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함12 오함(吳晗): 평생 중공에 충성하였으나, 중공의 감옥에서 죽은 어용학자 글: 진뢰(秦雷) 오함(吳晗)은 청빈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호적(胡適)에게 인정을 받아, 1931년 청화대학 사학과에 합격하고, 1934년 청화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재능이 출중하여 1937년에는 겨우 28살의 나이로 운남대학 교수로 채용된다. 1940년 오함은 서남연대(西南聯大)로 옮겨 교수가 되고 그때부터 공산당과 접촉하게 된다. 오함의 부인 원진(袁震)은 중공원로 동필무(董必武)의 제자이고, 두 사람은 함께 중경으로 가서 동필무를 만난 적도 있다. 1943년 7월, 오함은 곤명(昆明)에서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에 가입하고, 공산당이 조직한 "서남문화연구회"등에서 활동하면서, 완전히 호적의 "독서구국(讀書救國)"론을 포기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 2023. 2. 25. 오함(吳晗): 한 역사학자의 비극 글: 왕우군(王友群) 오함은 에 이렇게 썼다: "그물이 다 펼쳐졌다. 포위망은 점점 줄어들었다. 창응(蒼鷹)은 하늘을 맴돌고, 사냥개(獵犬)는 땅위에서 추격한다. 호각소리가 들리고, 고함소리가 들리고, 매를 부르고 개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미 그물에 걸려든 문인(文人)들은 하나하나 목이 잘리고, 가슴이 깨져 핏물 속에서 신음한다." 이 내용은 1949년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문인들을 대하는 생생한 모습이기도 하다. 오함은 스승을 버리고 중공에 투신한다. 오함은 절강 금화 의오(義烏) 사람이다. 1928년 가을, 상해중국공학(上海中國公學)에 입학하여 호적(胡適)의 제자가 된다. 얼마 후, 호적은 상해를 떠나 북경대학 교장이 된다. 오함도 그를 따라 북상한다. 그러나 북경대학에는 불합격하고, 청화대.. 2020. 10. 17. 호적(胡適)의 천년일탄(千年一嘆) 글: 사상(史翔)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저 결과만 있을 뿐이다. 지금 70년전 장개석의 '창구학인계획(搶救學人計劃)'을 되돌아보면, 확실히 중공의 호구에서 '학인을 구해낸 것'이다. 대륙이 중공에 점령되기 전에 대륙을 떠난 지식인 호적, 부사년(傅斯年), 전목(錢穆)은 여전히 자유사회에서 자유사상을 전승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에 남았던 걸출한 지식인들은 '반우' 문혁'으로 거의 모두 박해를 당했고, 환상을 깨지고, 악몽만 남게 되었다. 1948년 회해전역(淮海戰役)이 시작되었을 때, 국민당군대는 전투에서 불리했다. 장개석은 좋지 못하다고 예감하고, '창구학인계획'을 제정하기 시작한다. 명단에는 모두 국내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걸출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때는 그들 주에 대다수는 의식하지 못했었다.. 2020. 8. 16. 오함(吳唅): 개인의 비극에 그치지 않는다. 글: 관우당주(觀雨堂主) '문혁'을 회고하는 글에서 반드시 언급해야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전 북경시 부시장이자 명사(明史)전문가인 오함이다. 1965년 11월 10일 요문원(姚文元)은 기수 강청(江靑)의 뜻을 받들어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라는 글을 상해 <문.. 2019. 5. 27. "대명(大明)" 국호의 유래에 관한 몇 가지 견해 글: 비객방(痞客邦) 명나라의 국호에 대하여 비교적 일찍 주목한 것은 종교관련자이다. 오함(吳晗)이 1941년에 발표한 <명교와 대명제국>일 것이다. 오함은 '대명'의 국호는 한씨부자의 '명왕(明王)' 즉 <대소명왕출세경(大小明王出世經)>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명교는 당.. 2018. 12. 26. 문혁시기" 홍위병(紅衛兵)"과 "조반파(造反派)" 글: 한운약해(閑雲若海) 문혁을 언급하면 바로 '홍위병' '조반파'와 같은 괴물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 둘을 하나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전히 대립되고 전혀 상반되는 양파이다. 1. 양파는 각각 서로 다른 이익집단에 속해 있다. 진정한 '홍위병'은 바로 '흑자노홍위병(黑字老紅衛兵)".. 2018. 12. 1.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