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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헌충)

장헌충살인고(张献忠杀人考) (1)

by 중은우시 2024. 1. 15.

글: 장굉걸(张宏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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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17년(1644년) 육월 이십일일, 중경 통원문 바깥의 광장에 3만7천명의 명군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110개의 긴 줄로 늘어서서 차례로 앞으로 나아갔고, 그들은 앞에 놓인 나무탁자 위로 오른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놓았다. 나무탁자 앞에 서 있는 사병은 칼을 내리쳤고, 손은 잘려나갔다.

이는 명나라말기 농민군 장헌충의 부대가 포로로 잡은 명군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육월 이십일, 장헌충은 중경성을 함락시킨다. 이는 그가 사천에 들어간 후 거둔 최초의 대승전이었고, 전군은 위에서 아래까지 기뻐 날뛰었다. 장헌충은 특별지시를 내린다. 비록 명군이 완강하게 저항하였지만, '팔대왕(八大王, 장헌충 자신을 가리킴)'은 이번에 관대함을 베풀어 포로들은 한명도 죽이지 않고, 손을 자르는 것으로 끝내겠다.

이들 포로들로서는 다행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요행을 바랐다. 농민군은 분명 오른손을 내밀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왼손을 내밀었다. 칼을 내려치고, 왼손이 잘려나갔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제지당한다: "오른손!"

그리하여 그는 양손을 모두 잃게 된다.

이렇게 손이 잘린 병사들은 성을 나갔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공포를 전염병처럼 사천성의 구석구석에 퍼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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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충, 이자성이 사서에 등장할 때면 항상 앞에 "유적(流贼)"이라는 두 글자를 달고 나타난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결론내린 바 있다: "장헌충 등은 섬서 연안부에서 난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각 성으로 만연해 갔다. 그들은 집이 보이면 가서 먹고, 계속 돌아다녔다. 어느 성읍을 소굴로 삼아서 지낸 적이 없다. 그래서 '유적'이라고 부른다."

숭정3년에서 17년까지, 장헌충은 14년간 명실상부한 "유적"의 생애를 보낸다. 14년간, 장헌충의 부대는 섬서, 산서, 하남, 안휘, 사천, 호광등 여러 성을 오가면서 빠르게 움직였고, 만리이상을 종횡하며, 계속하여 공격하고, 도망쳤다. 한번도 어느 한 지방을 고수한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장헌충과 함께 싸워온 나여재(罗汝才)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는 천하를 횡행하는게 통쾌하다. 왜 땅에 집착하겠는가?"

숭정16년(1643년) 십일월, 장헌충은 하남의 전체성과 강서 일부를 점령한다. 이는 그때까지 농민군에게 있어서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한 것이었다. 이치대로라면 그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서 패업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이자성은 이미 북중국을 휩쓸고 있었고, 북경도 곧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어서, 통일제국의 대세가 확연했다. 장헌충은 이자성에게 고개를 숙이고 칭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자성의 군대와 접경한 지역은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자성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장래를 기약하고자 한다.

천하에서 방어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곳을 꼽자면 당연히 촉(사천)이 첫손에 꼽힌다. 장헌충은 결단이 빠른 사람이다. 숭정17년봄, 그는 전군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잠시 파촉을 근거지로 삼고, 그후 군대를 일으켜 천하를 평정"할 준비를 한다. 그리하여 육월 이십일 중경성을 함락시키는 일막이 나타난 것이다.

10여년의 활동으로 장헌충 부대의 명성은 이미 거의 중국절반의 지역에 퍼져 있었다. "팔대왕"이라는 세 글자는 공포의 대명사로 널리 퍼지게 된다. 이러한 거대한 공포의 압박 속에서 장헌충은 팔월 초구일 깔끔하게 성도성을 함락시킨다.

3.

성도성을 함락시킨 후, 부분적인 살륙은 당연히 피할 수 없었다. 관례대로, 성도성안의 왕공귀족의 대부분은 죽음을 면할 수 없었고, 대소관료들도 많이 죽임을 당했다. 사서에는 충실하게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보통백성들이 집단살륙당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성이 함락된 후 삼일째 되는 날, 장헌충은 일찌기 "성안의 군인, 민간인 남녀를 모두 성밖의 중원으로 쫓아내 모아서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늘에 갑자기 오색구름이 나타나는데, 용이 꼬리를 내린 것같은 모습이었다. 장헌충은 이를 상서로운 것으로 보고, 죽이지 않았다."(<촉난서략>)

이 기재는 좀 기이하다. 어쨌든 장헌충이 성도의 주민들을 대량도살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사천의 각지에서도 사람들이 소문으로 들은 것처럼 장헌충이 나타나면 반드시 대살륙, 대약탈이 일아난다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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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유적" 장현충은 목표를 바꾼 것이다. '유적'에서 '건국자'로 바뀔 생각이었다.

사천에 진입한 후, 장헌충은 사천으로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사천의 병사들은 유약했다. 이번에 중경을 함락시키고, 성도를 점령하고, 병력을 보내어 각 부, 주, 현과 토사를 휩쓰는데, 대부분 이름만 듣고도 바로 항복했다. "주현은 압다투어 창고를 봉쇄하고 장헌충의 명을 기다렸다." 짧은 1년내에 준의(당시에는 사천성에 속해 있었음)와 몇곳의 변방 토사를 제외하고 전체 사천지역은 모조리 장헌충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1644년 십일월 십육일, 장헌충은 성도에서 정식으로 건국한다. 국호는 대서(大西)로 하고, 연호는 대순(大顺)으로 한다. 그는 스스로를 "대서왕"이라고 칭한다.

성도성에서는 토목공사가 시작된다. 촉왕부에 대하여 대규모의 수리와 장식을 시작하여 신왕조의 왕궁으로 삼는다. 정전을 승천전으로 부르고, 문밖의 외랑을 조방으로 삼아 용과 봉황을 조각한다. 좌우승상, 육부상서를 임명하고, 의자(义子) 4명에게 장군의 칭호를 내린다. 장헌충은 새로운 옷과 모자를 갖추고, 승천전에 앉아서, 문무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장헌충은 수염을 쓸면서 크게 웃는다: "일어나시오. 여러분들. 그럴 듯하오!!!"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는 한편, 장헌충은 붙잡아온 여자들중 300명을 뽑아서 비로 삼고 후궁에 둔다. 그리고 아이들중 여럿을 거세하여 환관으로 만든다. 이어서 역대황제를 본받아 사람들에게 '공피어휘(恭避御讳)'하게 한다. 즉, '헌'자와 '충'자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를 어기면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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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거행되고나서, 후비, 환관, 명휘등 그들이 알고 있는 황제가 해야할 일들은 모두 처리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나라를 세웠으면 다스려야 할 것이 아닌가?

말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장헌충은 스스로를 무부(武夫)라고 칭하길 좋아했고, 행동거지가 거칠었다. 칭왕이후에도 조서에는 여전히 백화문을 썼다. 다만, 장헌충은 선비들에 대하여는 매우 존중했다. 심지어 1년에 과거를 2번 거행하기도 했다. 장헌충은 명을 내려 모든 선비들은 과거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고, 만일 도피하면 본인이 처벌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웃까지도 연좌된다고 하였다.

그는 장원을 한 장대수(张大受)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의표가 당당했다. 그래서 장헌충은 그를 보자마자 크게 기뻐하면서 하사품을 푸짐하게 내리고 연회도 베푼다. 대신들은 장헌충이 인재를 얻었다고 칭찬했다. 장래 이 나라는 반드시 "잘 보좌받을 것이니, 국운이 창성하여, 만년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장헌충은 아주 기뻐하면서 장대수에게 "미녀 10명을 다시 내리고, 저택을 하사하며, 가노 이십명을 준다."

다음 날, 장대수가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입조한다. 그가 왔다고 장헌충에게 알리자, 장헌충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한다: "이 자는 내가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게 겁난다. 그를 처치해서 다시는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하라.

" 대신은 명을 받고 궁문에서 장대수를 묶어서 죽여버린다.

6.

건국초기, 대서정권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치안이었다.

장헌충은 당연히 자신의 통치기초가 박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역대통치자들이 써왔던 무수한 통치술 중에서 가장 악랄한 세 가지였다: 하나는 경찰관제, 하나는 폭력진압, 하나는 특무통치이다.

수도인 성도성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장헌충은 더욱 가혹한 규정을 둔다:

수도 성도의 네 개 성문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 성안의 사람이 성을 나가려면 반드시 먼저 병마사에게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신청자는 누가 어디로 갈 것이라는 점, 이웃은 누구라는 점, 누가 담보한다는 점, 어느날 성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적어야 한다. 만일 기한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좌우이웃과 담보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일가족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조리 죽인다. 성밖의 사람이 성안으로 들어와서 일을 보려고 하면 왼쪽얼굴에 인장을 찍어야 한다. 성을 나갈 때, 만일 인장이 땀에 씻겨나가거나, 실수로 닦아내서 분명하게 보이지 않으면 즉시 참수한다.

이와 동시에 장헌충은 특무통치를 대거 시행한다. 그는 대량의 병사를 보내어 백성으로 변장하게 하고 길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니게 했다. 사람들의 말을 엿듣는 것이다. 만일 신왕조를 비방하는 말을 하게 되면 즉시 붙잡아서 치죄했다. "그리하여 비록 아주 가까운 사람을 길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안부인사를 하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서로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촉경록>). 하루는 밤에 한 남자가 집안에서 마누라와 이웃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 "날이 이렇게 늦었으니 빨리 잠이나 자라. 장씨가 낫니, 이씨가 못하니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냐."

다음 날, 그 남자는 체포된다. 장헌충은 보고를 듣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크게 웃었다: "이 자가 말한 것은 내(장가) 낫고, 이자성이 못하다는 것이 아니냐. 괜찮다. 양민이니 풀어줘라!"

7.

장헌충이 직면한 두번째 심각한 문제는 먹는 문제였다. 처음에 그는 관청과 귀족의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에 충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장기적인 대책이 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자 돈을 다 써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경제조치에서는 "타량(打粮)"만 남게 된다. '타량'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강탈'하는 것이다. 병사들이 국가내에서 마음대로 강탈하도록 하는 것이다. "헌적(장헌충)은 매오일, 십일이면 사람을 보내어 양식을 구해오게 했다. 만일 한 사람이 군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지휘관은 소박피(두 어깨의 피부를 벗기고 친척들에게 먹을 거리를 주지 못하게 하며, 교외로 쫓아낸다. 그리고 민간에서 숨겨주지 못하게 했다. 많은 경우 묘지에서 한달여간 지내다가 죽는다) 당하고, 동료는 모두 참했다."

장헌충의 병마는 양식만 보면 빼앗았고, 돼지만 보면 잡아먹었고, 사람만 보면 묶었다. 묶어서 불에 태웠다. 그들을 핍박하여 양식을 숨긴 곳을 찾아냈다. 길거리에서 쌀을 가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사람을 죽이고 쌀을 빼앗았다."

이런 통치하에서, 백성들이 이런 정권을 옹호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했다.

8.

대서왕조가 건립된 다음 해, 군사상 패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1645년 봄, 명나라장수 증영이 사천의 동부 방어선을 돌파하여 사천으로 진입해 중경을 점령한다. 얼마 후, 명나라장수들이 전후로 사천의 동부와 남부의 기강, 의빈등 중요도시를 점령하고, 점차 사천서부의 평원으로 잠식해 들어온다.

장헌충이 직면한 것은 명나라 정규군의 공격만이 아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가 인민전쟁의 진흙탕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장헌충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사천각지에서는 원래 지방토호와 지방관리들의 영도하에 속속 반기를 든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관군에 가담한다. <촉경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증영이 중경에 이르러, 병력을 강위에 주둔시켰다. 난민들을 모았는데, 배가 백리에 이르러 깃발이 온 강을 뒤덮었다." 명군의 세력이 급속히 강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