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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74

장헌충살인고(张献忠杀人考) (1) 글: 장굉걸(张宏杰) ​ 1 ​ 숭정17년(1644년) 육월 이십일일, 중경 통원문 바깥의 광장에 3만7천명의 명군이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110개의 긴 줄로 늘어서서 차례로 앞으로 나아갔고, 그들은 앞에 놓인 나무탁자 위로 오른손을 내밀어 탁자 위에 놓았다. 나무탁자 앞에 서 있는 사병은 칼을 내리쳤고, 손은 잘려나갔다. ​ 이는 명나라말기 농민군 장헌충의 부대가 포로로 잡은 명군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육월 이십일, 장헌충은 중경성을 함락시킨다. 이는 그가 사천에 들어간 후 거둔 최초의 대승전이었고, 전군은 위에서 아래까지 기뻐 날뛰었다. 장헌충은 특별지시를 내린다. 비록 명군이 완강하게 저항하였지만, '팔대왕(八大王, 장헌충 자신을 가리킴)'은 이번에 관대함을 베풀어 포로들은 한명도 죽이지 않고, .. 2024. 1. 15.
이자성(李自成)의 세 명의 부인: 왜 2명은 바람이 났을까? 글: 유노사(劉老師) 명나라말기의 역사를 얘기하자면, 이자성은 반드시 언급해야할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자성과 그의 대순(大順)정권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의 처첩에 대하여는 논의가 비교적 적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주로 관방사료에 이들 여자들에 대한 기록이 적고, 그녀들에 대한 사적은 대다수가 , 등 비관방사료와 지방지에 나온다. 오늘 우리가 얘기할 것은 바로 이자성의 세 명의 처, 한씨(韓氏), 형씨(邢氏)와 고씨(高氏)이다. 1. 한금아(韓金兒): 비록 용모가 출중했지만, 부도(婦道)를 지키지 않아, 나중에 이자성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자성의 첫번째 부인 한금아에 대하여 관방사료에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극히 적다. 심지어 어떤 사료에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 , , 등 비관.. 2023. 10. 10.
왕보신(王輔臣): 일생동안 7번의 배신, 강희제에 투항한 후 왜 자결하였을까? 글: 진단설(震旦說) 스승이 어떤지에 따라, 닮은 제자가 나온다고 한다. 오삼계(吳三桂), 강양(姜瓖)이 왕보신에게 끼친 영향은 기실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삼계는 처음에 명나라의 장수였다. 이자성(李自成)이 경성에 진입한 후, 그는 이자성에게 귀순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자성이 그의 가산을 몰수하자, 다시 이자성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귀순한다. 청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다시 운남에서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계속하여 배반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왕보신은 원래 농민군 출신이다. 고영상(高迎祥), 이자성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여, 자형을 죽여버린 후, 명나라의 대동총독(大同總督) 강양(姜瓖)에 투항한다. 이자성이 경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강양은 투항을 선택하여, 왕보.. 2023. 6. 23.
황소(黃巢)는 왜 실패했는가?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의종(唐懿宗)은 황음사치(荒淫奢侈)하고, 지취금미(紙醉金迷)하며, 환관이 권력을 농단하고 ,번진이 지방에 할거했으며,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각지에서는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결국 대규모의 황소의 난(黃巢起義)이 일어난다. 황소는 875년에 거사하여, 884년 죽을 때까지 전후로 10년간 활약했다. 이 십년간은 881년 황소가 장안에서 황제를 칭한 시점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6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기본적으로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뒤의 4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병패여산도(兵敗如山倒), 즉 산사태가 난 것처럼 무너져서, 궤불성군(潰不成軍), 궤멸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와 의 기록을 보면, 황소는 교.. 2023. 3. 16.
역사미스테리: 이자성(李自成)의 죽음 글: 이보림(李保林) 명나라말기, 이자성이 이끄는 농만군은 270여년간 이어지던 명왕조를 무너뜨린다. 다만 북경에서 겨우 49일간 머물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남겼다. 특히 이자성의 사인(死因)은 몇세기의 논쟁을 거쳤지만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그 원인은 주로 이자성이 죽을 때는 전쟁이 한창중이며, 대순군이 청군에 쫓겨 사방으로 도망쳐 다니면서 궤멸한 비상시기였고, 게다가 관방사서 및 일부 사적에 기록된 이자성의 사인은 믿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이자성의 사인은 수수께끼가 되고 복잡다단하게 되었다. 1 이자성의 사인에 관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의 기록일 것이다: 순치2년 구월, 이자성은 패배하여 호북(湖北) 통성(通城)의 구궁산(九宮山)으로 물러난다. "스스로 20기.. 2023. 3. 3.
명나라 멸망직전에 발생한 2건의 괴이한 사건 글: 흔몽경성(昕夢傾城) 철학적으로 이런 말이 있다: "새로운 사물이 반드시 오래된 사물을 대체한다" 이 진리는 고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처음부터 강성하기 그지없고, 발군이었던 왕조도 백년이 지난 후에는 결국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결국은 다른 왕조로 쉽게 교체되곤 한다.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국황제 주원장은 비록 글도 몰랐지만, 여전히 국가를 조리있게 다스렸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나라를 고스란히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주고 만다. 주원장이 만일 자신의 후손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분명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기실 우리가 역사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의 24시간동안, 조금 노력을 했더라면, 전기가 마련될 수도 있었을 것같다. 그러나, 두 가지 괴.. 2022. 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