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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105

진승오광의 난때 진나라의 정예부대는 왜 출동하지 않았을까? 글: 역사유희유비(歷史有喜有悲) ​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제국을 창건했고, 중국의 역사발전에 중대하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진나라의 유명한 4대군단은 제국의 역사상 무시할 수 없는 작용을 발휘했다. 그러나, 진승오광의 난때, 백만의 진나라 정예병사들은 왜 출동하지 않았던 것일까? ​ 최정예부대는 국외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 기원전209년 가을, 대택향(大澤鄕)에서 진승, 오광이 이끄는 진나라말기 농민의 난이 발발한다. ​ 그러나, 대진제국의 수도방어전에서 반란군에 저항한 부대는 죄수와 소수의 수도어림군으로 구성된 잡패군(襍牌軍)인 여산군단(驪山軍團)이었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킬 때의 백만정예병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 원래,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 2024. 2. 29.
역사소설로 본 역대 창술 명장의 랭킹은...? 글: 이치아(李治亞) ​ 만일 역사상의 인물과 소설에 나오는 명장에 대하여 랭킹을 매긴다면 소설에 나오는 대단한 명장들에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예를 들어, 이존효(李存孝), 항우(項羽), 양육랑(楊六郞), 악비(岳飛), 나송(羅松), 조운(趙雲)과 같은 경우에 누가 앞서고 누가 뒤에 놓일까? ​ 1위: 십삼태보(十三太保) 용남공(勇南公) 이존효(李存孝) ​ 이존효는 당(唐)나라의 최고 사나이이다. 두 팔은 네 마리의 코끼리가 당해낼 수 없는 힘이 있었고, 손에 든 우왕삭(禹王槊)은 용맹무적이었다. 황소(黃巢)를 평정하는 전투에서, 이존효는 용맹하게 선봉에 서서 적장을 하나하나 참살했다. 대제(大齊)의 맹장 맹절해(孟絶海)는 전쟁터에서 수백전을 벌이면서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이존효에게 생포되고, 돌아올.. 2024. 2. 18.
춘추양대기보(春秋兩大奇寶)중 하나인 수후지주(隨侯之珠)에 관한 문헌기록들...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춘추전국시대의 수(隨)나라에는 진귀한 보물이 하나 있었는데, "수후지주(隨侯之珠)"라 불렸다. 이것은 "화씨지벽(和氏之璧)과 더불어 춘추양대기보라 불렸다. 이 양대기보는 춘추전국시기에 여러번 언급된다. 예를 들어, '변화보박(卞和報璞)", "완벽귀조(完璧歸趙)"등의 고사이다. 그러나, 최초의 봉건왕조인 진나라가 멸망한 후, "수후지주"와 "화씨지벽"은 모두 사라진다. 이건 무슨 이유때문일까? 역사상 "수후지주"에 관한 문헌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에는 이런 말이 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수후지주를 가지고 천길 절벽에 있는 참새를 쏘는데 쓴다면 세상사람들은 반드시 비웃을 것이다. 왜 그런가? 중한 것을 써서 경한 것을 얻가 때문이다." 그 뜻은 중대한 것을 버려서 경미한.. 2022. 12. 29.
유방(劉邦)은, 주원장(朱元璋), 이연(李淵)과 비교하여, 가장 힘들게 천하를 얻었다. 글: 역사경전비(歷史經典沸) 유방은 대한(大漢)의 개국황제로, 그의 주요 적수는 대진(大秦)과 항우(項羽)였다. 이연은 대당(大唐)의 개국황제로, 그의 주요 적수는 대수(大隋)와 왕세충(王世充)이었다. 주원장은 대명(大明)의 개국황제로, 그의 주요 적수는 원조(元朝)와 진우량(陳友諒)이었다. 유방은 평민이고, 주원장도 평민이면서 거지까지 되었었다. 이연흔 황친국척이다. 그들의 출신으로 보면, 이연이 강산을 얻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연은 신분이 귀족이니, 평생 다른 사람들이 뛰어넘기 어려운 계층의 이점이 있었다. 즉, 그의 출발점이 아주 좋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욱 쉽게 최초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왕왕 한 사람에 있어서 일생에서 최초의 기반을.. 2022. 11. 21.
중국의 비극, 항우의 실패를 비웃으면서 시작되었다. 글: 주건군(朱建軍) 생당작인걸(生當作人傑) 사역위귀웅(死亦爲鬼雄) 지금사항우(至今思項羽) 불긍과강동(不肯過江東) 항우와 유방의 군사대결은 항우의 패배로 끝이 난다. 표면적으로 보면, 누가 최고통치자가 되느냐는 백성과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 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일 항우가 서초패왕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더라면, 중국의 미래는 아마도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항우는 복고(復古)를 더욱 원했다. 그래서 분봉제도(分封制度)를 채택한다; 유방은 비록 일부 자제들에게 분봉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진시황의 제도를 채택한다. 이것은 이번 글의 주제가 아니다. 내가 더욱 말하고 싶은 것은 항우의 실패라는 이 사건이 중국인의 심리에 미친 영향이다. 이 영향은 중국인에게 “성왕패구(成王敗寇, .. 2022. 6. 3.
항우(項羽)의 패망후 그 휘하의 4대맹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서초패왕 항우는 힘이 남달라서, 상대가 두려움을 느끼던 맹장이다. 동시에 항우의 휘하에는 4명의 맹장이 있었다. 그들은 항우를 따라 동정서토, 남정북전하였다. 거록지전에서는 진군 40만을 격파하기도 했고, 팽성지전에서는 유방의 56만대군을 물리쳐서 위명을 천하에 떨친다. 그러나, 항우는 결국 패망했다. 그렇다면 그의 휘하에 있던 4대맹장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까? 가장 먼저 얘기해아할 맹장은 용차(龍且)이다. 용차에 관한 사료는 많지 않다. 그는 분명 일찌감치 항량, 항우를 따랐을 것이고, 계속하여 항씨집안이 심복이었다. 용차는 항량의 휘하에서 사마(司馬)를 맡았고, 동아전투에 참가하여 진군을 대파한다. 항우의 용인술에는 특징이 있다. "그가 즐겨 기용하는 사람은 항씨일족이거.. 2021. 6. 6.
자영(子嬰): 조고를 가볍게 제압하고, 항우에게 목숨을 잃다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진나라는 진이세(秦二世)로 멸망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진삼세(秦三世)를 언급하기도 한다. 진삼세라고 불리는 사람은 바로 자영이다. 그러나 그는 조고를 죽이고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일 이외에 다른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를 진삼세로 언급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그가 즉위하기 전에 이미 진(秦)이 스스로의 지위를 낮추어 황제의 칭호를 취소하고, 진왕(秦王)으로 자칭하였으며, 통일전의 각 제후국과 같은 지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각국으로부터의 적대감을 약화시키고, 당시 제후들이 참여한 의군의 공격을 중단시키고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래서, 황위를 가지고 따진다면 진나라는 확실히 진이세로 끝난 것이다. 진한교체기 혹은 초한전쟁의 전날, 이 자영은 실제 아주.. 2021. 1. 25.
중국역사의 비극: 깡패가 영웅을 이기다 글: 두우관주(斗牛關注) 나는 진한(秦漢)의 역사를 마음 속으로 자세히 생각해 보아왔다. 관련서적도 많이 읽으면서, 느낌 점이 많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중화민족 역사의 길에서의 중요한 전환점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범아강한자수원필주(犯我强漢者雖遠必誅, 강한 우리 한나라를 침범하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주살해 버리겠다)"이런 호연지기를 펼치는 말에 심취하고있을 때, 왕왕 소위 '강한(强漢)'의 배후에 천년간 이어지는 민족의 재난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항우의 죽음은 중국인들에게 "성왕패구(成王敗寇, 이기면 왕이고, 지면 도적이다)"를 기억시켰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존엄이라고는 없는 생활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유방의 성공은 후세에 가장.. 2020. 11. 21.
항우가 자결한 후 그의 부인과 2명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 풍상담사사(風尙談史事) 기원전202년, "귀신을 만나면 귀신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는 서초패왕 항우는 인생의 마지막 열차를 탔다. 그의 첩인 우희(虞姬)가 자결한 후, 그도 이어서 오강(烏江)에서 자결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는 "패왕별희(覇王別姬)"의 장면이 펼쳐졌다. 그때 항우의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항우는 후손을 두었을까? 우희는 항우의 첩일 뿐이고, 그에게는 원래 정실부인이 있다. 성은 원(袁)이다. 이건 헛소리가 아니다. 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천하의 항씨는 모두 일가(一家)이다"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즉 천하의 모든 항씨성은 모두 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이는 2200여년의 일이다. 항우의 할아버지인 항연(項燕)은 세 아들을 둔다.. 2020. 10. 8.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왜 함양을 버리고 팽성을 선택했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서주(徐州)의 옛 명칭은 팽성(彭城)이다. 요(堯)임금이 팽조(彭祖)를 대팽씨국(大彭氏國)에 봉했는데, 팽성은 바로 대팽씨국의 도성이었다. 나중에 상(商)의 주왕(紂王)에 멸망했다. 춘추시기에 팽성읍은 송(宋)나라에 속했다. 팽성은 송나라의 중요성읍이다. 왕왕 제후들이 쟁탈하는 목표가 되었다. 기원전 207년 십이월, 항우는 여러 제후의 병력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을 격파하고 진왕조를 멸망시킨 후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오르고, 팽성을 도읍으로 한다. 그는 패주의 신분으로 전국을 18개왕국으로 나누어 제후, 부장(部將)과 항장(降將)을 왕으로 삼는다. 그런데, 왜 항우는 함양을 버리고 팽성을 선택했을까? 항우가 함양으로 들어가 진나라황궁을 불태워버릴 때, 어떤 참모는 그에.. 2020.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