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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제43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 북경의 영불연합군(상)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1860년의 "경신지변"은 근대중국이 급전직하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또한 청나라 통치집단이 진정으로 깨닫고, 자구자강을 도모한 시작점이다. 이 해에 영불연합군은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고, 안정문(安定門)을 점령했다. 청나라조정은 어쩔 수 없이 영불연합군과 을 체결하게 된다. 만일 제2차아편전쟁이 끝났을 때 을 체결한다. 그것은 단지 아편전쟁의 재판이었다. 나중에 다시 곡절이 생겨 제2차아편전쟁은 새로운 업그레이드버전, 확대버전으로 상승하게 되고, 전쟁은 쌍방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역사의 조류는 열려진 갑문처럼 더 이상 청나라통치자의 의지대로 흐르지 않았다. 중국은 영불연합군의 무력공세에 밀려 자본주의세계의 식민체계로 한걸음 더 빠져들게 된다. 제2차아편전쟁은 중국.. 2023. 6. 25.
원명원(圓明園): 중국이 감추는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 글: 사로(思蘆) 원명원유적지는 중국의 애국주의교육기지이다. 중국이 열강으로부터 침략받은 굴육사를 증명하는. 다만,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단지 절반만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샤오펀홍들이 걸핏하면 원명원을 가지고 서방에 대한 원한을 표시하는데,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도 해야할 필요가 있다. 원명원을 불태운 사건은 소위 제2차아편전쟁때 일어났다. 1. 전쟁의 원인과 과정 제2차아편전쟁이라는 명칭은 오인시킬 수 있다. 제2차아편전쟁은 아편과 완전히 무관하다. 오히려 남경조약에 규정한 입성, 조약수정등 요구를 청나라정부가 온갖 방법으로 제지하고, 또한 홍콩에 등록된 애로우호(亞羅號)선박이 청나라수군에 수색을 당하고, 프랑스 선교사가 광서에서 지방관리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 2023. 5. 9.
사무황제(四無皇帝) 함풍제(咸豊帝) 글: 천마행문(天馬行文) 함풍제의 본명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혁저(奕詝)로 청나라의 제9대 황제이다. 그는 20살에 등극했으며, 11년간 재위하다가 31살에 병사한다. 그는 중국역사상 마지막으로 실제 통치권을 가졌던 황제이고, 청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비밀입저(秘密立儲)로 황위를 승계한 황제이기도 하다. 많은 사학자들은 함풍제를 "사무"황제라고 부른다. 무원견(無遠見), 무담식(無膽識), 무재능(無才能), 무작위(無作爲) 1. 무원견 함풍제가 등극했을 때, 대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군대는 해이해져 있었으며, 정치는 부패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농민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서방열강은 더더욱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함풍제가 재위한 11년간, 청왕조는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1851년부터 .. 2022. 8. 23.
1861년: 함풍제(咸豊帝)와 공친왕(恭親王) 글: 언구림(言九林) 1861년, 러시아는 농노제를 폐지했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청제국의 운명도 마찬가지로 미묘한 전환점에 놓여 있었다. 이 해에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청나라조정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성립되었고, 다른 하나는 함풍제가 열하(熱河)에서 사망한다. 1. 함풍제의 존엄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이 해의 1월에 성립된다. 나중에 '총리아문'이라고 약칭된다. 이전에 외국관련업무를 처리하던 중앙기관은 "무이국(撫夷局)"이었는데, 이는 임시기구였다. "무이"에서 "총리각국사무"로 바뀐 배후에는 청나라조정의 외교에 대한 심리상태가 미묘하게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함풍제 혁저(奕詝)에 있어서, 도광제(道光帝) 시절 '영이(英夷, 영국오랑캐)'에 패배한 것.. 2022. 8. 9.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으로 쳐들어올 때, 서태후는 왜 서안으로 도망쳤을까? 글: 장금(張嶔) "중국인들은 수도를 점령당하는 치욕과 함께 20세기를 맞이했다"고 말하는 '경자국난(庚子國難)'때 서태후가 서안(西安)으로 도망친 것에 대하여 많은 역사애호가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서안으로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서태후의 이번 소위 "서수(西狩)"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첫째는 서북대지는 사상유례없는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태후가 "서수"하는 과정에서 지나간 산서(山西)는 '경자국난'전에 이미 여러 해동안 가뭄으로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밭이 메말랐고' '보리싹이 시들었다' 산서의 전체 35개 주현(州縣)은 재해를 당해 있었다. 그리고 서태후가 '도망쳐 숨은' 서안은 어떠했을까? 섬서는 재해를 당한 주현이 더욱 많아서 60여곳에 .. 2020. 12. 15.
태평천국을 진압후 조정에서 후작, 백작을 받은 사람은? 글: 비비료오락(飛飛聊娛樂) 1864년 증국전(曾國荃)이 상군(湘軍)을 지휘하여 천경(天京, 지금의 남경시)을 함락시키면서 중국의 절반을 석권했던 태평천국운동은 끝이 난다. 청나라조저에 있어서 이어서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공신들에게 봉상(封賞)하는 것이다. 증국번(曾國藩) 의문.. 2020. 3. 1.
왜 청나라의 황후들은 곤녕궁(坤寧宮)에 거처하지 않았을까? 글: 역사순간(歷史瞬間) 항간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청나라때 황후가 곤녕궁에 거처하지 않은 것은 망자(亡者)의 회기(晦氣), 즉 죽은 사람의 나쁜 기운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주황후(周皇后)는 이곳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기실 청나라가.. 2020. 2. 26.
함풍제의 신체를 망가뜨린 3가지 취미 글: 노하(老何) 애신각라 혁저(奕詝)는 청나라의 9번째 황제로 역사에서는 '함풍제(咸豊帝)'라 칭한다. 1851년, 함풍제가 즉위하니 나이 21살이었다. 그는 11년간 재위했으며, 31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함풍제가 죽은 후, 남겨진 젊은 예허나라씨(서태후)는 나이어린 장남 재순(載淳)을 보좌하.. 2019. 6. 19.
청나라때 황마괘(黃馬褂)는 누가 입었는가? 글: 고건중국(古建中國) 황마괘는 어떤 사람이 입었는가? 조정에서 누군가에게 상으로 하사하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먼저 우리는 "황마괘"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부터 알아보자. 우리는 먼저 청사전문가인 정천정(鄭天挺) 선생의 견해부터 보기로 하자. 정천정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황.. 2019. 2. 7.
영수공주(榮壽公主): 청나라의 마지막 공주 글: 지역사(知歷史) 청나라 후궁의 체제는 아주 특이했다. 특히 '공주(公主)'와 '거거(格格)'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구분되었다. <흠정대청회전>에 따르면, "무릇 공주는 둘로 나뉜다; 고륜공주(固倫公主)와 화석공주(和碩公主)이다. 황녀중 중궁(황후) 소생은 고륜공주에 .. 2019.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