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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헌충)

장헌충살인고(张献忠杀人考) (2)

by 중은우시 2024. 1. 15.

글: 장굉걸(张宏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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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충은 처음에는 질서정연하게 시작했지만, 그후 이리저리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다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어 절망하게 된다.

최초의 신선함도 지나가고, 이제는 조정의 사무를 보는 것고 게을러졌다. 그리고 성깔만 부리게 되었다. 어느날 조회를 진행하는데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던 보석을 가득 심은 관이 바닥에 떨어지게 되자, 발로 짓밟아서 엉망진창에 되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다 짓밟아버리고 나서, 곁에 서 있던 시위의 대첨포모를 빼앗아 머리에 썼다. 그리고 큰소리로 우스면서 말했다: "XXX, 어르신은 역시 이걸 쓰는게 편하군!"

그는 갈수록 자신이 병력을 이끌고 사천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라고 후회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사천의 병사들이 유약해서 쉽게 정복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그들은 유약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부러지지는 않았다. 일시에 바람이 불면 풀들이 그렇듯이 엎드리지만, 결국 굴복은 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때, 장헌충의 군대내에서 두 명의 서양선교사를 체포한다. 각각 이탈리아의 Ludovicus Bglio와 포르투갈의 Gabriel Magalleans였다. 그들은 각각 숭정10년과 13년에 중국으로 왔고, 숭정15년부터 사천으로 들어와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장헌충이 불러들여 곁에서 1년여를 같이 지낸다. 장헌충에게서 도망친 후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성교입천기(圣教入川记)>라는 책으로 적어 남겼다. 이는 후세인들에게 고귀한 역사기록이 된다.

두 선교사의 회고에 따르면, 군사적으로 패퇴하면서, 장헌충은 술을 더욱 심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수록 다른 사람의 피를 보면서 자극을 얻었다. 그들은 장헌충이 성깔을 부리는 것을 자주 보았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어느 날, 장헌충의 기분이 좋지 않았고, "장교 3명을 죽이고서 그들의 죄상을 읽었는데, 너희는 좌석에서 큰소리로 떠들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라고 했다. 어느날은 "문관 1명을 죽였는데, 그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정신이 피폐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환관 7명을 죽였는데, 장교들 여럿이 사담을 했는데, 환관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이를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는 참해 마땅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궁안의 남녀이건 대소관료이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교형, 참수형에 처하거나 능지쇄골에 처했다. 신부들의 가까운 친구이자 예부상서인 오계선(吴继善)은 명을 받아 마필을 각군에 나눠주는데, 장헌충에게 명단을 올려서 승인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장헌충의 분노를 사서 혹형을 받고 죽었다. 한 무관은 평소에 장헌충의 총애를 받았는데, 동지에 하늘에 제사지내면서, 장헌충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조문을 읽어, 채찍으로 맞아죽었다. 그리고 또 한 관리는 장헌충에게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간언하다가 중형을 받아 죽었다.

술을 마셔서 우수를 없애고자 하면, 더욱 우수에 빠진다. 장현충의 심정은 계속하여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개별적으로 죽이던 것에서 집단살륙으로 변해간다. 그는 평소에 관료사회의 악습을 극히 미워했고, 심지어 자신이 임명한 문관들에 대하여도 혐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번은 부하대장 손가망이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고, 장헌충의 부하문관들은 명나라관료사회의 관례대로 성밖으로 나가 영접하면서 축하인사를 드리고, '연명장(连名状)"을 올렸다. 장헌충은 그 소식을 듣고 명나라의 누습을 그대로 했다면서 분노하여 200명을 죽여버렸다.

한번은 조그만 잘못으로 인하여, 자신의 부하 300여명 문관을 연루시켜 죽여버린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모두 죽여버리면 누가 일하겠느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문관을 할 사람이 없을까봐 걱정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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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을 수습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장헌충은 부저추신(釜底抽薪)의 계책을 세우게 된다.

비록 그가 과거를 통하여 이미 대부분의 선비들을 도시로 불러들여 엄격히 관리감독하고 있지만, 그래도 빠져나간 인물이 적지 않았다. 전체 사천성이 대란에 빠지자, 이들 서생, 수재들이야말로 가장 큰 불안요소가 되었다.

장헌충은 선비들에 대한 대숙청이 필요하다고 깨닫는다.

1645년 여름, 대서황제 장헌충은 전체 사천에 "선거고시령"을 발포한다. 국가가 처음 건설되어 인재가 필요하니, 전체 사천의 선비들은 일률적으로 성도로 와서 시험에 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지의 군인들에게는 수색하도록 명하고, 백성들에게는 고발하도록 명했다. 만일 시험을 치러 오지 않으면 본인의 전가족은 참수하고, 보고하지 않은 이웃도 연좌되도록 했다.

장헌충이 과거시험을 여는 걸 좋아하는 걸 알고 있는 사천사람들은 이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명령이 내려오자 사람들은 대사황제의 군령은 엄명하다고 여겨 속속 짐을 챙겨 가족, 노비를 이끌고 앞다투어 성도로 가서 대자사(大慈寺)로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간 이후에는 나갈 수가 없었고, 갇혀 있게 된다. 죄수나 다를 바 없었다.

1달후, 각지에서 보고가 올라온다. 선비들을 다 모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헌충은 행동을 개시한다. 이번 '과거'에 참가한 나이어린 시험생 구양직(欧阳直)은 나중에 <촉경록>을 쓰게 되는데 그가 그 대란과정에서 부닥쳤던 여러 상황을 기록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선비들이 다 모인 그날, 대자사의 문에서 성도남문까지 양쪽에는 병사들이 삼중으로 서 있었다. 절의 입구 줄을 매어놓았는데, 땅에서 4자 떨어져 있었다. 장헌충은 직접 출발을 감독했다. 만일 나이가 아직 어려서 키가 4자가 되지 않거나 혹은 장헌충이 마음에 들먼 남겨서 쓰기 위해 한쪽에 서도록 명령하고, 그외에는 모두 출발시켰다.

"그리하여, 선비 1명이 통과하면, 앞에 한 사람이 서서 깃대를 높이 들고 하얀 종이로 깃발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어느 부 어느 주의 생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교관이 앞에 서고, 선비는 노비와 짐을 챙겨서 뒤따랐다. 시험장으로 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성문입구에 이르러, 짐은 내려놓게 하고, 옷을 모두 벗긴다. 그리고 병사 1명이 한명씩 남문교로 끌고가서 벤 다음 강물에 던졌다. 선비들과 노비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여 강물이 빨갛게 되고, 시신이 강물을 막아 10여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 떠내려간다."

이처럼 3일간 '과거'를 치른 후, 10여명의 나이어려서 장헌충이 기용하려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1만7천명은 모두 죽여버린다. 원래 구양직도 도살당할 운명이었지만, 장헌충은 그가 나이어린 것을 보고 남겨서 서기로 쓰게 된다. 장헌충이 봉황산에서 전사할 때 비로소 그는 기회를 보아 도앙친다. 그래서 그의 기록은 믿을만하다.

다음으로 없앨 대상은 "승려, 도사, 의원, 점쟁이, 음양제류, 및 백공기예인"이다 이들은 유민들 중에서 엘리크이다. 그래서 장헌충은 기만수법을 사용하여, "재를 치른다거나 시험을 치른다거나, 토목공사를 한다는 등의 핑계로 불러모아, 모조리 죽였다." 성도성에서만 그가 죽인 화상(스님)이 2천여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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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다 죽여보아도 그다지 큰 작용은 하지 못했다. 각지에서 반란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일어난다. 일단 산간이나 평야지역에서 반란군이 쳐들어오면 성안의 주민들도 안에서 호응하여, 함께 성을 지키는 장헌충군대를 공격했고, 다시 '반란'을 일으킨 그들을 맞이했다.

장헌충은 십여년간 싸우면서 이런 백성은 본 적이 없었다. 각지의 정보를 분석해보니, 각지에서 성을 잃게 된 것은 성안의 인민들이 호응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등의 관건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니 그는 성도의 성내에서도 안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아예 성도성에서 옮겨서, 당초 촉왕이 성밖에 만든 별장인 "중원"에 거처한다.

승상 왕조령은 장헌충의 뜻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한다: "촉민은 사납다고 신이 전에 말씀들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보니 역시 그렇습니다...촉의 사람들은 덕을 베풀어도 감사하지 않고, 위엄에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여러번 다독여도 여러번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는 촉의 사람들이 황상을 배신한 것이지, 황상이 촉의 사람들을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먼저 성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도륙하여....사나운 자들을 제압하는 것이 상책으로 생각됩니다."

장헌충은 그의 말이 맞다고 여긴다. 1645년 십일월, 장헌충은 결정을 내린다. 각지의 도시인구를 몰살시켜서, 철저히 내부에서 호응하는 것을 막기로.

두 명의 선교사는 비교적 상세하게 성도를 도살하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래는 그들의 서술이다:

십일월 이십삼일, 장헌충은 인마를 동원하여, 전장에 나갈 태세를 갖춘다. 그는 먼저 각 군영의 장교를 소집하여, 고도의 기밀을 유지하면서 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전체 성을 소탕하고, 한명도 남기지 않는다."는 명령을 전달한다.

다음 날, 성안의 주민들은 집집마다 수색되어 남문밖의 사패교 옆으로 끌려나온다. "무고한 백성남녀가 피살되고, 부르짖는 소리와 놀란 눈빛이 가득했고, 피가 흘러 강을 이루었다."

도살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헌충은 직접 기마대를 이끌고 남문밖 사패교 옆으로 가서, 직접 도살현장을 목격한다. 백성들은 장헌충이 도착한 것을 보자,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용서해줄 것을 간절히 청했다: '대왕만세! 대왕은 우리들의 왕입니다, 우리들은 당신의 백성입니다. 우리들은 국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왜 무고한 백성을 죽이시려는 겁니까. 우리들은 무기도 없습니다. 법을 지키는 양민입니다. 대왕께서 우리 무고한 어린 백성들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장헌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천인들이 배은망덕하다고 욕했다. 적과 내통하였으니 스스로 죽을 길을 찾은 것이라고. "이어서 말을 몰아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말이 마구 사람들을 짓밟았다. '죽어마땅한 반란자들'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명하여 형을 빠르게 집행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수만의 병사들이 같이 움직였고, 피살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부르짖는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마지막에는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저 성밖의 토지위에는 시신들로 가득찼고, '정적이 감돌았다.' "곳곳이 시신이고, 강은 막혀서, 배를 움직일 수 없었다. 금수용성이 졸지에 광야로 변하여 아무도 거주하지 않게 되었다. 황량하고 참혹한 광경은 말로써 형용할 수가 없었다."

중국사서에서는 선교사들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사항도 기록해 놓았다: 장헌충이 성의 백성들을 도살할 떄, 하늘이 흐리고 비가 내리려 하며, 천둥이 크게 쳤다. 장헌충은 분노하여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나를 인간세상으로 내려보내 사람을 죽이게 하였으면서, 어찌 오늘은 천둥으로 나를 놀라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대포를 하늘을 향해 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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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충에 관련된 사료를 읽을 때면, 시종 크게 경계심을 갖게 된다. 처음에, 장헌충의 잔혹함에 대한 기록에 대하여, 나는 대부분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실제로 평화시기에 아무도 상상할 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상호 확인되는 자료가 갈수록 많아지게 되면서, 나는 부득이 인간성의 가능성에 대한 견해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성도를 피로 물들이기 전후하여, 각지방의 도살도 진행되었다. 간주의 살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원래 간주는 오랫동안 안정된 도시이고, 아무도 거병하거나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십일월초삼일, 장헌충은 성도에서 병사를 보내, 간주성을 사방에서 에워싼다. 그후 성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끌어낸다.

부적길이 <오마선생기년>에서 그때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모든 성내의 주민은 성문밖의 강변 공터로 끌려온다. 그들은 여기에서 공포스러운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일찍, 장헌충군은 북문밖에서 사람을 뽑는다. 부적길은 운이 좋게도 장헌충의 군대에 들어가게 된다.

사람을 고른 후, 나머지 사람들은 이제 장헌충의 군대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래서 죽여버리게 된다. "명령이 떨어져 각 영에 사람을 죽이라고 전한다. 칼소리가 들리면서 살인이 시작된다. 오랫동안 시신이 대패에 가득차고 더 이상 죽일 사람이 없자 칼을 거둔다. 그후 죽은 사람을 끌어서 강에 던진다. 강바닥에 몇겹으로 쌓였는지 알 수가 없다. 성벽아래를 보니 남아있는 시신이 아주 많아서, 도대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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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충이 지배하는 지역내의 각지역 성안사람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그는 다시 교외지역의 촌민들을 강제로 성안으로 이주시킨다. 어쨌던 성안에서 군대를 위해 일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성안을 소탕하고, 다시 사람을 이주시켰지만, 사천각지방은 평정되지 않았다. 청군, 명군, 각지의 재반란군의 공세하에, 장헌충은 연전연패한다. 몇달동안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장헌충은 더 이상 버티질 못했다. 그는 예전의 유적 생활이 그리웠다. 사천을 버리고, 다시 도처를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이렇게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천사람들이 너무나 미웠기 떄문이다. 너희가 나를 반대하지 않았느냐. 그럼 나는 너희를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장헌충은 사천을 도살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유는 "내가 얻은 것을 내가 없애겠다.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하게 하겠다." 사천에서 철수하기 전에, 사천사람을 가능한 모조리 죽여버리고, 적이게 아무도 살지 않는 성을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고금이래 가장 거대한 도살계획이다. 집행도 상당히 확고하게 진행되었다.

도시의 인구를 모조리 죽이기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장헌충은 다시 "제성진초(除城尽剿)"령을 내린다. 군대로 하여금 성을 나가 농촌인구까지 죽이도록 한 것이다. 산골짜기까지 찾아들어가서 한명도 남기지 않았다. "깊은 산속의 동굴속에 숨은 자가 있으면 불을 붙여 연기로 질식시켰다."

영현, 홍아등의 현지에는 모두 자료가 남아 있다. 장헌충이 사천의 여러 지방에서 "제성진초"정책을 집행했다는 것을. 그는 "산과 들에 사는 자는 모두 반역자이니 모조리 없애라. 성안의 양민은 죽음을 면하게 한다."

구체적인 방식은 이러하다: "한 곳을 소탕할 때면, 먼저 지방관에게 사벙의 경계를 정리하게 한다. 그리고 안내자로 하여금 관병을 이끌고 가게 한다. 전날 사방의 경계선을 병력으로 포위하고, 다음날부터 소탕을 시작한다. 사방에서 중앙을 향해 소탕해나간다. 포위망이 좁혀져서 모이는 모습이다." 결과는 어떠한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은 모두 죽인다." "소탕을 마치면 다시 풀과 구덩이를 뒤져서 수일동안 수색하고 다시 명을 기다린다." 이런 엄격한 정책하에, 사천의 각현에서는 14만여명이 죽임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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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거의 다 죽이자, 장헌충은 철수하기 시작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은 그 어느때보다 고향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그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강병전마는 모두 진(섬서)에서 나온다. 큰일을 도모하려면 역시 섬서로 가야 한다."

그러나 이때 다시 공급문제가 나타난다.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나니, 양식을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수십만군대가 먹을 것이 없었다. 어떻게 행군할 것인가? 장헌충은 자신의 부하를 도살하려고 생각한다. 당연히 먼저 포로로 잡은 사천인들부터이다. 그들은 비록 군대에 들어왔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고, 자주 딴 짓을 하곤 했다.

장헌충은 부대를 따라오는 부녀자들도 자신의 행군작전에 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사병을 죽인 후에는 군중의 부녀들을 죽인다. 1646년 그가 성도를 떠날 때, 먼저 자신의 300명 비빈중 280명을 죽이고, 20명만 남겨서 자신을 모시게 한다. 그리고, "각영의 부녀를 한 곳에 모아서 병사들이 둘러싼다. 장헌충은 다시 부대 하나를 시켜 명을 내리고 다 죽여버린다. 참혹한 소리가 하늘과 땅을 진동했다. 부녀들의 시신이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

그리고 사료기재에 따르면, 군량이 부족하여, 장헌충의 군대는 이들 사망자의 시신을 잘라서 염장을 해서 군량으로 삼았다.

깔끔히 정리한 후 장헌충은 부대를 이끌고 떠난다. 개국시에 1천여명에 이르던 문관은 이때 다 죽이고 겨우 25명만 남았다. 병사들의 수도 1/3만 남았다. 그래도 그는 호기로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쪽으로 봉황산에 이르렀을때, 청병을 만나게 된다. 그는 즉시 "말을 타고 군영을 나갔다. 갑옷도 입지 않고, 장창도 들지 않았다. 단창말고 다른 그의 부하도 없었다. 그저 하급병사 7,8명과 환관1명을 데리고 군영을 나가, 만주병의 허실을 알아보았다. 낮은 언덕에 이르러 보고 있을 때 돌연 화살이 날아와서 장헌충의 어깨아래에 박힌다. 왼쪽으로 들어가서 바로 그의 심장을 찌르게 된다. 졸지에 선혈이 흐르고 장헌충은 핏속에서 마구 구르면서 극히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때 장헌충의 나이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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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6년(1667년), 사천순무 장덕지가 사천에 도착한 후 황제에게 보고서를 올린다. 그는 그저 순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관리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사천은 땅은 있지만 사람은 없습니다."; 강희10년, 사천호광총독 육영은 이렇게 말한다: "촉성에는 경작할 밭은 있지만, 밭을 경작할 백성은 없다."(<청성조인황제실록>); 강희22년, 마호(지금의 사천성 병산현)지부 하원준도 이렇게 말한다: "촉의 땅에 백성은 드물다."

강희24년, 인구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전체 성에 겨우 18009정으로 약 9만여명에 불과했다. "전체 촉 수천리내의 인민을 합해도 다른 성의 한개 현의 사람만큼도 되지 않는다."(<사천통지>권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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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역대이래로 폭력신을 숭상하는 전통이 있다.

장헌충이 사천에 있을 때, 한번은 병사를 이끌고 재동현 문창묘를 지나간 적이 있다. 문창군의 성도 장씨라는 것을 듣자, 그 신을 자신의 조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문창묘부근의 백성들은 살려준다. 그가 죽은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인들은 장헌충이 죽이지 않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문창묘에 자발적으로 장헌충의 조각상을 올린다. "녹색 옷에 황금 얼굴, 사나운 모습"이었다. 이를 신으로 모신다. 건륭7년에 이르기까지, "장헌충신상"앞에는 향불이 황성하고, 원근 수십,수백리에서 사람들이 속속 찾아와서 향불을 피웠다.

숭배하는 물결이 너무 지나치자 건륭7년 관청의 주목을 끌게 된다. 현지지방관리는 장헌충신상을 부숴버린다. 그러나, 그 관리가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인들은 다시 장헌충신상을 만들어 다시 모신다. 특히, 일부 지방의 토비나 농민반란군은 장헌충을 더욱 숭배했다. 그들은 출정하기 전에, 이곳으로 와서 장헌충신상 앞에 절을 하고,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빌었다.

장헌충신상이 나중에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350여년이 흘렀지만, 장헌충의 영혼은 중국민족의 정신에 남아 있다. "장헌충숭배"는 이 민족에게는 위험한 병이다. 비록 이미 역사의 손으로 제거되었지만, 철저하게 제거되지 못했고, 언제든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