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목13

민국(民國)시대 가장 권위있는 10명의 국학대사(國學大師) 글: 방유(方維) 민국시기는 중국문화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대사(大師)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아니라, 개성도 충만했다. 그리하여 춘추전국과 위진남북조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1. 장태염(章太炎) 1929년, 상해 는 을 발행했다. 에서 108명의 영웅호한을 정한 형식을 모방하여당시 문화계의 대사들의 서열을 매긴 바 있는데, 1위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장태염이었다. 청화대학 국학원이 성립될 때, 가장 먼저 확정된 교수 명단에는 단지 3명이 있었다: 장태염, 양계초(梁啓超), 왕국유(王國維). 그러나, 장태염은 고사하고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뒤의 두 사람은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찌기 양계초에 대하여는 "만일 양계초 같은 무리라면, 역사에 한 글자라도 들어갈 수 .. 2023. 5. 30.
호적(胡適)의 천년일탄(千年一嘆) 글: 사상(史翔)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저 결과만 있을 뿐이다. 지금 70년전 장개석의 '창구학인계획(搶救學人計劃)'을 되돌아보면, 확실히 중공의 호구에서 '학인을 구해낸 것'이다. 대륙이 중공에 점령되기 전에 대륙을 떠난 지식인 호적, 부사년(傅斯年), 전목(錢穆)은 여전히 자유사회에서 자유사상을 전승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에 남았던 걸출한 지식인들은 '반우' 문혁'으로 거의 모두 박해를 당했고, 환상을 깨지고, 악몽만 남게 되었다. 1948년 회해전역(淮海戰役)이 시작되었을 때, 국민당군대는 전투에서 불리했다. 장개석은 좋지 못하다고 예감하고, '창구학인계획'을 제정하기 시작한다. 명단에는 모두 국내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걸출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때는 그들 주에 대다수는 의식하지 못했었다.. 2020. 8. 16.
"초수삼호(楚雖三戶), 망진필초(亡秦必楚)"의 뜻은? 글: 하동노경(河東老景) 에는 이런 기재가 있다: "무릇 진이 육국을 멸할 때, 초나라가 가장 죄가 없었다. 초회왕이 진에 들어간 이래 반기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초나라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초회왕을 가련하게 여긴다. 그래서 초남공은 "초수삼소, 망진필초"라고 하였다." (남공은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음양가이며 31편을 지었다.) 족보에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초나라는 세자로 대표되는 왕족(적장자 혹은 왕장자)이외에, 나머지는 갈라져 나가서 많은 "씨(氏)"를 가진다. 초왕의 나머지 아들들은 "씨"를 가진다는것이다. 그 중에서도 소(昭), 굴(屈), 경(景)의 세 씨가 가장 강대해서 초나라의 지주였다. 삼족의 자제들은 초나라의 고위관직을 세습하여 맡아왔다. 굴원은 일찌기 삼려대부(三閭大夫)를 맡았는데.. 2019. 1. 13.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의 교수들은 왜 직위에 연연하지 않았는가? 글: 위득승(魏得勝) 서남연합대학("서남연대")의 상무회의기록을 보면 우리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두 글자는 "사직(辭職)"과 "위류(慰留)"이다. 서창파 5호(청화대학 판사처)의 상무회의기록을 예로 들자면, 양무지(楊武之)가 이학원 수학과주임의 직무를 사직하는 서신에 대하여 '위류'를.. 2018. 12. 3.
진나라굴기의 배후에 있는 "소금전쟁" 글: 일조심진기(一條尋秦記) 소금의 사람에 대한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도 소금이 없으면 경쟁력도 잃고 생존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고대에 한 국가가 소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서>에 이런 말이 있다: "오(吳)는 .. 2018. 8. 27.
봉화희제후(烽火戱諸侯): 아들이 모친과 손잡고 부친을 죽이고, 부친의 첩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사건 글: 연비(燕飛) 오늘 할 얘기는 "아들이 모친과 함께, 부칙을 죽여버리고, 부친의 첩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운" 이야기이다. 중국역사상, "봉화희제후"라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서주(西周)의 주유왕(周幽王)은 미녀 포사(褒姒)를 한번 웃게 하기 위.. 2018. 7. 18.
역사는 한 민족의 영혼이다. 글: 부국용(傅國涌) 1. "역사는 아무나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어린 계집아이이다" "역사는 아무나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어린 계집아이이다". 지금까지 이미 60여년간 유행한 이 말은 아직도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없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호적(胡適)이 정말 이 말을 했다고 믿고 있다. .. 2015. 2. 10.
황건적의 난 이후의 5년(1): 의의 글: 낙극(洛克) 장각(張角)이 이끄는 '황건적의 난"은 난을 일으킨 해에 동한정권에 의하여 진압된다. 이 점에 있어서 이전 두 왕조말기의 농민의거와는 확실히 다르다. 진말과 서한말기(정확히 말하면 왕망의 신말기)의 농민의거는 모두 난이 일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정권이 .. 2014. 12. 12.
중국고대에 "농민의 난"은 존재하지 않았다. 글: 양진도(楊津濤) 사학계에서는 "농민의거"의 성격규정과 평가에 대하여 이견이 존재해 왔다. 절대다수의 사람은 "농민의거"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진승, 유방, 주원장, 이자성의 이야기도 귀에 익숙할 것이다. 1949년이후의 중국통사에서 "농민의거", "농민혁명"의 내용은 오랫.. 2013. 12. 22.
북경대학은 "세 마리 토끼"때문에 유명해졌다. 글: 유계흥(劉繼興) 호적(胡適)은 농담처럼 이렇게 말할 바 있다: "북대는 세 마리 토끼때문에 유명해졌다" 이 "세마리 토끼"는 각각 채원배(蔡元培), 진독수(陳獨秀), 호적이다. 세 사람은 모두 토끼띠이다. 채원배는 동치 정묘년(1867년)생이고, 진독수는 광서 기묘년(1879년)생이며, 호적은 .. 2013.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