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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미중신냉전

미중쟁패: 한흉(漢匈)쟁패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by 중은우시 2020. 10. 9.

글: 공손책(公孫策)

 

미국이 중국에 정식으로 무역전을 전개한 후, 중국의 태도는 양보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관찰가들은 대부분 현단계에서 장악하고 있는 자원과 가용한 무기/수단을 가지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역사의 경험을 가지고 장기간으로 종심을 늘이는 방법을 시험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양강쟁패의 가능한 결과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한흉쟁패100년

 

여기에서 비교대상으로 삼을 시기는 기원전200년부터 기원전100년까지의 100년간이다. 배경은 흉노칸국과 진,한제국의 쟁패이다.

 

그 이전에 중국은 전국시대였고, 북방초원민족은 '호(胡)'로 통칭되었다. 진(秦), 조(趙), 연(燕)은 모두 장성을 건설하여 호인을 막았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몽염(蒙恬)을 보내 북벌하여 하남(河南, 河套地區)의 땅을 탈취한다. 그리고 원래 진, 조, 연의 장성을 연결시킨다. 같은 시기, 흉노에 첫번째 선우(單于)인 두만선우(斗曼單于)가 출현한다. 그러나 당시 흉노는 초원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 아니었다. 동쪽의 동호(東胡)가 가장 강했고, 서쪽의 월지(月氏)도 약하지 않았따. 두만선우는 몽염을 이기지 못하고 북으로 물러난다. 몽염이 죽은 후(진이세는 형인 부소와 대장 몽염을 자살로 몰았다), 흉노는 비로소 하남으로 되돌아 왔다.

 

두만선우는 새로 얻은 여자를 좋아해서, 큰아들인 모돈(冒頓)을 죽이려 한다. 그 결과 모돈이 반란을 일으켜, 부친과 계모를 죽어벼린다. 즉위후에 동호에 대하여는 인욕부중한다. 동호가 안심하고 그에 대하여 경계하지 않는 틈을 타서 급습하여 동호를 소멸시킨다. 그 후에 다시 서쪽으로 월지를 치고, 남으로 누번(樓煩), 백양(白羊)등 초원민족을 친다. 모돈선우는 "공현삼십만(控弦三十萬)"에 이르러 흉노왕국이 굴기한다. 그리고 좌우현왕(左右賢王), 좌우곡려왕(左右谷蠡王), 좌우대장(左右大將), 좌우대도위(左右大都尉)등의 칭호를 둔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크고 작은 제후국들과 같았다. 큰 곳은 기병 1만을 가지고, 작은 곳은 기병 1천을 가졌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수차례 모인다.

 

당시 중국은 초한(楚漢)이 전쟁중이었다. 북방을 돌볼 여가가 없었다. 흉노는 점점 남진했고,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격패시키고, 유방이 봉한 한왕신(韓王信)은 모돈에게 궤멸당한 후 투항한다. 모돈은 다시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진격했다. 유방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가서 맞이한다. 모돈은 거짓으로 패한 척하고 물러났고, 한나라군은 추격했다. 모돈은 40만의 기병으로 유방을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한다. 유방은 겨우 곤경을 벗어난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백등지치(白登之恥)'로 불리는 사건이다. 그후 한제국은 화친의 방식으로 흉노를 회유한다.

 

유방이 죽은 후, 모돈선우는 사절을 보내어 여후에게 서신을 보낸다. 말투는 아주 경박했다: "너는 금방 남편을 잃었다. 나는 현재 알지(閼氏, 부인)가 없다. 우리 둘이 한 쌍으로 맺어질 수 있겠다." 여후는 대노한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말라는 바람에 그녀는 완곡한 말로 회신하고 계속 화친한다(흉노는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후의 한문제, 한경제시기에 흉노는 수시로 '남하목마(南下牧馬)'한다. 한제국의 태도는 계속 양보하는 것이었고, 화친정책을 답습한다. 그러나 모돈선우와 아들 노상선우(老上單于)가 연이어 죽고 나서, 즉위한 사람은 군신선우(軍臣單于)였다. 

 

한무제에 이르러, 쌍방의 형세는 바뀌어 버린다. 한무제는 연달아 대군을 파견하여 흉노를 북벌한다. 특히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의 두 장수시대에 휘황한 전과를 거둔다. 그러나, 이들 전과의 배후에는 '상대효과'가 있었다; 군신선우가 죽은 후, 흉노왕국은 내란에 빠진다. 군신선우의 동생은 군신선우의 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선우에 오른다. 그가 이치사선우(伊稚斜單于)이다. 그후에 여러번의 내전이 발생하고, 패배한 측은 모두 한나라에 투항해왔다. 그리고 곽거병이 매번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면서, '봉랑거서(封狼居胥)"(지금의 몽골국 긍특산), 한해(澣海, 바이칼호)의 이남에는 더 이상 선우왕정(單于王庭, 흉노의 중앙정부 소재, 선우가 가는 곳으로 옮겨다닌다)이 없게 된다.

 

그러나, 곽거병이후, 한나라는 장수가 부족하여 한때 다시 화친정책을 쓰기도 하고 흉노도 점점 새변(塞邊, 장성부근)으로 돌아온다. 한무제는 이광리(李廣利)를 보내 공을 세우게 하려 했다. 이광리는 처음에 대완(大宛) 정벌에 성공하였으나, 이후 두 번의 흉노정벌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마지막에는 패전한 후 흉노에 투항해버린다. 한무제시대의 흉노북벌은 미완성으로 끝맺게 된다.

 

미중쟁패에서 역사의 귀감

 

이상의 개략 100년의 한흉쟁패사에서 오늘날 미중쟁패에 귀감으로 삼을만한 점은 다음의 몇 가지이다:

 

첫째, 그 기간동안 오직 1개의 왕국만 굴기했다면, 그렇게 많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진시황때, 두만선우는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물러났다. 진이세가 몽염을 죽이지 않았다면 흉노는 하남으로 되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모돈선우는 흉노의 민족영웅이라 할 만하다. 그가 없었더라면, 흉노는 북방초원의 패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돈의 운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당시 유방이 천하를 통일했고, 한왕조의 개국군신은 우수할 뿐아니라 한마음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비록 백등산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그저 한나라장수가 투항했을 때 그 기세를 타고 남하하여 약탈을 하곤 했을 뿐 계속 남침하지는 못했다(예를 들어, 오대, 북송때 거란족의 요나라처럼)

 

오늘의 상황은 중국은 굴기했지만 미국의 패권은 아직 전면적으로 약화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외치고 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이 구호가 확실히 미국의 주류민심을 반영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꾸어 말하면, 트럼프가 그렇게 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도, 반드시 '중국을 억누르는' 정책을 취했을 것이다. 양강이 병존하니, 미중쟁패는 필연적이고, 우연한 일이 아니다. 트럼프가 임기를 마친 후(2020년 혹은 2024년)에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수십년 백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

 

둘째, 두개의 '큰' 왕국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한측이 상대방을 완전히 소멸시킬 정도의 실력이 아니면 그치지 않는다. 혹은 패배한 측이 '완패'를 피할 능력만 있다면 투쟁은 오랫동안 지속되게 된다. 이전의 고사를 들자면, 한왕조가 이길 수 없을 떄 '화친'을 했다. 흉노가 이길 수 없을 때 '북둔(北遁, 북으로 달아남)'했다.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흉노는 한나라를 집어삼킬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한나라의 공주와 풍성한 혼수품을 챙기는 것이 실리에 맞다. 한왕조(중국의 다른 왕조도 마찬가지이다)는 초원과 사막을 점령한 능력과 생각이 없다. 그저 장성(長城)을 지키면 좋다는 것이 주류사상으로 되는 것이다.

 

오늘날 미중쟁패는 무역전이 막 개시되었을 때, 한무제가 연속북벌하기 전의 '마읍지전(馬邑之戰)'으로 볼 수 있다. 그때 한왕조는 흉노와 화친을 진행했고, 흉노와 변방상인들의 관계가 좋았을 때, 마읍의 부호인 섭일(聶壹)은 흉노의 군신선우를 만나, 그의 수하에 수백명이 있고, 마읍성의 관리들을 참살하고, 마읍성을 가지고 투항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마읍성내의 재물과 가축은 모조리 흉노의 것이 될 것이니, 흉노에서 대군을 파병하여 호응해서 한나라병사들이 오는 것을 막아달라고 한다.

 

군신선우는 마음성의 재물이 탐나서, 친히 10만대군을 이끌고 마읍에서 100여리 떨어진 곳에 도착한다. 그러나, 도중에 가축이 있는데, 아무도 방목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품는다. 사람을 보내어 하급관리 하나를 붙잡아 물어보니, 이것이 한왕조의 궤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상 3로대군이 있고 그중 2로대군이 매복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즉시 철군한다. 간단히 말해서,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이때부터 더 이상 '화친'이 아니었다. 그후 연이어 대전이 벌어진다.

 

이때 막 시작한 무역전은 쌍방이 아직 탐색하는 것이었다. 대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중쟁패는 이미 추세이고,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첫번째 탐색은 한편을 긴급히 철군하게 할 수 있다. 아마도 뇌대우소(雷大雨小)하지만, 뒤에는 반드시 광풍폭우가 밀려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잠시 쉰 다음에 다시 한번 폭풍광우가 몰려오고. 다시 오고...

 

셋째, 한무제는 웅재대략의 웅주로 절대 함부로 일을 벌일 인물이 아니다. 그는 마읍계획을 허가했고, 전면전을 벌일 준비를 마쳤다. 그는 전면전을 일으킬 수 있는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조부, 부친의 '문경지치(文景之治)'로 모아놓은 부가 있어, 지방의 창고가 가득 차 있었고, 재물이 남아돌았다(지방이 부유함), 그리고 경사의 돈도 흘러넘쳤다(국가가 충분했다); 태창의 곡식은 썩어나갔고, 남는 곡식은 바깥에 쌓아두었다. 부패할 때까지 먹지 않았다(민생이 여유로웠다); 길거리에는 말이 있고, 사람들로 넘쳐났다. 마치 오늘날의 중국과 같지 않은가?

 

그러나, 미국도 마찬가지로 견실하다. 먼저 '500억달러의 고관세를 물리겠다'고 말하고, 그후에 직접 중싱통신(ZTE)의 급소를 찌른다. 중국은 거의 막아내지를 못할 지경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한편으로 ZTE를 약간 풀어주고, 또한 다른 경우에 '시진핑은 좋은 친구다'라고 말한다. 이런 양면작전은 중국도 배워야 한다. 한무제는 화친을 끊고 개전을 했다. 그러나 군신선우는 화친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이익이 보이자 바로 마읍으로 출병시킨다.

 

넷째, 한무제는 이미 자신의 실력이 충분하다고 계산했다. 그 후에 전쟁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이전까지는 주도권이 완전히 흉노의 손에 쥐어져 있었지만, 상황은 돌연 급반전한다. 지금 미중무역전의 주도권은 완전히 미국에 쥐어져 있다. 중국은 기껏해야 '이에는 이'로 대응할 뿐이다. 언젠가 중국이 주도적으로 출격하면 세계의 국면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