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조258

조조(曹操)의 후계자다툼(1): 조조의 아들들! 글: 의사리(衣賜履) 조조는 영웅이다. 자식을 낳는 것도 남달랐다. 앞뒤로 25명의 아들을 낳았다. 딸도 적지 않게 낳았을 것이다. 최소한 3명은 한헌제 유협에게 시집보냈고, 그중 한명은 한나라의 마지막 황후가 된다. 여기에서는 그의 아들들중 몇몇을 골라서 소개해 보기로 한다. 조앙(曹昻): 조조가 가장 미안해 한 아들 조앙의 자는 자수(子修)이고, 조조의 장남이다. 만일 일찌감치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황제가 된 것은 조비가 아니라 조앙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앙은 조비보다도 근정묘홍(根正苗紅)하기 때문이다. 바로 적장자(嫡長子)이다. 조조의 첫부인은 정(丁)씨이다. 그러나 정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 조조의 작은 부인 유부인(劉夫人)은 아들 조앙과 딸 청하장공주(淸河長公主)를 낳는다. 유부인은.. 2021. 5. 19.
조위(曹魏)의 효기장군(驍騎將軍) 3명은 누구일까?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효기장군은 고대의 무장 관직이다. 한무제때 이광(李廣)이 효기장군에 봉해진 바 있다. 이에 대하여, 사마천은 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漢)은 마읍성(馬邑城)으로 선우(單于)를 유인했다. 대군을 마읍의 옆 골짜기에 매복시켰고, 이광이 효기장군으로 호군장령을 이끌었다. 그때 선우가 눈치를 채고 가버린다. 한나라군대는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다. 그후 4년이 지나, 이광은 위위(衛尉)로 장군이 되어, 안문관(雁門關)을 나가 흉노를 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비록 촉한과 동오에는 모두 효기장군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위의 역사에는 3명의 효기장군이 있다. 그리고 이 3명은 모두 조위의 종실(宗室)이다. 그렇다면, 조위의 세 명의 효기장군은 도대체 누구일까. 첫번.. 2021. 5. 11.
조위(曹魏)의 오자양장(五子良將)을 비교한다. 글: 소천(小天) 조위의 오자양장은 삼국시기 조위세력의 5명의 명장을 가리킨다. 장료(張遼), 악진(樂進), 우금(于禁), 장합(張郃)과 서황(徐晃)이다. 이 다섯 명의 장수는 전투에 능했다. 의 작자인 진수(陳壽)는 이 5명을 묶어허 하나의 전(傳)에 기록하며 이들을 높이 평가한다: "당시의 좋은 장수는 오자가 우선이다(時之良將, 五子爲先)" 그렇다면, 이 다섯 명 중에서 관직은 누가 가장 높고, 식읍은 누가 가장 많았을까? 우선 관직을 보자. 장료는 병사하기 전에 가장 높았던 관직이 전장군(前將軍)이다. 그 전에는 정동장군(征東將軍)이었다. 장료가 죽은 후에는 강후(剛侯)라는 시호를 받는다. 악진은 병사하기 전에 가장 높았던 관직이 우장군(右將軍)이다. 사후에 시호는 위후(威侯)이다. 악진은 다섯 명.. 2021. 5. 1.
조조는 왜 고향인 박주(亳州)가 아닌 진류(陳留)에서 거병했을까? 글: 역사백가쟁명(歷史百家爭鳴) 진류(陳留)는 아주 신기한 곳이다. 동한말기에 하나의 군(郡)으로 연주(兖州)에 속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왕(王)의 작위를 내리는 지방이기도 하다. 역사에 기록된 진류왕(陳留王)은 한헌제(漢獻帝) 유협(劉協), 조환(曹奐)등이 있다. 유협과 조환의 특수성으로 진류왕은 자주 망국지군이 죽기 전에 강등되어 봉해지는 곳이 되었다. 우연하게도 조조가 거병한 곳이 바로 진류이다. 조위의 마지막 황제인 조환은 진류왕에 봉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조위가 진류에서 시작해서 진류에서 망했다고 말한다. 조조는 진류 사람도 아닌데, 왜 진류를 선택해서 거병했을까? 조조는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즉 현재의 안휘 박주이다. 일반적인 생각이라면, 거병하기 가장 좋은 곳은 당연히 .. 2021. 4. 16.
원소(袁紹)의 두 아들은 왜 협력하지 않고 서로 싸웠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원소가 비록 관도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했지만, 그래도 하북(河北)의 땅은 여전히 그가 장악하고 있었고, 실력은 여전히 강대했다. 만일 하북의 땅을 원소의 한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면, 조조가 하북의 땅을 차지하는데 아마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소가 죽자, 그의 두 아들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두 형제는 왜 서로 협력하여 공동으로 적을 막아내지 않았을까? 원소의 아들들 중에서, 원소의 자리를 승계할 후보자는 두 명이었다. 즉 원담과 원상이다. 원담이 형이고 원상이 동생이지만, 원상은 인물이 잘 생겼다. 원소의 처인 유씨(劉氏)는 원상을 아꼈고 자주 원소의 앞에서 작은 아들 원상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칭찬한다. 원소도 이 작은 아들이.. 2021. 4. 15.
조조(曹操)는 왜 장료(張遼)를 받아들이고, 고순(高順)을 죽였을까?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장료와 고순은 모두 여포의 수하대장이다. 여포의 군중에서의 활약으로 보자면 고순의 군사적 능력은 장료보다도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조는 하비성(下邳城)을 함락시킨 후, 장료의 투항은 받아들였지만, 고순은 여포와 함께 죽여버린ㄴ다. 둘 다 여포의 수하장수인데, 조조는 왜 장료의 투항을 받아들이면서, 고순은 죽여야했을까? 장료는 원래 정원(丁原)의 부하였다. 무공이 뛰어나고 힘이 세서 정원이 휘하로 거둔다. 하진(何進)이 군대를 경성으로 불러모을 때, 정원은 장료를 데리고 간다. 정원이 패망한 후, 장료는 동탁에 넘어간다. 동탁이 패망한 후에는 장료와 그의 부하들이 다시 여포에게 귀속된다. 여포가 이곽에게 패배한 후, 장료는 여포를 따라 서주로 간다. 그리고 대리노국상(代理.. 2021. 4. 12.
마초(馬超): 유비에게 온 이후 활약하지 못한 이유는...?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은창종횡지(銀槍縱橫志), 북망진루천(北望盡淚泉) 광위안(廣元)에서 수십년간 살다보니, 이곳의 산수는 아주 친근하게 여겨진다. 광위안은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문화이다. 광위안은 양평관(陽平關)과 검문관(劍門關)의 사이에 위치한다. 그 가운데 있는 소화고성(昭化古城)은 삼국시대때 가맹관(葭萌關)이라 불렸다. 이곳은 나관중이 에서 멋진 장면을 쓴 곳이기도 하다. 즉 장비가 마초와 싸운 곳이다. 그래서 광위안의 사람들은 마초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즐긴다.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인물이다. 비록 이 장면은 나관중이 창작한 것이지만. 의 정수는 전반부이다. 마초도 그 정수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돌연 나타나서는, 일단 유비에게 의탁한 이후 전혀 활.. 2021. 2. 15.
제갈량의 은거시절 친구 서서, 최주평, 석광원과 맹공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글: 역사신비사(歷史神秘事)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 제갈량은 삼국의 제일고수이고, 그와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면 분명 보통인물은 아니다. 제갈량에게는 4명의 친구가 있었다. 서서(徐庶), 최주평(崔州平), 석광원(石廣元)과 맹공위(孟公威)이다. 서서의 출신이 한미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사족(士族)출신이다. 예를 들어, 최주평의 부친은 동한의 사도(司徒)였다. 지위도 높고 권력도 막강한 실력파였던 것이다. 에는 4명 중에서 서서가 가장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는 것은 순수하게 포전인옥(抛磚引玉)을 위함이다. 벽돌(磚)은 서서이고 옥(玉)은 제갈량이다. 서원직(徐元直, 원직은 서서의 자)이 제갈량을 추천할 때, 서서는 조조가 자신의 모친을 붙잡아 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울.. 2020. 12. 19.
여포가 죽은 후 방천화극(方天畵戟)은 어디로 갔을까? 글: 계설필담(溪說筆談) 여포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적토마는 조조에 의해 관우에게 하사된다. 그렇다면, 그의 병기인 방천화극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무기는 사용하는 사람이 원래 많지 않다. 방천화극을 주병기로 사용할 수 있는 무장은 더욱 적다. 대장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손에 익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명소졸은 여포의 병기를 쓸만한 자격이 없다. 그래서 조조가 누구에게 하사하고 싶어도 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방천화극은 여포의 상징이 되었고, 아마도 전리품으로 조조가 소장했을 것이다. 기실 이 문제는 소설의 후반부에 언급되어 있다. 조비(曹丕)가 칭제하기 전에, 그의 동생인 황수아(黃鬚兒) 조창(曹彰)이 불복하여 병력을 이.. 2020. 12. 10.
초선(貂蟬)의 아들이 선비(鮮卑)의 10만철기를 대파했다? 글: 문재봉(文裁縫) 먼저 얘기할 것은 "초선(貂蟬)"이 원래 인명(人名)이 아니라, 한나라때 시종관원(侍從官員)이 쓰는 관모(官帽)의 장식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검으면서 얇고, 얇으면서 가볍고, 가벼우면서 뚤려 있어 아주 아름다웠다. 후궁에 모자를 관리하는 관직을 별도로 설치했는데, 사람들은 '초선'이라는 말로 이런 모자를 관리하는 여관(女官)을 지칭했다. 나중에는 미녀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어 쓰이게 된다. 다음으로, 에는 초선에 관한 여하한 기록도 없다. 가장 먼저 초선이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은 라는 책이다. 책에 따르면 초선의 성은 임(任)이고, 원래 여포(呂布)의 처였다. 임도(臨洮)의 전란중에 여포와 헤어져서 나중에 왕윤(王允)의 집으로 흘러들어간다. 초선이 향을 사르고 달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2020.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