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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44

중국은 전랑외교로 한국을 다시 잃었다. 글: 황포강봉(黃浦江封) 국제사회가 블링컨의 방중을 주목하고 있을 때, 한중관계는 사상유례없이 긴장되며, 외교전이 양국간에 전개되고 있어서, 마치 1895년이전의 한반도의 국면의 재연되는 것같다. 중국은 한국을 잃는 외교적 실패에 직면했을 뿐아니라, 이 실패는 아마도 청일전쟁과 같은 시스템적인 실패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중국의 옛날 대조선외교의 실패는 1882년 조선의 임오군란때부터 시작한다. 이홍장(李鴻章)의 심복인 마건충(馬建忠)은 임오군란후에 조선에 사신으로 간다. 주요목적은 조선과 일본의 결맹을 막는 것이었다. 다만, 설사 그가 친일적인 대원군을 성공적으로 납치하고, 친중의 민비를 내세웠으며, 원세개(袁世凱)가 1885년 한성에 주둔하며, 이홍장이 영국, 러시아, 미국등의 세력을 빌어 일본을 막.. 2023. 6. 19.
중국의 5대전구(五大戰區) (하) 글: 주전(周田) 가장 높은단계의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동해 중국이 타이완해협에서 도발을 하고, 남해에서 암초를 강제점거하여 군사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병흉전위(兵兇戰危)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경시할 수 없는 충돌지점은 바로 동해이다. 아마도 2차대전이래 가장 높은 등급의 해군,공군 군사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곳이다. 2013년, 중국은 '동해방공식별구'를 발표하여, 일본의 공역을 직접 건드린다. 일본은 승인을 거절했고, 미국과 주요서방국의 지지를 받는다. 최근 들어, 중국의 군용기가 속속 동해에 출몰한다. 일본군용기도 긴급히 이륙하여 대응하는 횟수가 급격히 늘고 있다. 댜오위다오의 분쟁은 해결이 어렵다. 중국의 항공모함이 여러번 미야코해협을 지나갔으며 최근에는 러시아함대와 함께 쓰가루해협을 지.. 2021. 11. 5.
청일전쟁중 평양전투에서의 패배는 "탄진양절(彈盡糧絶)"때문일까? 글: 염극비(廉克飛) 좌보귀(左寶貴)는 평양에서 전사하여 역사에 영명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평양전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전사한 후, 섭지초(葉志超)는 부대를 이끌고 5백리를 미친 듯이 도망쳐 중국내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섭지초는 역사에 오명을 남긴다. 백년동안 여론의 비판은 주로 그를 향했고, 섭지초가 담량이 적고 멍청하여 평양전투에서 대패하게 된 것이라고들 말한다. 필자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 사건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쓰는 것은 무슨 예술적인 문학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인이라면 좌보귀와 섭지초를 대비하여 평가하면서 하나는 흑, 하나는 백, 하나는 용사, 하나는 겁쟁이로 그릴 것이다. 무대에 올리는 희극이나 소설이라면 그렇게 .. 2021. 7. 21.
제2의 청일전쟁이 일어날 것인가? 글: 심주(沈舟) 1주일동안 중공은 두번에 걸쳐 한국전쟁을 기념했다. 2차에는 많은 군인도 참가하여 마치 무슨 동원대회같았다. 시진핑은 70년전의 대미일전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핵심요소는 빠트렸다. 그때 중공군대 240만명으로 미군 33만명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공이 사용한 것은 인해전술이었고, 근본적으로 병사의 목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래 한반도를 통일하고 점령하려 했지만, 결국은 38선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중공고위층은 소리높여 미국과 싸우겠다고 한다. 여전히 병사와 백성의 목숨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데 인해전술을 쓸 수도 없다. 아마도 전쟁형태는 주로 해전, 공중전이 될 것이다. 이는 다시 한번 100여년전의 청일전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하면, 중화민족은 아마도 다.. 2020. 10. 26.
청나라말기 "미국유학아동"들은 얼마나 우수했을까? 글: 장금(張嶔) 증국번(曾國藩)이 관료사회에서 종횡하며 부침을 거듭했지만, "유미유동계획(留美幼童計劃)"은 그의 일생에서 최후의 큰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72년 8월 11일, 즉 증국번이 사망하기 5개월전에, 이 '중화창시지거(中華創始之擧)'라 불리는 계획을 힘들게 싸워서 성사시켰다. 120명의 '유미유동'은 4차에 나누어 3만2천리를 건너 미국으로 유학간다. '서도자강(徐圖自强, 천천히 스스로 강해지기를 도모한다)'의 국가사명을 어깨에 지고 떠난 것이다. 증국번의 생전에 오른팔이며, '유미유동계획'의 집행자인 용굉(容閎)은 흥분하여 외쳤다: "나는 야응(夜鷹, 쏙독새)이 눈을 뜬 것같았다." 막 나라의 대문을 열었던 시대에, '서양유학'은 대다수의 중국인들에 있어서, 머리깨지면서 앞다투어 가려.. 2020. 5. 28.
청군(淸軍)은 팔국연합군에게 왜 힘없이 패배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1900년, 중국역사상의 대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8국연합군이 극히 단기간내에 청나라의 수도 북경으로 쳐들어온다. 청나라정부는 결국 팔국연합군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에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를 .. 2020. 4. 3.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글: 풍현일(馮玄一) 광서제는 청나라의 제11대황제이다. 그의 이름은 애신각라 재첨(載㵇)인데, '첨'자는 물리 조용히 흐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의 성격과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화상(畵像)을 보면, 그는 문약하고 청수(淸秀)한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 .. 2020. 1. 16.
과거제 폐지의 과정 글: 맹헌실(孟憲實) 팔고문(八股文)을 폐지하는 것은 과거제도의 고질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특과(經濟特科)의 설립은 고시제도의 새 방향을 대표한다. 엄수(嚴修, 1860-1929), 천진사람이며 광서9년 진사이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생한 후, 귀주성학정(貴州省學政)에 임명된다. 현.. 2019. 5. 24.
북양수군의 패망: 이홍장(李鴻章)과 옹동화(翁同龢), 누가 원흉인가? 글: 백가잡평(百家雜評) 중국최초의 근대화 해군함대로서, 북양수군은 이 오래된 제국의 무수한 희망을 안고 있었다. 자료를 보면, 북양수군은 주로 전함이 크고 작은 25척이 있었고, 보조군함이 50척 있었으며, 운수선이 30척, 관병이 4천여명 있었다. 당시 세계9위, 동아시아1위의 수준이.. 2019. 5. 12.
영년(英年): 서태후가 총애한 풍수가 글: 포강객(浦江客) 광서24년(1898) 팔월 초엿새,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변법을 시행하는 광서제는 영대(瀛臺)에 연금하고, 훈정(訓政)이라는 명목으로 최고권력을 다시 장악한다. 기실 1년전에, 대권을 놓칠까 우려하던 서태후는 이미 광서에제게 손을 쓴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칠왕분(七.. 2019.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