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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국연합군32

역사의 3대 거짓말 글: 심도지국(深度知局)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역사는 바로 중국의 종교라고. 인류역사상, 그 어느 국가나 민족도 중국처럼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가진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가장 중시하지만, 또한 역사에 의해 가장 심하게 눈이 가려져 있다.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 역사는 사람을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들고, 진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일부 인구에 회자되는 역사격언은 더더구나 미혹성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잘못된 가치관념을 갖게 만든다. 그러므로, 역사의 3대 거짓말을 분명히 아는 것의 의미가 날이갈수록 커지고 있다. 거짓말 하나: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고대제왕이 천하를 얻을 때 항상 위로는 천명을 받고, 아래로는 인심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 2024. 1. 30.
팔국연합군이야말로 중국인민해방군이다 - 아편전쟁이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이다. 글: 우별자(右撇子) 중국의 우민교육은 황당 그 자체이다. 중공이 만들어낸 각종 정치용어를 보면, 코메디와 몰염치로 충만핟. "해방(解放)"이라는 말을 보기로 하자. 곳곳을 다니며 강탈하고는 모두 '해방'이라는 명목을 붙인다. 전중국을 해방했다는 것은 기실 전중국을 강탈하여 자기 소유로 했다는 말이다. 특히 '대만해방'이라는 것은 더욱 가소롭다. 대만인들을 아주 잘 살고 있는데, 한 무리의 '못사는 자'들이 하루종일 '대만해방'시키겠다고 떠들고 있다니, 자신은 발에 족쇄를 달고서, 다른 사람을 해방시켜주겠다고 떠들고 있다. 이것보다 더 우스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국인의 일상언어를 보면, 우리는 자주 해방전에 어떠했고, 해방후에는 어떻고 하는 말들을 듣게 된다. 공산당이 국민당과 강산을 쟁탈한 전쟁을.. 2023. 1. 13.
중국은 왜 일본보다 자체 은행설립이 20년이나 늦어졌을까? 글: 건안(建顔) 1897년, 중국근대 최초의 중국계자본은행인 통상은행(通商銀行)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최초 일본계자본은행인 미쓰이은행(三井銀行)은 1876년에 일찌감치 설립되어 있었다. 중국은 일본보다 20년이 늦은 것이다. 중국최초의 중앙은행인 호부은행(戶部銀行)의 설립도 일본에 비하여 20년이 늦었다. 기실 일찌기 1885년에 이홍장(李鴻章)과 순친왕(醇親王)의 두 거물이 손을 잡고 두 차례에 걸쳐 조정에 근대은행설립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후세에 보기에 국가와 민족에 이로운 이 건의는 일군의 '애국자'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설마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비애국적이란 말인가? 1. 두 거물이 관영은행의 설립을 주장하다. 1860년대, 서방의 공업문명이 동아시아로 물밀듯이 밀려.. 2022. 8. 22.
1900년: 자금성(紫禁城)에서 도망치다. 글: 만두설(饅頭說) 1900년, 경자사변(庚子事變). 6월에 "선전포고"를 하여, 조정을 뒤흔들었다. 7월, 천진이 함락되고, 8월 북경이 포위된다. 팔국연합군은 성밖에서 보무당당했다. 8만의 청군은 성안에서 싸울지 말지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당초 선전포고의 결정을 내렸던 그 여인(서태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서태후는 서쪽으로 도망친다. 1 1900년 8월 14일 정오, 최옥귀(崔玉貴)는 태후의 부름을 받았다. 최옥귀는 궁내의 태감중 2인자였다. 원래 그는 밖에서 서태후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입을 가시며 아편을 피우는 시간에 들어가서 "선패자(膳牌子)"를 청하는 일을 했다('선패자'는 태후 혹은 황제가 식사할 때, 접견을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패를 바쳐서 선택하도록.. 2022. 8. 16.
북양대학당(北洋大學堂, 천진대학의 전신): 중국근대 최초의 대학 글: 매화서향(梅花書香) 중국 근대 최초의 대학 즉 천진의 북양대학(지금의 천진대학 전신)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895년, 사상유례없던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지 단지 몇달이 지난 후에 천진해관의 성선회(盛宣懷)는 청나라조정에 주청을 올려 천진에 “서학체용(西學體用)”의 북양서학당(北洋西學堂)을 개설할 것을 요청한다. 확실히 패전후에 깊은 반성을 통해, 지방과 중앙정부는 누습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서양식 학당’을 열도록 만들었다. 광서제는 신속히 조서를 내려 허락한다. 그리하여 얼마 후 ‘국립북양대학당’이라고 불리는 신식 대학이 천진 해대도량원문 밖(지금의 대고로 대영문외 해하중학, 해방남원 일대)의 박문서원(博文書院) 옛 부지에서 학생을 모집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성선회는 학당독판(督.. 2022. 6. 2.
조복전(曹福田): 의화단(義和團)의 2인자 글: 여소뢰(余少鐳) 오랫동안 의화단이 사람들에게 심어준 ㅇ니상은 '봉양필반(逢洋必反)' '봉양필멸(逢洋必滅)' 즉 외국 것은 모두 반대하고 없앤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소위 '양'자가 붙은 물건은 국가를 따지지 않고, 브랜드도 따지지 않고 모조리 서양인이 중국을 해치기 위해 가져온 것이니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화단이 한양멸양(恨洋滅洋)한 사료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그저 뒤져보기만 하면 나온다. 예를 들면, 청말민초의 광동 순덕 사람 나돈융(羅敦曧)이 쓴 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의화단은 철로, 전선은 모두 서양인들이 중국을 해하지 위한 것이니 철로는 불태우고 전선은 철거한다. 무릇 집안에 서양책, 서양지도를 보관하고 있으면 모두 '이모자(二毛子)'이니, 잡아서 반드시 .. 2022. 1. 2.
광서제의 죽음(1): 서태후에 유폐당한 광서제는 어떻게 죽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담사동(譚嗣同), 강유위(康有爲)와 무술변법의 '삼위일체'의 주장으로서, 그들은 성공과 실패를 함께 할 운명이 되었다. 과연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담사동은 죽임을 당하고, 강유위는 망명했으며, 홀로 남아서 죽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게된 운나쁜 광서제는 변법실패의 책임을 혼자서 지게 돈다. 사갈처럼 악독한 친이모(서태후)에게 영대(瀛臺)에 유폐되어 힘들게 10년을 살았다. 원래는 서태후가 죽으면서 그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데, 결국 미스테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천고의 수수께끼가 된다. 가경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두 외인들은 알 수 없는 사인불명이었다. 활실에 태어나면 자유란 없는 것이다. 원래 청나라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그는 대청을 회생시킬.. 2021. 9. 16.
"팔국연합군": 중국에 의해 가장 심하게 왜곡된 역사 글: 유기곤(劉淇昆) 팔국연합군의 전투는 중국에 의해 가장 심각하게 왜곡된 중국근대사이다. 팔국연합군이 왜 북경으로 진군했는가? 두 마디로 개괄할 수 있다: (1) 청나라조정이 서방각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이 전쟁은 청나라조정이 일으킨 것이고, 서방각국은 응전했을 뿐이다), 외국연합군은 대고구(大沽口)에 상륙하여, 경성으로 진격했다. 이건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닌가. (2) 서방각국은 중국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다. 북경에 진군해서, 청나라조정에 압력을 가하는 외에, 주로 경성에 갇혀 있던 각국 외교관과 선교사들을 구했다. 글쓰는데 편의를 위해 먼저 이 전쟁의 이름을 제대로 붙이기로 하자. "팔국연합군"은 전쟁의 이름이 될 수 없다. "팔국연합군침화전쟁"은 흑백이 전도된 말이고, 역사를 강간하는 것이니.. 2021. 1. 9.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으로 쳐들어올 때, 서태후는 왜 서안으로 도망쳤을까? 글: 장금(張嶔) "중국인들은 수도를 점령당하는 치욕과 함께 20세기를 맞이했다"고 말하는 '경자국난(庚子國難)'때 서태후가 서안(西安)으로 도망친 것에 대하여 많은 역사애호가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서안으로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서태후의 이번 소위 "서수(西狩)"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첫째는 서북대지는 사상유례없는 가뭄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서태후가 "서수"하는 과정에서 지나간 산서(山西)는 '경자국난'전에 이미 여러 해동안 가뭄으로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밭이 메말랐고' '보리싹이 시들었다' 산서의 전체 35개 주현(州縣)은 재해를 당해 있었다. 그리고 서태후가 '도망쳐 숨은' 서안은 어떠했을까? 섬서는 재해를 당한 주현이 더욱 많아서 60여곳에 .. 2020. 12. 15.
중국 전외교관: "여러 나라와 동시에 싸워서는 안된다" 글: 원남생(袁南生) (전 북경외교학원당위서기 겸 상무부원장, 주짐바브웨대사, 주수리남대사, 주샌프란시스코총영사) 여러 나라와 동시에 싸우지 않는다. 이는 중국 천년외교의 기본철칙이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사방에 적을 두게 되는 것은 가장 멍청한 외교전략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역사적 사실은 증명한다. 여러나라와 동시에 싸우는 것은 국가외교의 재난일 뿐아니라, 국가 전체적인 재난이 된다. 여러 나라들과 동시에 싸워서는 안된다는 철칙을 심도있게 살펴보는 것은 이론적인 의미뿐아니라 실천적인 의미도 있다. 사방수적(四方樹敵) 루견불선(屢見不鮮) 외교적으로 사방에 적을 두고, 여러 나라와 동시에 싸우는 현상은 중국고대외교사상에서 여러번 발생했다. 근대이래만 하더라도 여러번 나타났다. 1900년 6월 21일, .. 2020.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