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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상관완아(上官婉兒)의 묘지명(墓誌銘): 드러난 역사의 진실

by 중은우시 2022. 5. 24.

글: 오붕(吳鵬)

상관완아묘지명

 

2022년 4월 28일, 당나라의 상관완아묘지명이 섬서고고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일반대중에게 전시되기 시작했다. "건괵재상(巾幗宰相)"이라고 불리던 상관완아의 신세내력은 수수께끼로 휩싸여 있으나, 재주와 학문은 남자들에 못지 않았고, 운명은 기구했다. 그녀의 조부인 상관의(上官儀)는 무측천을 축출하려다가 죽임을 당했으나, 그녀는 무측천의 심복이 된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이당황실의 편에 섰으나, 오히려 당시 임치왕(臨淄王)이던 당현종(唐玄宗) 이융기(李隆基)에게 피살당한다.

 

전통적인 정사와 세상에 전해져 내려오는 야사에서 상관완아의 본모습은 가려져 있었다. 새로 출토된 묘지명은 아마도 상관완아에 대한 이미지를 역사에 가깝게 환원시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성참정의 역사적 진전을 이루었고, 신룡정변을 도우다.

 

당고종 인덕원년(664년) 십이월 십삼일, 상관의는 당고종의 폐후조서(廢后詔書)를 초안한 것으로 인하여 피살당한다. 상관완아의 부친 상관정지(上官庭芝)도 함께 처형당한다. 당시 상관완아는 아직 강보에 쌓여 있었고, 모친 정씨(鄭氏)를 따라 액정(掖庭)으로 들어가 노비가 된다.

 

상관가족은 비록 서향문제(書香門第)이지만, 당시의 상관완아는 가정교육을 받을 기회가 아예 없었다. 그녀가 나중에 학문을 배우게 된 것은 모두 궁중에서 받은 교육때문이다. 상관완아는 무측천시대에 지위가 두드러졌고, 당중종시기에 강하게 굴기한다. 그것은 개인의 노력도 있었지만, 궁중의 배양과 역사의 진전때문이기도 하다.

 

중국고대에 황제가 재상과의 조정의사결정권을 놓고 다투는 중요한 경로는 바로 궁중에 내각을 건립하여 황권에 의지하는 내조의 결정을 재상이 주재하는 외조의 결정을 대체하는 것이다. 내조에서 일하는 사람은 많은 경우 황제가 신임하는 남성인사이다. 무측천은 여성의 몸으로 황제에 올랐다. 그리하여 내조의 의사결정하는데 남성인사에 의존하기 불편한 측면이 있었다. 출토된 당나라때 인물 사마신미(司馬愼微)의 묘지명을 보면, 무측은 재초원년(689년) 조서를 내려 천하에 "여사(女史)"를 구한다. 학문과 재능이 있는 여성을 불러서 조서와 칙서의 초안을 맡긴 것이다. 사마신미의 부인 이씨도 이때 입궁하여, 일상문서초안의 행정업무를 맡는다. "묵칙제사(墨勅制詞), 다부인소작(多夫人所作)"

 

재녀를 모집하는 동시에, 무측천은 궁중에서 교육도 실시하여 여성인재를 배양한다. 액정국과 내문학관(內文學館)에 명사를 초빙하여 궁녀와 관노비에게 서법, 산술, 시사가부등의 학문을 가르치게 한다. 궁중교육을 받으면서, 원래 총명했던 상관완아는 바로 학문에서 성취를 거둔다. 그리고 "명습이사(明習吏事), 측천애지(則天愛之)". 금방 무측천의 시야에 들어간다.

 

장안2년(702년) 육월, 이씨는 궁중에서 사망한다. 역사학자 구록명(仇鹿鳴)의 추측에 따르면, 상관완아는 대체로 이때부터 공중의 문서초안임무를 맡았을 것이라고 본다. 나아가 무측천의 신임을 받아, 점차 여관집단의 우두머리로 성장한다. "백사표주(百司表奏), 다령참결(多令參決)"

 

무측천은 말년에 황위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하여, 태자 이현(李顯), 상왕(相王) 이단(李旦), 태평공주간에 권력투쟁이 발생한다. 동시에 무측천은 남총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조팀을 구성한다. 사실상 상관완아가 "백사표주"할 권력을 막았고, 상관완아등 궁중의 여관집단과의 갈등이 점점 심해진다. 신룡원년(705년) 정월, 이현은 장간지(張柬之)등의 종용하에, 동생 상왕, 여동생 태평공주등과 연합하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빼앗는다. 

 

상관완아는 태평공주와 나이가 비슷하고, 함께 궁중에서 자랐다. "공유동벽(共遊東壁), 동연북저(同宴北渚)". 자주 함께 놀고 연회에 참가했다. 가까운 동성친구처럼. 태평공주의 설득으로 상관완아는 여관집단을 정변집단쪽에 서서, 무측천과 외조및 금군의 이상행동에 대한 정보를 막는다. 정월 이십오일, 정변이 발생하고, 태자 이현과 장간지등이 군대를 이끌고, 상관완아의 호응을 받아, 무측천이 거주하는 영선군(迎仙宮)으로 쳐들어가, 장역지, 장창종을 참살하고, 무측천을 핍박하여 퇴위시킨다. 이것이 바로 신룡정변이다.

 

낙양에서 최근에 출토된 신룡연간의 궁중여관묘지명중에서 많은 것에는 모두 "필해제도(弼諧帝道), 복아당업(復我唐業)", "사유당복명(使有唐復命), 아황등극(我皇登極)"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추측해보면, 이들 여관들도 정변에 참가했다. 그녀들의 거동은 분명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관완아가 이끄는 집단행동이었을 것이다.

 

전통사료: 위황후와 결탁하여 정치를 어지럽혔다, 묘지명: 위황후와 격렬하게 투쟁했다.

 

신룡정변후, 이현이 제2차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당중종(唐中宗)이다. 상왕, 태평공주 및 장간지등 정변공신들이 지나치게 황권을 핍박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중종은 한편으로 상왕, 장간지를 압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태평공주와 상관완아의 정치연합을 갈라놓는다. 당중종은 전력을 다해서 상관완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녀의 품계를 재인(才人, 정오품)에서 직접 구빈(九嬪)중 서열2위인 소용(昭容, 정이품)으로 승격시킨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상관완아는 재인, 첩여(婕妤, 정삼품), 소용등의 품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비빈은 아니고, 비빈과 동급의 여관(女官) 관직이다.

 

상관완아의 부친 상관정지는 당중종이 주왕(周王)으로 있을 때의 옛신하이다. 그리고 태평공주와도 잘 지냈다. 그래서 각방세력이 모두 받아들일만한 인물이었다. 당중종은 그녀로 하여금 "전장제명(專掌制命), 익위임지(益委任之)"하고 나아가 "용사어중(用事於中)"하여 궁중의 핵심의사결정권에 진입하게 한다. 당중종은 상관완아를 보내 무측천의 조카 무삼사(武三思)의 파벌을 끌어들이려 한다. 상관완아는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고, 무삼사로 하여금 당중종에 귀부하게 한다. 무삼사의 힘을 빌어 당중종이 상왕, 장간지등 공신들의 공고진주(功高震主)문제를 해결하고, 일정한 정도로 당중종의 황권을 공고히 했다.

 

당중종이 황권을 공고히 한 후, 점차 권력을 무삼사, 위황후, 안락공주등에게 넘겨 처리하게 한다. 안락공주는 당중종과 위황후의 아끼는 딸이면서, 무삼사의 며느리이다. 이 신분은 그녀로 하여금 황태녀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을 불러일으켰다. 태자 이중준(李重俊)은 태자의 지위가 불안정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무삼사, 상관완아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는 경룡정변(景龍政變)을 일으켜, 무삼사를 주살하고 황궁으로 쳐들어가 당중종에게 상관완아를 내놓으라고 핍박한다. 그러나, 상관완아는 당중종을 움직여 이중준을 따라 병변에 참가한 금군의 장병들이 반기를 들게 하여, 성공적으로 정변을 평정한다.

 

상관완아는 정변때 큰 위기를 맞았으나 죽지 않았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은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위황후, 안락공주와 확실하게 선을 긋기 시작한다. 다시 상왕, 태평공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이당황실의 진영으로 돌아간다. 상관완아는 위황후가 "모농국권(侮弄國權), 요동황극(搖動皇極)"하는 것을 보고 안락공주를 황태녀로 삼아 황위를 넘겨주려 하는 것을 본다. 안락공주도 궁중에서 일당을 끌어모으는 것을 보고는 상관완아가 당중종에게 "읍혈극간(泣血極諫), 구심갈성(扣心竭誠), 걸강윤언(乞降綸言), 장제만초(將除蔓草)" 즉,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권력을 제한하도록 극력 간했다.

 

당중종은 상관완아의 주청을 들은 후, 바로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상관완아는 "각사불생(覺事不行), 계무소출(計無所出)"한 것을 보고는 여러가지를 고민한 후에 세 가지 조치를 취한다: 첫째는 "적복이리(擿伏而理)"로 계속하여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대역무도한 언행을 까발린다. 그러나 당중종은 듣지 않는다. 둘째는 "사위이퇴(辭位而退)"로 소용의 관위를 사임하고 민녀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당중종은 허락하지 않는다. 셋째는 "낙발(落髮)"하여 비구니로 출가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당중종이 허용하지 않는다. 상관완아는 어쩔 수 없은 상황하에서 "음짐이사(飮鴆而死)" 즉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여 거의 죽음에 이른다. 당중종은 "그녀의 재주를 아껴서" 어의를 시켜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살려내게 한다. 결국 그녀는 목숨이 살아난다.

 

상관완아의 묘지명에 나오는 이들 기재는 전통사료에서 그녀가 위황후와 결탁하여 정치를 어지럽혔다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묘지명에서 상관완아가 위황후에 격렬하게 대항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한다. 다만 대다수의 사학자들은 묘지명의 기재가 사실이라고 믿는다. 구녹명이 말한 것처럼 "상소를 올리고, 자살을 시도하고, 첩여에서 물러나는 등 이런 기본사실은 날조하기 어렵다"

 

몸이 회복된 후, 상관완아는 다시 상소를 올려 자신의 신분을 첩여로 낮추어달라고 요구한다. 이를 통해 핵심권에서 벗어나 장래의 정치투쟁에서 숙청당하지 않기 위해서. 당중종은 상관완아의 뜻이 강력한 것을 보고, 여러번만에 허락한다. 상관완아는 <경룡문관기>에 의하면, 상관완아는 "자통천후(自通天後), 체경룡전(逮景龍前), 항장신한(恒掌宸翰)"했다고 한다. 그녀가 조서와 칙서를 관장한 시간은 대체로 무측천의 만세통천연간부터 당중종의 경룡연간까지이다. 이를 보면 경룡후기 상관완아는 확실히 더 이상 조칙을 관장하지 않았고, 점차 권력중심에서 물러났다.

 

상왕을 지지했는데, 당륭정변에서 왜 이융기에게 피살당했을까?

 

경룡4년(710년), 육월 초이틀, 당중종이 돌연 붕어한다. 위황후는 비불발상(秘不發喪)하면서 무측천을 본받아 여황으로 등극하고자 한다. 태평공주, 상관완아는 중종의 유조(遺詔)를 초안할 때, 상왕의 보정(輔政)으로 추천하여 위황후를 견제하려 한다. 그러나, 유조가 정식공표되었을 때, 상왕보정의 내용이 삭제된다. 위황후의 야심이 드러난 것이다. 

 

이때 상왕의 셋째아들 임치왕 이융기가 부친을 속이고 고모인 태평공주와 연합하여 상왕을 옹립하면서 당륭정변을 일으켜, 위황후, 안락공주를 주살한다. 정변때, 상관완아는 "집촉수궁인영지(執燭帥宮人迎之)"(촛불을 들고 궁인을 거느리고 맞이한다). 그리고 당중종의 유조 초안을 바친다. 그리고 이융기에게 유조에 상왕보정을 추천한 내용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자신은 이미 이당황실의 편에 섰음을 밝힌다. 다만 이융기는 그녀의 그런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아니라, 상관완아를 참해버린다.

 

어떤 학자는 이융기가 상관완아를 참한 것은 철저히 무측천이래의 여성간정세력을 제거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이것도 확실히 이융기가 생각한 바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깊이 고찰해보면, 이융기는 상관완아를 보면서 고모 태평공주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융기가 당륭정변을 일으킨 목적은 이당황실을 구할 뿐아니라, 더더욱 자신이 황위계승권을 얻기 위함이다. 정변에 성공하면서, 그와 고모 태평공주와의 관계는 동맹에서 경쟁자로 바뀐다. 정변과정의 혼란 속에서 태평공주의 유력한 조력자인 상관완아를 제거한다면 고모인 태평공주의 역량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장래 태평공주와의 힘겨루기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상관완아가 위황후에 반대했든 말든, 상왕보정을 지지헸던 말든, 그녀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태평공주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융기가 반드시 상관완아를 죽여야했던 진정하고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사후 당예종과 태평공주에 의해 후장되고 명예회복되나, 다시 당현종에 의해 묘가 파헤쳐진다.

 

당륭정변후, 상왕이 제2차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당예종이다. 이융기는 이때 금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예종과 태평공주는 어쩔 수 없이 이융기를 황태자로 세운다. 이 시기에 조정에는 당예종, 태평공주와 태자라는 3개의 정치세력이 공존했다. 이융기는 최고황권을 빼앗기 위해, 동궁에 들어가면서부터 고모를 쫓아내고 부친을 핍박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당예종은 태평공주와 연합하여 이융기에 대항한다. 그중의 중요한 수단은 바로 상관완아의 명예회복이다.

 

경운원년(710년) 팔월, 당예종은 조서를 내려 상관완아를 첩여에서 소용으로 추증한다. 태평공주는 돈을 내어 상관완아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묘지명을 쓰게 한다. 거기에는 상관완아가 위황후와 격렬하게 투쟁한 사적을 그대로 기록했다. 근본적으로 당시 사람들과 후세인들의 마음 속에서 상관완아는 위황후의 일당이라는 정치적 이미지를 바꿔버린다.

 

아마도 이융기의 체면을 보아서, 묘지명에 상관완아가 피살된 진실한 상황을 적지는 않았다. 단지 "망신어창졸지제(亡身於倉卒之際)"라고만 적었다. 그러나 태평공주가 사적으로 민간에 광검위하게 이융기가 직접 상관완아를 죽였다는 진상을 퍼트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상관완아의 묘지명에서 쓴 방식은 사람들에게 암시하는 것이다. 이융기는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이익만을 따져서 황실에 공헌이 있는 사람까지도 죽여버렸다고. 이렇게 흑백을 전도시키는 사람은 대당의 태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상관완아는 생전에 천하문사를 평가하는 대권을 갖고 있었고, 문인들의 마음 속에서 정신적 영수였다. 태평공주는 상관완아가 태자에게 피살된 진상을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상관완아의 우정도 천하에 알렸다. 이는 이융기의 명망에 대한 큰 타격이고, 여론상 태자에서 폐출해야한다는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경운2년(711년) 칠월 이십일, 당예종은 조서를 내려 상관완아에게 시호 혜문(惠文)을 내린다. 이는 상관완아의 공적과 재능을 인정하는 것이다. 장열(張說)은 당예종의 지시를 받아 혹은 태평공주의 지시를 받아 <소용상관씨비명(昭容上官氏碑銘)>을 쓴다. 그녀의 이미지를 "문단영수(文壇領首), 천자양보(天子良輔)"로 조성한다. 예를 들어, 육양(陸揚) 선생이 말한 것처럼, "만일 그중 '소용' 두 글자를 바꾼다면 이는 완전히 당나라사람들이 쓴 제국의 재상을 형용하는 내용이다"

 

 

비록 당예종과 태평공주가 상관완아의 명예회복등 정치수단을 써서 극력 이융기를 억누르려 했지만, 결국 그가 통제하는 금군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선천원년(712년), 팔월 초사흘, 당예종은 군국대사의 최종결정권을 보유하는 전제하에서 태상황으로 퇴위하고, 이융기가 등극하니, 그가 바로 당현종이다.

 

얼마 후, 당현종은 금군을 동원하여 태평공주를 죽이고 당예종을 핍박하여 권력을 내놓게 하려는 음모가 폭로된다. 당예종은 당현종으로 하여금 변방을 순시하도록 명한다. 그가 경성을 떠난 틈을 타서, 야전군을 동원하여 그를 폐출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당현종은 명을 따르지 않는다. 선천2년(713년) 칠월, 태평공주는 초나흘 독을 쓰거나 군사정변을 일으켜 당현종을 죽이고자 한다. 칠월 초사흘의 밤에, 미리 그 소식을 알게된 당현종이 먼저 손을 쓴다. 금군을 이끌고 태평공주의 일당을 죽이고, 그후 태상황을 친다. 그리하여 당예종을 핍박하여 당예종은 투신자살까지 생각하게 되고, 태평공주는 자살하도록 한다.

 

당현종은 당예종을 핍박하여 모든 권력을 내놓게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황제에 오른다. 그때부터 상관완아를 청산한다. 명을 내려 그녀의 분묘를 파헤친다. 고고학자들은 상관완아의 묘를 발굴할 때, 묘장이 대규모로 인위적으로 파괴된 흔적을 발견했다. 이는 당현종이 묘를 파헤졌댜는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해준다. 당현종은 관수사서에서 극력 상관완아를 폄훼한다. 그녀가 궁중을 어지럽혔다고 오멸(汚蔑)하고, 고의로 상관완아가 위황후, 안락공주에 대항한 사실을 감추었다. 이를 통해 상관완아는 마땅히 벌을 받을만했다는 점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상관완아를 악마화시키는 것은 당예종과 태평공주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당현종이 미리 등극하고 정변을 통해 권력을 빼앗은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쓰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