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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제13

동림당(東林黨)은 대명왕조를 어떻게 망가뜨렸는가? 글: 요풍휘(姚豊輝) 명나라말기에는 유학자들로 구성된 동림당인들이 중용되어 나라를 다스렸다. 유학자들의 글을 보면 이들 동림당인들은 '정인군자(正人君子)'였다. 그러나, 그들의 '당수'는 명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역사상의 '망국지신(亡國之臣)'임이 확실하다. 동림당의 핵심구성원들은 강남사대부를 위주로 하는 관료집단이다. 숭정제는 즉위후 동림당인들에 의지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다. 그들이 관직을 일단 차지하자, 말만 번지르르한 고상한 뜻을 펼치고자 했다. 고대 성인들의 이상적인 통치를 하고자 한 것이다. 관모를 쓰고 관복을 입자 이들은 득의양양하게 즉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것을 고쳐야 한다 저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변법혁신을 주장한다. 소위 "혁제조야적폐(革除朝野積弊), 반대탐종왕법(反對貪縱枉法)"(.. 2023. 3. 21.
명나라 멸망의 3대원인 글: 취역사(趣歷史) 명나라의 멸망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한다. 비애의 왕조이고 비애의 시대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명나라가 도대체 왜 멸망했는지를 연구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대를 넘어 명나라를 구해주고 싶어했다. 유행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 2019. 4. 2.
전겸익(錢謙益)으로 본 동림당의 변신; 신앙집단에서 이익집단으로 글: 정만군(程萬軍) 숭정2년, 즉 1629년 숭정제 주유검은 전면적으로 동림당인을 기용하기 시작한다. 대명정계에 동림당의 잔여인원들은 다시 중용된다. 다시 나온 동림당인들은 중망(衆望)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동림당인은 이미 옛날의 독림당이 아니었다. 왜 그런가? 다시 조정.. 2019. 1. 14.
명나라 황족들은 왜 많이 요절했을까? 작자: 미상 1627년 명나라 제15대항제 명희종 주유교가 붕어한다. 나이 겨우 22살이다. 명희종은 연호가 천계여서 천계제라고도 부른다. 천계제는 7년간 재위했고, 3남3녀를 낳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두 요절한다. 한명도 자라서 성인이 되지못한다. 후계자가 없었던 천계제는 어절 수 없.. 2019. 1. 6.
위충현의 엄당(閹黨)을 키워준 것은 동림당이다. 글: 정만군(程萬軍) 위충현과 동림당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하나는 극단적 현실주의자이고, 하나는 극단적 이상주의자이다. 대다수의 세숙인들에게 있어서 어디가 더욱 흡인력을 가질까? 위충현과 동림당의 투쟁을 이야기하자면, 연원이 있다. 일찌기, 위충현이 아직 세력을 키우지 못했.. 2018. 3. 7.
명(明), 청(淸) 동시대 최고지도자 3명을 비교한다. 글: 정만군(程萬軍) 명청사(明淸史)를 잘 아는 독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청나라는 1616년에 건립되었으며 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고 하였고, 여진족의 한 갈래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건립했다. 이 정권은 중국을 통치하기 전에, "황조"를 이루기 전에, 중국의 지방소수민족 자치정권이.. 2018. 1. 8.
명나라 마지막황제의 후궁생활 글: 양청균(楊淸筠) 후궁을 얘기하자면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견환전>, <미인심계>들일 것이다. 확실히 영화드라마작품 가운데 '후궁'이 나오는 빈도가 높다. 이들 이야기에서 후비들의 구심투각(勾心鬪角), 권력과 지위에 대한 몸부림, 우여곡절이 많은 스토.. 2015. 2. 12.
명말당쟁의 시비곡직 글: 양청균(楊淸筠) 동림당과 엄당의 투쟁은 천계제때 엄당의 승리로 끝난다. 비록 동림당이 천계제의 즉위에 거대한 공을 세웠지만, '삼대안(三大案)'을 통해서 기회를 만들어 주었지만, 천계제는 확실히 이들 재야에서 성장한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충현이 이끄는 엄당을.. 2014. 12. 12.
광시형(光時亨): 명나라말기 남천을 저지한 인물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송나라에 이어, 명나라도 또 하나의 '망천하(亡天下)'의 왕조가 되었다. 다만, 송나라와 명나라를 비교하면, 남송은 한세기반동안 연속되었는데, 소위 '남명'은 겨우 십여년간 잔존했을 뿐이다. 한, 당과 비교하더라도, 명나라에는 '삼국' 혹은 '남북조'의 국면이 나.. 2014. 4. 4.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것이 잘못인가 글: 주가웅(朱家雄) 원숭환(袁崇煥)의 죽음에 관하여 청나라 중엽이래로, 사서에서는 건륭제가 결정내린 것처럼 '천고기원(千古奇寃)' 즉 천고에 원통할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이기로 결정한 원인은 아주 복잡.. 2012.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