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 11

"구자탈적(九子奪嫡)"때, 왜 황십사자(皇十四子) 윤제(胤禵)는 동모형제(同母兄弟)인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를 지지하지 않았을까?

글: 이뢰일(李磊一) 최근 시간이 남아서 다시 한번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강희제(康熙帝) 말년에 발생한 소위 '구자탈적'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 즉, 황위를 서로차지하기 위하여 황자들간의 다툼이 발생한 것이다. 황장자(皇長子) 윤제(胤禔), 폐태자(廢太子) 윤잉(胤礽),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 윤진(나중의 옹정제),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 황구자(皇九子) 윤당(胤禟), 황십자(皇十子) 윤아(胤䄉),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 황십사자 윤제이다. 이들중에서 한쌍의 형제가 아주 특수하다. 그것은 바로 황사자 윤진과 황십사자 윤제로 동모친형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적대진영에 속했다. 이치대로라면 고인들이 항상 말하는 것처럼, "상진친형제(上陣親兄弟),..

옹정제(雍正帝)는 왜 구자탈적(九子奪嫡)후 반대편에 섰던 황십자(皇十子) 윤아(胤䄉)를 관대하게 처리했을까?

글: 사설신어(史說新語)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떄, 강희제의 황자(皇子)들 사이에 황위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역사에서 구자탈적(九子奪嫡)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최종적으로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이 승리하여 황제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옹정제(雍正帝)이다. 구자탈적때, 처음에는 황장자(皇長子) 윤제(胤禔)와 황태자(皇太子, 皇二子) 윤잉(胤礽)간의 명쟁암투였고, 그들이 양패구상(兩敗俱傷)한 후, 나머지 7명의 황자들은 3개의 파로 나뉘어 황위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皇四子) 윤진,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는 황태자의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된다. 그 중 황사자 윤진과 황팔자 윤사간의 투쟁이 격렬했다. 황사자의 편에 섰던 황자로는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 황십육자(..

옹정제(雍正帝)는 왜 아홉째 동생 윤당(允禟)을 죽였을까?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옹정4년(1726년) 팔월 이십칠일, '팔야당(八爺黨)'의 핵심구성원중 하나였던 윤당(胤禟, 나중에 피휘로 允禟으로 개명)은 3개월간 각종 혹형을 받은 후, 보정(保定)의 한 감옥에서 처참하게 죽는다. 이 날은 마침 윤당의 마흔여섯살 생일이었는데, 이제는 그의 기일이 되어 버렸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경성에 전해졌다. 옹정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그저 담담하게 "자복명주(自伏冥誅)"라고 한 마디 했다. 이 말의 뜻은 바로 윤당은 죽어 마땅했고,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의 아홉째 동생인 윤당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옹정제가 그를 그렇게 괴롭혔고, 죽고나서도 전혀 애석해하지 않다니. 이 모든 것은 옹정제가 즉위한 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

강희제의 가장 음험한 아들은 황사자(皇四子)가 아니라 황십사자(皇十四子)였다.

글: 초근일일(草根一一) "아비만큼 아들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知子莫若父)"는 말이 있다. 그러나 궁중에서, 부자간의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은 여전히 궤이막측하다. 예를 들어 구자탈적(九子奪嫡)의 곤경에 빠진 강희제는 죽기 전에야 비로소 몇몇 아들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에서 강남에 수재가 발생한 후, 황태자 윤잉(胤礽)은 여러 폐단을 드러내서 강희제의 불만을 산다. 양자간의 갈등은 갈수록 쌓여가고, 마침내 열하(熱河)를 순수(巡狩)할는 도중에 폭발하게 된다. 강희제는 여러 몽골왕공들 앞에서 황태자는 병들었다고 선언하고, 황태자에게 내렸던 옥여의(玉如意)를 회수하여, 황태자를 폐위시킬 징조를 드러낸다. 북경으로 돌아올 때 황태자 윤잉은 이미 어연(御輦)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신태자를 추천하는 과정에..

건륭제(乾隆帝)의 형제들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건륭제는 중국고대의 유명한 제왕이고, 강건성세를 만든 황제이다. 그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생산을 발전시키며, 인구를 늘였고, 동란을 평정하며 국가의 주권과 이익을 보호했다. 선조들의 기초 위에서 민족의 조화로운 발전을 더욱 공고히 했다.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괜찮은 몊이다. 그렇다면, 건륭제가 즉위한 후,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건륭제의 여러 형제들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그의 부친부터 얘기하기로 하자.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건륭제의 부친은 옹정제이다. 그는 비록 13년간 재위했지만, 완벽하게 강희와 건륭의 사이를 이어주었다. 그는 청나라에서 가장 업적이 많은 황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그가 황위를 부정한 수단으로 얻었다고 말하여..

구자탈적(九子奪嫡)때, 혜비(惠妃)는 왜 친아들인 황장자(皇長子)가 아닌 황팔자(皇八子)를 지지했을까?

글: 취간역사(趣看歷史) 황장자 윤제(胤禔)는 그의 부친 강희제가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인물(蠢材)이었다. 발전가능성이 없는 멍청한 자. 그래서 생모인 헤비도 구자탈적중 할 수 없이 자신이 기른 황팔자 윤사(胤禩)를 지지한 것이다. 황장자 윤제는 구자탈적중 유일하게 옹정제나 건륭제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황자이다. 윤제는 생모인 혜비도 좋아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황실내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윤제는 '구자탈적'중 사후에 유일하게 황제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황자이다. 강희제때 '구자탈적'에 참여한 9명의 황자는 각각 황장자 윤제, 황이자(皇二子)인 폐태자(廢太子) 윤잉(胤礽),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 즉 나중의 옹정제(雍正帝)이고, 황팔자 윤사, 황구자..

옹정은 세 아들을 어떻게 차별했는가?

글: 독력견문(讀歷見聞) 옹정은 강희와 비교했을 때 자식이 훨씬 적다. 그의 생전에 성년이 된 아들은 홍시(弘時), 홍력(弘曆), 홍주(弘晝)의 세 명뿐이다. 이 삼형제가 옹정에게서 받은 부친의 사랑은 천양지차라 할 수 있다. 홍력이 후계자가 된 것을 제외하고, 홍시, 홍주의 두 형제는 모..

[황자쟁위술] 이퇴위진술(以退爲進術) – 후발제인패(後發制人牌)

이런 말이 있다: “고개내민 새가 총을 맞고(槍打出頭鳥), 솟아나온 나무가 바람에 쓰러지고, (風摧秀林木), 튀어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露頭椽子先腐朽).”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면 위험이나 곤란에 처하는 경우에 혼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휘주를 ..

[황자쟁위술] 여론제조술(輿論製造術) – 신화이기패(神話利己牌)

주(周)왕조때부터 군왕이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天子)”로 칭한 후, 황제가 되려는 자들은 스스로 ‘천명(天命)’을 받았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리하여, 진승오광의 난, 백련교의 난, 태평천국의 난과 같은 실패한 혁명에서부터 유방, 징기스칸, 조광윤, 주원장, 누르하치등 각 왕조의 ..

옹정제는 왜 연갱요(年羹堯), 융과다(隆科多)를 제거했는가?

글: 일득재주(一得齋主) 연갱오, 융과다는 원래 옹정이 윤사집단을 상대하는 두 개의 칼날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옹정제 즉위후 윤사집단보다 먼저 제거되어 버린다. 도대에 무슨 원인에서였을까? 일부 청사연구자들은 연갱요, 융과다가 "교종불법(驕縱不法, 교만하고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다)"하였다는 것을 유일한 답안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확하다. 그리고 연갱요, 융과다가 제거당한 진상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옹정제는 윤사, 윤당, 윤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약간의 정치적인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그런 조치가 효과를 낼지 말지는 옹정제가 정치적으로 실적을 내느냐마느냐에 달렸다. 연갱요가 청해반란을 평정한 것은 조야에 옹정제가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