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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18

유화 <나의 전남편(我的前夫)>의 감추어진 비밀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2007년 유화 이 세상에 나왔고, 문혁때 청춘을 망쳐버린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 유화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알려진 바로는 이 유화의 원제목은 였는데, 나중에 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렇게 제목을 고치자, 전체 그림의 의미가 풍부해진다. 이를 보면 한 그림의 성공은 화면의 세세한 처리에만 완전히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가는 자신의 사상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술품의 사회적 반응은 마치 평론가의 감상과 소개를 벗어날 수 없는 것같다. 그러나, 평론가의 감상은 예술의 정(情)과 리(理)를 잘 알아야 할 뿐아니라, 반드시 화면이 전달하는 내용이 처한 역사적 환경도 이해해야 한다. 만일 평론가가 그 역살르 모르고 단지 "그림"만 보고서.. 2022. 9. 19.
홍위병(紅衛兵) 현상에 관한 반성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1 홍위병운동은 지난세기 문혁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일종의 현상이다. 세계의 범위에서 말하자면, 더더욱 아주 독특한 현상이다. 이 현상은 비록 잠시 나타났지만, 영향은 아주 크고 깊었다. 중공의 독재통치와 불가분이며, 후세에 남긴 사고의 공간은 아주 광활하다. 국내외의 학자들이 문혁을 연구하려면, 홍위병운동이라는 이 기본현상을 피해갈 수 없다. 사실상, 홍위병운동에 대한 연구는 서방지식계의 문혁에 대한 연구보다 뒤쳐졌고, 국내의 대기근에 대한 연구보다 뒤쳐졌으며, 중공의 정풍반우(整風反右)에 대한 연구보다 뒤쳐졌다. 이는 당연히 중국이 국내에서 홍위병에 대한 연구를 금기시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외에 한가지 현저한 제약조건은 당시 홍위병운동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물들이 지금도 .. 2022. 9. 2.
상하이 문혁식방역의 4가지 실책 글: 미소(米笑) "왜 문화대혁명을 했는가?" 당시, 나는 의문을 가지고 한 홍위병에게 물어보았다. "만일 문화대혁명을 하지 않아서 중국이 '변수(變修, 수정주의로 바뀜)'되면 어떡할 거냐?" 그는 근심이 가득찬 얼굴로 대답했었다. '변수'는 문혁이 가정한 전제이다. 반수방수(反修防修)의 구호하에 공장의 가동을 멈추고, 생산을 중단하고, 학교를 문닫고 전인민이 운동에 나선다고 해도, 그 모든 미친 짓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만일 청령(淸零, 제로코로나)하지 않아서 사람이 죽으면 어떡할 거냐?" 이것이 상하이방역이 가정한 전제이다. 생명을 보호한다는 구호하에, 공장의 가동도 멈추고, 생산도 중단하고, 학교도 문을 닫았다. 전체인민(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이 운동방역에 나서는 것이고, 모든 미친 짓은 합리화된.. 2022. 4. 29.
웨이징셩(魏京生): 홍얼다이인 그는 어떻게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글: 소우(蕭雨) 웨이징셩, 1950년생. 부모는 모두 중국의 고위간부이다. 어려서부터 한편으로 베이징의 가장 좋은 학교에서 중국공산당을 사랑하자는 홍색교육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공 고위층의 권력투쟁을 보고 들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16세의 웨이징셩도 홍위병에 참가한다. 그는 말했다. 그때는 열정이 넘쳤다. 공산당을 보위하고, 모주석을 보위하고, 정말 죽음도 겁나지 않았다. 남북으로 돌아다니면서 이 고관자제는 처음으로 하층민중들의 질고(疾苦)를 목격하게 된다. 시골지역의 가난은 그를 깜작 놀라게 만들었다. 당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부모는 그를 안후이의 고향으로 보내어 농사를 짓게 했다. 일찌기 어미지향(魚米之鄕)이던 그곳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는 1950-60년대 중.. 2022. 4. 12.
중남해의 "강탈"계획이 반발에 부닥치다. 글: 악산(岳山) 근 1년간 지속된 관리감독정책의 강화이후, 중남해는 다시 요란하게 '공동부유'라는 구호를 꺼내들었다. 사회의 부를 '제3차분배'하겠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강탈'이라고 의심한다. 당국이 이어서 내놓은 새로운 관리감독정책으로 특히 교육사업 및 오락계의 여러 분야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더더구나 '심각한 변혁'이라는 여론몰이를 시작하여, 일시에 '제2차문혁'이 오는 게 아니냐고 국제사회를 감짝 놀라게 하고, 국내의 인심이 흉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당국은 이런 행동이 체제내외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같다. 연일 당국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국내뿐아니라 국외에서도 진화작업을 하는데 바쁘다. 황당해보이는 이번 해프닝이 어디로 향할지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 2021. 9. 9.
노사(老舍): "인민예술가"인 그는 왜 '문혁'때 비투를 받고 자살해야 했을까? 글: 정문(鄭文) 노사는 1949년이후 중국에서 최초로 '인민예술가'의 영예칭호를 받은 사람이고, 공인된 신시대의 '창작표병(創作標兵)'이었다. 그러나 그는 왜 돌연 자살해야 했을까? 그는 모택동 및 중국공산당과 무슨 관계였을까?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노사의 본명은 서경춘(舒慶春)이고, 부친은 만주족으로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할 때 순국했다. 그리하여 일가족은 모친이 바느질과 빨래를 하면서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노사는 북경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소학교 교장, 교육국 관리를 지낸다. 그후 영국 런던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 , 등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점차 명성을 얻게 된다. 1936년에는 그의 대표작 를 발표한다. 항전시기에 노사는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 상무이사 겸 총무.. 2021.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