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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동화8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글: 풍현일(馮玄一) 광서제는 청나라의 제11대황제이다. 그의 이름은 애신각라 재첨(載㵇)인데, '첨'자는 물리 조용히 흐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의 성격과는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화상(畵像)을 보면, 그는 문약하고 청수(淸秀)한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준수한 얼굴 .. 2020. 1. 16.
북양수군의 패망: 이홍장(李鴻章)과 옹동화(翁同龢), 누가 원흉인가? 글: 백가잡평(百家雜評) 중국최초의 근대화 해군함대로서, 북양수군은 이 오래된 제국의 무수한 희망을 안고 있었다. 자료를 보면, 북양수군은 주로 전함이 크고 작은 25척이 있었고, 보조군함이 50척 있었으며, 운수선이 30척, 관병이 4천여명 있었다. 당시 세계9위, 동아시아1위의 수준이.. 2019. 5. 12.
서태후의 출생지를 둘러싼 수수께끼 글: 문재봉(文裁縫) (프랑스 주간잡지의 표지에 실린 서태후. 프랑스인이 상상으로 서태후의 모습을 그린 것임) 서태후는 중국을 48년간 통치했던 여인이다. 그녀의 삶에 대하여는 크건 작건 모두 기록이 남아 있다. 이치대로라면 그녀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가 논란이 될 수는 없다. 그러.. 2018. 6. 7.
인삼장원(人蔘狀元) 옹동화(翁同龢) 글: 유계흥(劉繼興) 옹동화는 청나라말기의 역사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 함풍6년(1856년)에 장원급제하여 한림원수찬이 된다. 그후에 동치제, 광서제 두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 형부,공부,호부상서, 협판대학사, 군기대신, 총리각국사무대신등의 직위를 지낸다. 당시의 사람들.. 2014. 6. 23.
양내무소백채(楊乃武小白菜)사건: 청나라말기 정치판의 희생양 글: 재양다길(才讓多吉) "지금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조정에 민원을 제기하여, 조정에서 그 연유를 따져서 원래의 지방관아로 하여금 다시 심리하게 하는 것은, 결국 그 민원인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원래 재판했던 관리들에게 박해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회적으.. 2014. 3. 2.
영년(英年): 청나라말기의 황실풍수대가 글: 포강객(浦江客) 광서24년(1898년) 팔월 초엿새, 서태후는 돌연 정변을 일으켜, 변법을 추진하던 광서제를 영대에 연금시키고, 일체의 행정을 모조리 폐하고, 훈정(訓政)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최고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기실 이전의 광서23년에 대권을 손에서 놓치고 싶어하지 않던 .. 2013. 8. 15.
옹동화(翁同龢)와 손육문(孫毓汶) 글: 유계흥(劉繼興) 옹동화는 청나라말기에 명성이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 함풍6년(1856년)에 장원(狀元)을 했고, 한림원 수찬을 제수받았으며, 동치제, 광서제의 두 황제의 스승을 지낸다. 형부상서, 공부상서, 호부상서, 협판대학사, 군기대신, 총리각국사무대신등의 관직을 지냈.. 2012. 6. 10.
장지동(張之洞): 청나라말기의 풍운인물 글: 월초(越楚) 청나라말기 정계의 풍운인물을 꼽자면, 장지동은 독보적인 인물이다. 장지동이 청나라말기의 관료사회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평보청운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시대를 앞선 생각, 남다른 정치적 업적때문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는 정계에서 항상 가장 중.. 2011. 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