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북쪽 팔달령장성을 가는 곳에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이 있다.
명나라의 황제는 모두 16명인데, 여기에 묻혀있는 황제는 13명이다.
그럼 어느 황제 3명이 북경 십삼릉에 묻히지 않은 것일까?
첫째, 명태조 주원장
명태조 주원장의 묘는 남경의 명효릉(明孝陵)이다. 주원장은 남경을 수도로 정했고, 거기서 죽었으므로 남경에 묻혔다.
둘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
건문제는 삼촌인 영락제(永樂帝)에게 황위를 빼앗기는 인물이다. 그는 영락제가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서 남경으로 쳐들어갔을 때, 주윤문은 실종되고 만다. 끝까지 그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무덤도 없다.
셋째, 경태제(景泰帝)
경태제는 대종(代宗)이며 이름은 주기옥(朱祁鈺, 1428-1457)이다. 선종 주섬기의 둘째아들이며 현비 오씨의 소생이다. 영종(英宗) 주기진(朱祁鎭)과는 동부이모의 형제이다. 주기옥의 생모인 오씨는 원래 한왕부의 시녀로서 신분이 미천하였다.
영종은 오이라트를 토벌하러 떠났다가 토목보에서 소위 토목보의 변으로 불리우는 사태로 오이라트에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로 인하여 황실에 감국으로 있던 주기옥이 황위에 올라 황제에 오른다.
후에 우겸의 외교노력으로 영종은 포로의 신세에서 풀려나 1450년에 다시 귀국하게 된다. 귀국후 두 황제의 관계는 묘한 상태로 되고, 영종은 사실상 연금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후 곡절을 겪어 경태제가 세운 황태자는 요절하고, 그마저도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영종이 복벽에 성공을 하게 된다.
영종이 복위한 후 영종은 대종에 대하여 "불효, 부제, 불인, 불의"함을 들어 그를 황위에서 폐하고 왕으로 낮추게 된다. 이후 1457년 1월 19일 사망하는데, 영종은 생전에 만든 수릉을 철거하고, 경사금산에 경태릉(景泰陵)을 별도로 만들어 황제의 예가 아니라 왕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게 된다.
이로 인하여 황제였던 대종은 명십삼릉에 황제의 예로 묻히지 못한다.
참고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청나라의 배려하에 황제의 예로 명십삼릉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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