서 버는 돈은 한 해로 끝나지만, 장사를 해서 버는 돈은 만만년을 간다"는 것이 그들 집안의 가훈이라고 한다. 마씨집안은 이렇게 흥륭목창을 600년간 14대에 이어서 계속 해왔던 것이다.

 

마씨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이런 것이 있다. 자금성에 있는 구룡벽(九龍壁)의 용 한 마리는 진짜 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씨집안의 어르신이 고궁의 구룡벽을 수리할 때, 자기집안의 유리제품공장에서 채색으로 그려진 유리기와를 만들었고, 번호까지 잘 매겨두고 다음날 검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날 밤에 한 장인이 부주의하여 유리기와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다. 만일, 다음 날 검수가 되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금사남목(金絲楠木)으로 만든 가짜 유리기와로 공사를 마쳤다. 다행히 들키지 않고 지나갔지만, 금사남목은 유리기와보다 수명이 짧아서 언젠가는 들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마가의 편이었는지, 청나라의 운명이 그다지 길지 못해서, 금사남목으로 만든 가짜 용은 끝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흥륭마가에 하나의 교훈으로 전해 내려오고 절대 사소한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고 한다.

 

마욱초에 의하면 그의 집안에는 황가로부터 받은 차용증서를 보관해오고 있다고 한다. 바로 광서11년 청나라 정부는 북해, 중해, 남해의 삼해를 수리했는데, 국고에 돈이 모자라서 우선 흥륭목창이 돈을 부담해서 공사를 마쳤다. 그 후에 황가에서 써준 차용증서에는 "흥륭목창상인 마덕춘에게. 광서11년, 12년 2년간 부담한 자금 은 삼만양천이백구십사냥육전일푼사리를 부담했음." 그러나, 이 황실의 차용증서는 청나라 황실이 망함과 동시에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1911년 청나라 황제가 퇴위하자. 마휘당(馬輝堂)은 흥륭목창을 문닫아버린다. 그리고는 서양위후통에 "항무목창(恒茂木廠)"을 새로 열었다. 마휘당의 장자인 마증기(馬增祺)가 경영하였고, 아래에 100여개의 분공창을 두었다. 마증기는 일찌기 파리대학, 켐브리지대학, 동경제국대학에 유학한 바 있었다. 마증기가 중수한 건물은 천단기년전, 국자감, 북해, 중산공원, 중남해, 동사패루, 서사패루, 금오옥동교변의 패루등이다. 마욱초는 마증기의 아들이다.

 

흥륭목창의 마씨집안은 당시 북경의 가장 부자 중의 하나였다. 마욱초의 소개에 의하면 당시 북경에서 돈있는 집안으로 여덟집안을 꼽았는데, 창한가(倉韓家), 소유가(梳劉家), 종양가(鐘楊家), 염업은행노가(鹽業銀行魯家), 오로후통사가(五老胡同査家), 서학년당유가(西鶴年堂劉家), 서부상맹가(瑞부祥孟家), 흥륭마가(興隆馬家)를 꼽았다고 한다. 동인당은 당시에 아직 팔대가문에 꼽힐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마씨집안은 1949년에 정부에 1400여채의 가옥을 정부에 기증한다. 마욱초에 의하면 당시 북경 위가후통의 모든 집, 서단 쪽에있는 마가두조(馬家頭條), 마가이조(馬家二條), 마가삼조(馬家三條), 마가사조(馬家四條)의 집들. 그리고 동안시장(東安市場)의 백개가 넘는 가게, 점포들. 그리고, 동제당약점, 북경반점, 북경전차공사, 천진전차공사, 수도공사, 계신양회공사, 개란매광등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