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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융기43

중국역사상의 태상황(太上皇) (2) 글: 장명양(張明揚) 당나라는 '태상황'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모두 4명의 태상황이 출현한다. 만일 이전 북조의 '태상황'은 모두 난세에 나타난 괴이한 산물이라면, 당나라의 몇명 '태상황'은 모두 성세지군이고, '정관지치'와 '개원성세'라는 두 번의 태평성대에 걸쳐 있다. 그리고 안사의 난을 평정한 중흥시대도 있다. 그러나 황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잔혹함은 도검이 난무하던 난세에 전혀 못지 않았다. 단지 태평성세시대의 권력쟁탈모델은 더욱 음성적이고 더욱 미묘하며 더욱 힘겨루기식이었다는 것뿐이다. 황권은 곡중구(曲中求)해야지 직중취(直中取)해서는 안된다. 이연(李淵) vs 이세민(李世民)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만들었던 이연은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9년후인 626년, 그도 핍박받아 '태상황'이.. 2023. 5. 1.
무측천(武則天) 사후, 무씨일족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글: 심근배조(尋根拜祖) 무씨일족은 원래 후손이 번성한 부유한 상인가족이었다. 무측천이 황후에 오른 후, 무씨일족은 계견승천(鷄犬昇天)한다. 무측천이 사망하면서(705년), 무씨일족은 모래사장에서 벌거벗고 수영하는 사람들처럼 '바닷물의 엄호를 잃은 그들은 즉시 사람들의 표적이 된다' 한때 무씨일족은 작점짐소(雀占鴆巢)하여 이당(李唐)강산을 찬탈한다. 그후 십여년에 걸친 '용상보위전'에서 이당종실을 포함하여 수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렇다면, 죄괴화수(罪魁禍首)인 무씨일족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씨가족의 족보도를 보면, 무측천의 부친대는 형제가 4명이다. 즉 무사릉(武士棱), 무사일(武士逸), 무사양(武士讓), 무사확(武士彠)이다. 그중 무사확이 무측천의 부친이다. 우리는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2022. 8. 29.
상관완아(上官婉兒)의 묘지명(墓誌銘): 드러난 역사의 진실 글: 오붕(吳鵬) 2022년 4월 28일, 당나라의 상관완아묘지명이 섬서고고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일반대중에게 전시되기 시작했다. "건괵재상(巾幗宰相)"이라고 불리던 상관완아의 신세내력은 수수께끼로 휩싸여 있으나, 재주와 학문은 남자들에 못지 않았고, 운명은 기구했다. 그녀의 조부인 상관의(上官儀)는 무측천을 축출하려다가 죽임을 당했으나, 그녀는 무측천의 심복이 된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이당황실의 편에 섰으나, 오히려 당시 임치왕(臨淄王)이던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에게 피살당한다. 전통적인 정사와 세상에 전해져 내려오는 야사에서 상관완아의 본모습은 가려져 있었다. 새로 출토된 묘지명은 아마도 상관완아에 대한 이미지를 역사에 가깝게 환원시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성참정의 역사적 진전을 이루었고, .. 2022. 5. 24.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는 왜 태자 이영(李瑛)을 죽였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자고이래로 황제의 후궁은 투쟁지수가 아주 높은 곳이다. 역사의 안개를 걷어내면 당현종 이융기가 하루에 친아들 3명을 죽여버린 심층적인 원인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이익이 관련되어 있다. 내 고기를 건드리면 가까운 자라도 죽여버린다!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고,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재수없는 세 아들이 돌연 멸정지재(滅頂之災)를 당한 것을 자세히 파악하려면, 역시 그들 부모의 사적인 관계가 좋은지 아닌지 그리고 조정의 각종 이익집단의 힘겨루기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독립적인 사건은 아니다. 감정과 정치투쟁이 가열된 결과이다. 이 세계에는 확실히 아무런 이유없는 사랑은 없다. 또한 아무런 이유없는 원한도 없다. 위인의 명언.. 2022. 1. 4.
마외역(馬嵬驛)의 수수께끼: 진현례(陳玄禮)는 당현종의 사람인가, 태자 이형(李亨)의 사람인가? 글: 화운초(和運超) 고선지(高仙芝), 봉상청(封常淸) 두 명장이 사리분별못하고 충동적인 당현종 이융기(李隆基)에 의해 사사된 후, 유일하게 황제가 떠올린 노장은 이전에 하서(河西)와 농우(隴右)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바 있는 가서한(哥舒翰)이었다. 그러나, 우선 나이가 아주 많고, 다음으로 병을 앓고 있어서 사서에는 특별히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가서한이 출정할 때 병세가 다시 위중해져서 업무를 처리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심복인 왕사례(王思禮)는 일처리가 너무 과격해서 업무를 또 다른 신임하는 부하인 전량구(田良丘)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했다. 전량구는 명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감히 독단적으로 처리하지는 못했다. 부하들을 따르게 하기 위해 왕사례로 하여금 기병(騎兵)을 맡게 하고, 이승광(李承光)으로 하여.. 2021. 12. 11.
당중종(唐中宗) 이현(李顯): 4명의 여자들 손아귀에 쥐어지낸 황제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당나라때의 황제들 중에서 이현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인물이다. 범문란(范文瀾) 선생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당중종은 당고종보다 더욱 유약하다. 이 말을 보면 범문란 선생은 이현도 무시했지만, 이치(李治, 당고종)도 멸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현은 후세인들이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황제일 뿐아니라, 부친, 동생, 아들, 조카가 모두 황제이다. 더더욱 불가사의하게도 그의 모친 또한 황제이다. 바로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이다. 아마도 이런 인물은 역사상 유일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부친과 동생 이단(李旦)도 역시 '육미지황환'이라고 말한다. 다만 만일 당나라 황제세계표를 본다면, 그가 이런 칭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 2021. 5. 24.
태평공주(太平公主): 지나친 사랑은 사람을 망친다.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공주당년욕점춘(公主當年欲占春) 예전에 태평공주는 봄날까지도 독차지하고 싶어했지. 고장대사압성갑(故將臺榭壓城閘) 그래서 넓은 땅을 차지해서 온갖 건물을 지었고, 장안성을 압도했다. 욕지전면화다소(欲知前面花多少) 지금까지도 꽃을 보면서 왔는데, 앞으로 얼마나 먼데까지 꽃으로 뒤덥혀 있을까 직도남산불속인(直到南山不屬人) 종남산에 이를 때까지 이 땅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모두 태평공주의 땅이다 태평공주를 묘사한 시 중에서 한유(韓愈)의 이 시는 가장 유명한 것일 것이다. 시가 비록 짧지만, 이 여인이 점유한 땅이 얼마나 넓은지, 그녀가 지은 정자 누각이 얼마나 장관인지, '욕점춘'이라는 세 글자로 다 표시했다. 그녀의 광망한 심리상태와 사치와 허영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몇 마.. 2020. 7. 15.
우림군(羽林軍): 당나라 궁중정변의 결정적 요소 글: 엽서도(獵書徒) 우림군은 중국고대에 가장 유명하고 역사가 오래된 황제의 금군(禁軍)이다. 처음 나타난 것은 서한(西漢)시기이다. '우림'이라는 것은 "위국우익(爲國羽翼), 여림지성(如林之盛)"(나라를 위한 날개가 되어, 숲처럼 무성하라)의 의미라고 한다. 당고조때 당나라는 궁성의 이북에 주둔하며 황제와 황실을 보위하는 것을 주요 직책으로 하는 황제의 사병을 창설했다. 즉, 북위금군(北衛禁軍)인데, 국가의 군대인 남아부병(南衙府兵)에 상대되는 것이다. 그후 당태종, 당고종 양대에 걸쳐 계속 변화하며, 최종적으로 '북위금군'에서 정예부대가 독립하게 되는데, '좌우우림군'이라 명명된다. 우림군은 황제의 개인적 호위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황실과 궁정의 안전을 보장하는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또한 황제.. 2020. 5. 4.
당현종은 왜 고선지(高仙芝)를 참형에 처했는가?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안록산의 말발굽이 남하하여 기세등등하게 당나라의 양경(兩京)인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으로 몰려들었다. 천하가 태평성세를 오래 누렸고, 곳곳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이런 시기에 전투라는 것은 아주 낯선 단어가 되어 있었다. .. 2019. 12. 13.
포스트 무측천시대의 여성정치참여현상 글: 정아여(鄭雅如) 705년 2월, 여황 무측천(武則天)이 병이 들어 상양궁(上陽宮)에 드러누웠다. 재신(宰臣) 장간지(張柬之)등은 그 기회를 틈타 여황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쥐고 있던 장역지(張易之) 형제를 주살하고, 여황을 퇴위하도록 핍박하여 태상황(太上皇)으로 밀어내고, 황태자를 .. 2019.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