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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문원16

"문화대혁명" 명칭에 관한 두 개의 중요개념분석 글: 왕영괴(王永魁) "문화대혁명"이라는 명칭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1966년 5월이전에 그것은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고 불렸다. 1966년 5월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 이후, "사회주의문화대혁명"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혼용되었고, 의미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1966년 8월 중공8기11중전회에서 이 통과된 이후에는 이 운동의 정식명칭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 정리되고,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후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는 명칭은 일부 외국전문을 번역하는 경우에 언급되는 외에 다른 경웅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다. 1. "사회주의문화대혁명"개념의 탄생과 의미 1963년 12월 12일과 1964년 6월 27일, 모택동은 문화계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하여 각각 비시.. 2023. 5. 1.
유경당(劉慶棠)이 본 "사인방(四人幇)" 유경당(劉慶棠) 구술 진도수(陳徒手) 정리 유경당이라는 '발레왕자'는 문혁때 관직이 문화부 부부장, 중공10대 주석단성원, 제4기 전인대 주석단성원에 이른다. 1976년, '사인방'이 타도된 후 즉시 격리조사를 받았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문화부 부부장으로 있던 유경당은 사인방과 밀접하게 접촉했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상사와 부하관계, 동료관계, 친구관계이므로 피차간에 애증이 교차할 것이므로 어느 정도 편향될 수는 있고 완전히 객관적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가 사인방을 이해하는데 조금 다른 측면에서의 인식과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1. 요문원(姚文元): 산양처럼 수염을 길렀다. 유경당의 인상 속에서 요문원.. 2023. 3. 2.
리광만(李光滿)의 대자보는 문혁2.0의 전주곡인가? 글: 건원(乾元) 최근 들어 이름없는 한 극좌파 논객이 쓴 살기등등한 시평 라는 글을 중국의 각 대형매체에서 속속 전재하고 있어, 국내외의 중국미래에 관심을 가진 대소매체, 개인방송들에 의해 이는 문혁2.0으로 향하는 전주곡이 아닌지 주목을 끌고 있다. 그리고 리광만의 이 글을 문혁직전에 요문원(姚文元)이 발표한 는 글이나 혹은 북경대학의 섭원재(聶元梓)의 그 문혁 최초의 대자보에 비유하면서, 산우욕래풍만루(山雨欲來風滿樓)라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살벌한 기운을 느끼고 있고, 중국의 미래에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있다. 리광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앞에서 언급한 요문원이나 섭원재는 어찌 되었건 중국체제내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있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리광만은 기실 아마추어 우마오(五毛)이다. 인.. 2021. 9. 2.
왕홍문(王洪文): 모택동이 세번째로 정한 후계자 글: 왕우군(王友群) 모택동이 정한 첫번째 후계자는 유소기(劉少奇, 류샤오치)이다. 1969년 11월 12일 모택동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죽는다. 두번째 후계자인 임표(林彪, 린뱌오)는 모택동으로부터 연이언 타격을 받은 후 1971년 9월 13일 몽골 원두르칸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다. 그 후, 모택동은 나이가 젊고, 학문이 낮고, 입장이 굳건한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가지 고려 끝에 1973년 모택동은 그의 세번쨰 후계자로 왕홍문(王洪文, 왕홍원)을 고른다. 왕홍문 체포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한다. 1976년 10월 6일 저녁, 모택동이 생전에 지정한 네번째 후계자인 중공중앙 제1부주석 화국봉(華國鋒, 화궈펑)은 중공원수 섭검영(葉劍英, 예젠잉), 중앙판공실주임 왕동흥.. 2021. 6. 22.
요문원(姚文元): 묘비에는 처의 이름만..... 글: 섭영렬(葉英烈) 최근 필자는 상하이 교외지역으로 요문원의 묘를 찾아갔다. 그것은 보통의 묘들 사이에 있었고, 묘비에는 요문원의 이름이 없었으며, 단지 그의 처인 김영(金英)의 이름만 새겨져 있었다. 김영은 1996년 8월 19일 병사한다. 안장때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다. 아무도 이 김.. 2020. 2. 26.
누가 병마용(兵馬俑)의 최초발견자인가? 글: 악남(岳南) 1. 연기(緣起) 1974년 초봄, 섬서성 임동(臨潼) 여산(驪山) 자락에 있는 서양촌(西楊村)은 가뭄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석양의 햇살이 마을 남쪽의 감나무밭을 감싸고 있었다. 오후내내 바쁘게 돌아다니던 서양촌 생산대의 대장 양배언(楊培彦)과 부대장 양문학(楊文學)은 감.. 2019.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