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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충25

장헌충살인고(张献忠杀人考) (2) 글: 장굉걸(张宏杰) ​ 9 ​ 장헌충은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시작했지만, 그후 이리저리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다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어 절망하게 된다. ​ 최초의 신선함도 지나가고, 이제는 조정의 사무를 보는 것고 게을러졌다. 그리고 성깔만 부리게 되었다. 어느날 조회를 진행하는데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던 보석을 가득 심은 관이 바닥에 떨어지게 되자, 발로 짓밟아서 엉망진창에 되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다 짓밟아버리고 나서, 곁에 서 있던 시위의 대첨포모를 빼앗아 머리에 썼다. 그리고 큰소리로 우스면서 말했다: "XXX, 어르신은 역시 이걸 쓰는게 편하군!" ​ 그는 갈수록 자신이 병력을 이끌고 사천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라고 후.. 2024. 1. 15.
장헌충살인고(张献忠杀人考) (1) 글: 장굉걸(张宏杰) ​ 1 ​ 숭정17년(1644년) 육월 이십일일, 중경 통원문 바깥의 광장에 3만7천명의 명군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110개의 긴 줄로 늘어서서 차례로 앞으로 나아갔고, 그들은 앞에 놓인 나무탁자 위로 오른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놓았다. 나무탁자 앞에 서 있는 사병은 칼을 내리쳤고, 손은 잘려나갔다. ​ 이는 명나라말기 농민군 장헌충의 부대가 포로로 잡은 명군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육월 이십일, 장헌충은 중경성을 함락시킨다. 이는 그가 사천에 들어간 후 거둔 최초의 대승전이었고, 전군은 위에서 아래까지 기뻐 날뛰었다. 장헌충은 특별지시를 내린다. 비록 명군이 완강하게 저항하였지만, '팔대왕(八大王, 장헌충 자신을 가리킴)'은 이번에 관대함을 베풀어 포로들은 한명도 죽이지 않고, .. 2024. 1. 15.
황소(黃巢)는 왜 실패했는가?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의종(唐懿宗)은 황음사치(荒淫奢侈)하고, 지취금미(紙醉金迷)하며, 환관이 권력을 농단하고 ,번진이 지방에 할거했으며,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각지에서는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결국 대규모의 황소의 난(黃巢起義)이 일어난다. 황소는 875년에 거사하여, 884년 죽을 때까지 전후로 10년간 활약했다. 이 십년간은 881년 황소가 장안에서 황제를 칭한 시점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6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기본적으로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뒤의 4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병패여산도(兵敗如山倒), 즉 산사태가 난 것처럼 무너져서, 궤불성군(潰不成軍), 궤멸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와 의 기록을 보면, 황소는 교.. 2023. 3. 16.
장헌충(張獻忠)의 양자 4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 초근일일(草根一一) 고대의 많은 제왕들은 양자를 거두기 좋아했다. 예를 들어, 이극용(李克用), 주원장(朱元璋)등이 그러했다. 명나라말기 농민정권인 대서정권(大西政權)의 장헌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4명의 양자를 거두었는데, 나중에 이 4명이 운명은 모두 달랐다. 첫째, 진왕(秦王), 의왕(義王) 손가망(孫可望)(?-1660년), 섬서 연장현 사람. 1630년(명 숭정3년), 손가망은 장헌충을 따라 반란에 가담한다. 용맹하고 잘 싸워서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고, 이정국(李定國), 유문수(劉文秀), 애능기(艾能奇)와 함께 장헌충의 양자가 된다. 1646년(순치3년), 청군이 대거 사천으로 쳐들어온다. 장헌충은 봉명산(鳳鳴山)에서 전사하고, 나머지 부대는 손가망과 이정국이 물려받아, 운남, 귀주지.. 2021. 1. 28.
대서군(大西軍) 후기: 장수 손가망, 이정국, 유문수의 관계와 갈등 글: 화운초(和運超) 대서군이 운남(雲南)으로 들어간 후, 남명군(南明軍)과 융합하는 것은 순조롭지 못했다. 원래의 민간농민군이 신분을 바꾸어 남명군이 되는 것에 대하여, 대서군내부에서는 여러가지 갈등이 발생한다. 특히 1인자인 손가망(孫可望)과 2인자인 이정국(李定國)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더욱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용맹한 이정국으로 손가망을 대체하려고까지 한다. 이는 결국 대서군과 남명잔여세력이 서남대국에서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1. 손가망의 야심배후: 연합하지만 귀순하지 않는다. 손가망은 큰형이자 우두머리로서, 처음에는 검국공(黔國公) 목천파(沐天波)와 협력한 것은 기회를 보아 운남귀주를 점거하기 위함이고, 그후에 힘을 모아 다시 사천을 수복할 계획이었다. 순수한 공리적인 마음이었다.. 2020. 7. 15.
청초(淸初)의 체발역복(剃髮易服)과 메이지(明治)의 산발탈도(散髮脫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글: 범인모사(凡人摸史) 어떤 친구가 인터넷에 이런 의문을 올린 바 있다: "왜 청나라초기의 체발역복 얘기를 꺼내면 네티즌들은 의분강개하면서, 현재 서방사회의 헤어스타일은 왜 아무 말없이 받아들이는가?" 이것을 설명하자면 우선 두 마디 말이 필요하다: 새조차도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고, 새장에 갇혀 있기를 원치 않는다. 자유는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의 결론을 이끌어내자면 우리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말은 이것이다: "유두불유발(留頭不留髮), 유발불유두(留髮不留頭)"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을 없애야 하고,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가 잘려야 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현재 청나라 궁정드라마에 나오는 머리.. 2020. 7. 13.
명초 홍무(洪武) 4대사건: 주원장은 왜 그렇게 많은 공신을 죽여야 했을까? 글: 문재봉(文裁縫) 이런 말이 있다. 천하를 얻는 것은 쉽다. 그러나 천하를 다스리기는 어렵다. 주원장은 맨손으로 시작하여 천신만고 끝에 금수강산을 얻었다. 이런 가업은 당연히 자손대대로 이어져 무궁하기를 바란다. 군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안정요소를 제거하여야 한다. 그리고.. 2020. 1. 17.
이자성(李自成)과 청왕조(淸王朝) 누가 누구의 덕을 보았는가? 글: 군무차위면(軍武次位面) 1644년 봄, 이자성은 대순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입하여, 명왕조가 멸망한다. 그러나 겨우 1개월여만에, 이자성은 산해관전투에서 청군에 격패당하여 황급히 북경에서 도망치게 된다. 북경성은 다시 청왕조의 천하로 바뀐다.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 2019. 6. 3.
백문선(白文選): 농민군과 남명의 명장, 그는 왜 청나라에 투항했는가? 글: 제운가(齊雲軻) 백문선은 남명(南明)역사상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대의를 깨닫고 대국을 고려하여, 남명의 통치를 지속시키고, 남명망명정부를 지키는데 걸출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는 왜 마지막에 청나라에 투항했을까? 역사상의 백문선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1. 농.. 2019. 5. 21.
장헌충의 죽음 글: 천애간점역사호(天涯看點歷史號) 장헌충과 이자성은 다같이 명나라말기 농민반란군의 지도자들이다. 다만 역사는 두 사람에 대한 평가를 전혀 다르게 하고 있다. 이자성은 백성들을 고난에서 구원해준 "이틈왕(李闖王)", "틈왕이 오면 양식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여 대중의 환.. 2019.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