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덕회41 원명원(圓明園) 이야기 글: 전심생(田沈生) 얼마전 인터넷에서 유머 하나를 보았다: 소명(小明)이 역사수업때 잠이 들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보고 돌연 질문을 했다. 소명학생 원명원은 누가 불태우고 파괴시켰지? 잠에서 덜 깬 소명은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급히 대답했다: 제가 불태우고 파괴한 게 아닙니다. 절말 제가 안했습니다. 선생은 화가나서, 수업이 끝난 후, 소명의 부친에게 전화를 걸어서, 당신 아들이 원명원을 그가 불태우고 파괴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명의 졸부 부친은 화를 벌컥 내면서 말했다: 이 자식이 또 말썽을 부렸군요. 그 놈이 불을 질렀건 아니건간에 선생님이 말씀해 주십시오. 얼마를 배상해주면 됩니까. 우스개는 우스개인데, 이는 나의 원명원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을 환기시켰다. 원명원.. 2024. 2. 20. 리커창(李克强)은 왜 반드시 죽어야만 했을까? 글: 호도도(弧度度) 어떤 사람은 중공당내에 좋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말한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왜 리펑(李鵬), 장쩌민(江澤民)이 죽었을 때는 그렇게 많은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길거리로 나와서 꽃을 바치면서 추모하지 않았을까? 인터넷이 날로 보급되고 발전하면서 중국에는 깨달은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민심의 향방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이 꽃을 바치고, 어떤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은 폭죽을 쏜다. 어떤 사람은 리커창이 아무런 업적도 내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시진핑이 헌법을 고치고 연임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그건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다만,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이 대거 개혁을 진행할 수.. 2023. 11. 7. 항전말기 중공의 10대원수는 어디에 있었는가? 글: 문사망(文史網) 연안정풍(延安整風)이 진행된 1942년부터 1945년기간은 대일항전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며, 동시에 최후의 승리를 거둔 시기이다. 그 때 신중국건립후의 10대원수중 8명의 "원수"는 전선의 자기 부대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38년 3월, 임표(林彪)는 산서(山西) 습현(隰縣)에서 염석산(閻錫山)부대의 초병에게 오인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후, 연안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부터 다시는 항일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연말 처 유신민(劉新民, 張梅)을 데리고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치료받고 휴양했다. 1942년 2월 소련에서 연안으로 돌아와 중앙당교 부교장이 된다. 1945년 8월 25일, 임표,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등소평(鄧小.. 2023. 7. 7. "팔로군(八路軍)" 명칭에 관한 몇 가지 문제 글: 맹검홍(孟儉紅) 항전초기 홍군(紅軍)을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대하여는 여러 글과 책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다만, 여전히 약간의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예를 들어, 팔로군 번호의 유래라든지, 산하의 3개사(師)의 번호는 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지등등. 그리고 개편된지 1달도 되지 않아 왜 팔로군은 다시 제십팔집단군(第十八集團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중공은 왜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고집했는지. 국민당과 공산당간에 팔로군 번호를 둘러싸고 어떤 다툼과 알력이 있었는지. 중공은 또 어떤 상황하에서는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이 시기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팔로군"은 원래 '월군(粤軍)'의 번호였.. 2023. 7. 7. 모안영(毛岸英)의 죽음과 팽덕회(彭德懷)의 관계 글: 안창해(顔昌海) 오랫동안 중국당국의 공식 선전내용은 이러했다: 모택동은 "항미원조(한국전쟁)"를 위하여, 자진하여 장남 모안영을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시켰고, 모안영은 한국전쟁에서 희생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공식 선전내용의 모택동이 자신하여 장남을 한국전쟁에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안영이 인민지원군에 들어간 것은 조직의 안배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과 팽덕회는 관련이 있을까? 사건의 내막은 이러하다: 1950년 10월 3일, 모택동은 김일성으로부터 다급한 도움요청서신을 받는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서 아군의 작전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월 5일, 모택동은 한반도에 출병하여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10.. 2023. 5. 25. 왜 이전에는 장진호(長津湖)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작자: 운(雲) 한국대통령 윤석열이 4월 27일 미국의회에서 연설하면서, 미국해병대가 1950년 장진호전투에서의 공헌을 찬양했다. 윤석열의 연설은 장진호전투를 다시 한번 조명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도 장진호전투에 관해서 몇가지를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첫째, 왜 이전에는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10년전 대륙에서는 기본적으로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은 장진호전투를 몰랐다. 이건 무엇때문이었을까? 먼저 유백승(劉伯承) 원수가 장진호전투에 대하여 평가한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병단(兵團, 3개軍)이 한개 사단을 포위해서, 거대한 댓가를 치른 후에도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적을 궤멸시키지도 못했다. 적은 편제를 갖추어 전투에서 철수했고, 모든 장비와 부상병까지 데려갔다." 유백승 원수.. 2023. 5. 18. 이전 1 2 3 4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