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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8

역사에 기록된 3번의 괄골요상(刮骨療傷) 글: 독사방(讀史坊) <삼국연의>에 관우의 괄골요상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우리에게 관우는 진짜 사나이라는 이미지를 주었다. 화타는 관우를 위해 뼈를 긁어내고, 관우는 한편으로 술을 마시면서 한편으로 바둑을 두었다. 마치 아픔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피가 한 바가.. 2019. 1. 9.
중국역사상 "남경"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도시는...? 글: 한곤(寒鯤) 이전에 '북경'을 소개한 것과 마찬가질, '남경'이라는 명사도 처음에는 어느 소재지구와 관련된 전용지명은 아니었다. 역대왕조의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지구에 설치된 행정색채가 충문한 '행정지명'이었다. 왕왕 '남도(南都)'와 동의어로 쓰였다. 모두 '남방의 경성, 혹은 .. 2018. 7. 15.
제갈량이 조조를 미워하게 된 원인은....? 글: 문재봉(文裁縫) 193년, 제걀량의 나이 12살때이다. 이때 서주(徐州)의 햇볕은 나른했다. 외지의 각종 할거전쟁도 제갈량의 가족에게는 머나먼 일이었다. 다만, 총명한 제갈량은 이때 이미 적지 않은 책을 읽었고, 사회와 인생에 대하여 어느 정도 생각을 갖추고 있었다. 서주의 담담한 .. 2018. 5. 14.
여포의 세가지 이슈: 여포기병의 말은 어디서 조달했을까? 글: 뇌정직(賴正直) 2. 여포가 무슨 방법으로 기병의 군마를 조달했을까? 2-1 여포기병이 직명한 군마수량위기 모두 알고 있다시피, 여포의 부대는 기병으로 전투하는데 뛰어났다. 여포는 병주 오원군 구원현에서 태어났고, 오원군은 장성이북으로, 자고이래로 한인과 흉노가 전투를 벌이.. 2017. 6. 21.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글: 호각조(胡覺照) 2년을 준비한 후, 원래 이엄(李嚴)이나 다른 장수가 맡으려던 남정(南征)업무를 제갈량은 "여러 장수들의 재능이 나만 못하다"는 것을 이유로, 친히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에 대하여, 심복인 왕련(王連) 마저도 상소를 올려 제지한다: "이곳은 불모의 땅이고, 전염병이 .. 2015. 2. 10.
중국은 고대에 왜 구주(九州)라 칭했는가? 글: 오한운(吳閑雲) 중국은 고대에 "구주"라 칭해졌다. 그렇다면 구주는 어디어디인가? 역대이래로 서로 견해가 달랐고, 정설은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르게 나누었기 때문이다. 주류는 대체로 아래의 몇 가지 견해이다: <상서.우공>: 기주(冀州), 곤주(衮州), 청주.. 2013. 2. 4.
동한(東漢) 말기에 천하는 몇 개의 주군(州郡)으로 나뉘었는가? 글: 육기(陸棄) 주(州)는 한(漢)나라때의 검찰구이름이다. 부(部)라고도 한다. 동한때 전국에는 모두 1부13주를 설치한다. 주의 아래에는 군(郡), 국(國)을 둔다. 모든 주에는 자사(刺史) 혹은 주목(州牧) 1명을 둔다. 이들은 속군,속국의 관리와 호협의 불법행위를 순찰하고, 탐관오리.. 2012. 1. 31.
북경의 지명 변천사 1. 유릉(幽陵), 유도(幽都), 유주(幽州) 오늘날 보통 얘기하는 바로는, <<사기, 오제본기>>, <<상서, 우공>>에 현재의 북경지구를 전욱의 시대에는 유릉이라고 부르고, 요(堯)임금시대에는 유도라고 불렀으며, 순(舜)임금시대에는 유주라고 불렀다고 기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 2005.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