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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6

황위쟁탈에 참여하지 않았던 삼아거(三阿哥) 윤지(允祉)는 왜 옹정제에게 죽임을 당했을까? 글: 관첩(關捷) 애신각라. 윤지(1677.3.23.-1732.7.10)는 강희제의 셋째아들이다. 만주황실의 말타기 활쏘기에서 윤지는 24명의 황자들 중에서도 제 일류였다. 강희31년(1692년) 그는 겨우 15살의 나이였는데, 강희제를 따라 사냥을 나섰을 때,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부친과 대결을 벌여서 막상막.. 2018. 12. 21.
[황자쟁위술] 양장피단술(揚長避短術) - 집사광익패(集思廣益牌) 여불위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얘기할 때, 유가, 묵가, 법가, 도가, 농가등 제자백가는 모두 들어맞고 좋은 점도 있지만, 맞지 않고 나쁜 점도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2천여년전에 이미 “사람이 많이 모여있다는 것이 군주의 큰 보물이다”라고 하여 집소성다(集少成多), 중지성.. 2015. 7. 27.
[황자쟁위술] 이퇴위진술(以退爲進術) – 후발제인패(後發制人牌) 이런 말이 있다: “고개내민 새가 총을 맞고(槍打出頭鳥), 솟아나온 나무가 바람에 쓰러지고, (風摧秀林木), 튀어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露頭椽子先腐朽).”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면 위험이나 곤란에 처하는 경우에 혼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휘주를 .. 2015. 7. 27.
옹정제는 왜 연갱요(年羹堯), 융과다(隆科多)를 제거했는가? 글: 일득재주(一得齋主) 연갱오, 융과다는 원래 옹정이 윤사집단을 상대하는 두 개의 칼날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옹정제 즉위후 윤사집단보다 먼저 제거되어 버린다. 도대에 무슨 원인에서였을까? 일부 청사연구자들은 연갱요, 융과다가 "교종불법(驕縱不法, 교만하고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다)"하였다는 것을 유일한 답안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확하다. 그리고 연갱요, 융과다가 제거당한 진상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옹정제는 윤사, 윤당, 윤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약간의 정치적인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그런 조치가 효과를 낼지 말지는 옹정제가 정치적으로 실적을 내느냐마느냐에 달렸다. 연갱요가 청해반란을 평정한 것은 조야에 옹정제가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 2015. 1. 2.
임표는 네번이나 후계자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 글: 노구불로(老九不老) 문혁동안, 모택동은 "포타사령부(砲打司令部,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엄격히 말하면 '소자보'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벽에 붙여지지 않았다)를 써서 일찌감치 공인되었던 후계자인 국가주석 유소기를 끌어내렸다. 그후, 모택동은 일관되게 자신을 따른 임표(林彪)를 후.. 2009. 1. 5.
모택동과 수장(收藏)에 얽힌 이야기 모택동은 일생동안 문방사보, 고서적, 서화, 인장등의 감상과 수장을 좋아했다. 그는 저명한 수장가 및 서화가들과 교분이 있었고,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벼루와 묵합 모택동은 당대의 위대한 시인이다. 일생동안 붓을 즐겨 썼으므로, 벼루(硯)도 평생 곁에 두었다. 그러나, 그가 수장한 것은 단연(端.. 2007.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