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 9

"허세(許世)": 중국에 1명만 남은 성, 스리랑카왕자의 후손

글: 무풍(無風) 중국고대의 역사는 유구하고, 문화의 연원도 길다. 성씨도 그 중의 하나이다. 성씨는 두터운 족보처럼 화하자손의 원류와 변천을 기록하고 있다. 장(張), 왕(王), 유(劉), 이(李)등 자주 볼 수 있는 성씨들을 제외하고, 중국에는 보기 드문 성씨들도 있다. 예를 들면 제일(第一), 상관(上官)같은 성씨들이다. 그러나, 이런 성씨도 아무리 드룸라도 하더라도 전국에 천명은 넘는다. 그러나, 여러 성씨들 중에서 하나의 성씨는 전국에 오직 1명뿐이다. 그렇다면 그 성씨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 성씨는 바로 "허세(許世)"이다. 이 성씨는 스리랑카(錫蘭, 실론)의 왕자에서 유래한다. 스리랑카는 열대의 도서국가이고, 자연풍광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 시대에 스리랑카의 발전과 외부와의 교류는..

1271년의 천주(泉州): 한 이탈리아상인의 견문록

글: Jacob D'Ancona (아래 글은 그가 1271년 남송의 천주를 방문하고 쓴 의 내용임) 하나님의 보우하에 우리는 중국(Sinim)의 영토에 이르러, 자동성(刺桐城)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현지사람들은 "천주(泉州)"라고 불렀고, 남다른 도시였다. 아주 큰 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지며, 만자국(蠻子國, 즉 남송을 가리킴)의 주요무역도시중 하나였다. 나는 나의 하인들과 배에 후추, 알로에, 단향목(檀香木), 장뇌(樟腦), 정선한 향수, 진귀한 옥석주보, 대추야자(海棗), 옷감등의 화물을 가득 싣고와서 상륙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해는 양(羊)의 해였다. 왜냐하면 만자인(蠻子人, 남송인)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도에 대하여 동물의 명칭을 부여해서 불렀다. 용의 해, 소의 해, 뱀의..

북소림(北少林)은 하남(河南)에 한곳이 있는데, 남소림(南少林)은 두 곳에 있다.

글: 거려행(去驢行) 중국에서 소림사에 관하여는 남북소림(南北少林)이라는 말이 있다. 북소림에 대하여는 모두 아무런 의문없이 하남 숭산(嵩山)을 떠올린다. 그러나, 남소림에 대하여 복건(福建)이외에 구체적으로 어느 장소에 있는지에 대하여는 '논쟁'이 있다. 왜냐하면 복건의 천주(泉州)와 보전(莆田) 그리고 복청(福淸)에 모두 "소림사(少林寺)"가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중 천주와 보전간의 다툼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곳이 가장 정통있는 남소림일까? 천주의 소림사는 청원산(淸源山) 동쪽 산록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이름은 진국동선사(鎭國東禪寺)인데, 항간에서는 속칭 "남소림"이고, 남방소림무술의 발상지이다. 전설에 따르면, 천주소림사는 일찌기 당왕(唐王)을 구한 십삼곤승(十三棍僧)중 하나인..

포수경(蒲壽庚): 송원교체기의 아랍계 부호

글: 하신(何新) 중국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각종 원인으로(주로 사신(史臣)이 무지하거나, 혹은 유가적인 이데올로기로 편견을 가져서), 정사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역사의 그림자 속에 매몰되어 버렸다. 남송말, 원초에 한 아랍계통의 상인이 있었다(아마도 유태인일 수도 있다. 당시 유태인과 아랍인을 중국인들은 혼동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포수경이다. 포수경(1205-1290). 일명 포수경(蒲受畊), 호는 해운(海雲)이다. 출신은 불명인데, 고조우(顧祖禹)에 따르면 그의 부자는 서역에서 왔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의 선조가 점성(占城, 지금의 월남)의 서역 아랍인의 후예라고 한다. 남송시기, 육상비단길은 이미 막혔고, 중국과 아랍의 교역은 해운을 위주로 ..

홍희관(洪熙官): 홍권(洪拳)의 창시자로 93세때 한 소녀의 손에 죽임을 당하다.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청나라때의 무협인물을 얘기하자면, 모두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황비홍(黃飛鴻), 홍희관과 방세옥(方世玉)일 것이다. 이전의 홍콩영화에서도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찍은 것들이 많다. 이 3사람은 역사상 진실로 존재했었다. 여기에서는 홍희관에 대하여 ..

왕안석(王安石)은 왜 복건자(福建子)를 미워했는가?

글: 송지견(宋志堅) 왕안석에 마지막으로 재상에서 파면될 때, 가슴 속에 원망을 품고 있던 대상은 "시종 신법은 안된다"고 주장한 사마광(司馬光)이 아니라, 원래 "왕안석에 찬동해서 신법을 건립했던" 여혜경(呂惠卿)이었다. 여혜경은 복건(福建) 천주(泉州) 사람이다. 역사의 기록에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