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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라트13

<해방군보>: 황제와 태상황이 싸울 때는 관망하라? 상령명절불타지(常令名節不墮地) 학계영(郝啓榮) 왕흔(王欣) 명나라때의 명신 우겸(于謙)의 는 이렇게 쓰여 있다: 호화일거난재득(豪華一去難再得) 장기소침토일구(壯氣銷沉土一丘) 단령명절불타지(但令名節不墮地) 신외구구안용구(身外區區安用求) 대체적인 뜻은 부귀는 한번 잃으면 다시 얻기 힘들고, 사람은 뜻을 잃어버리게 되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오직 명절(명성과 절개)을 지켜야하며, 나머지 모든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상령명절불타지.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적인 의미가 있다. 명절은 태산보다 무겁다. 이욕(利慾)은 홍모(鴻毛)보다 가볍다. 우겸은 관직에 여러 해동안 있으면서, 시종 청렴했으며, 명절을 지켰다. 그가 죽은 후에도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토목보의 변"이 발생한 후, 명영종이 .. 2021. 10. 15.
명나라시기 오이라트(瓦剌)는 언제 멸망하였는가?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은 오이라트(瓦剌)의 '가장 휘황했던 시기'이다. 그들은 가볍게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을 포로로 잡았을 뿐아니라, 명나라의 병방요지까지 맹렬하게 진격해 들어갔었다. 만일 우겸(于謙)이 없었더라면 명나라는 그때 멸망했을 것이다. 다만 오이라트의 운은 좋지 못했다. 명나라에 패배하면서 크게 타격을 입었을 뿐아니라, 내부에서 모순이 폭발하여, 스스로 무너진다. 이는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이라트의 역사는 당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민족은 아주 사납다. 하루종일 주변부락과 당나라의 변경을 돌아다녔다. 당나라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오이라트는 죽어도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할 수 없이 그들과 싸워야 했고, 백여년.. 2021. 5. 1.
정난지역(靖難之役)후 주체(朱棣)는 왜 5번이나 몽골정벌에 직접 나섰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정난지역이후, 주체는 성공적으로 조카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으로부터 황제위를 빼앗는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그가 '황위를 찬탈'한 일에 대하여는 그다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그를 '영락대제(永樂大帝)'로 칭송한다. 주체의 주요 공적을 나열해 보자면, 북경천도, 영락대전편수, 정화하서양, 안남수복, 오정막북(五征漠北)이 있다. 특히 5차례에 걸쳐 막북을 친정(親征)한 것은, 후세의 찬양을 받는다. 자고이래 제왕이 직접 정벌에 나서는 일도 많지 않지만, 주체는 역사상 최초로 직접 장성이북을 친정한 황제이기 때문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된 것이다. 주원장이 원왕조를 쫓아낸 후, 몽골통치자의 잔여세력은 완전시 소멸되지 않고, 새외(塞外)로 도망쳐 '북원(北元)'을 건립한다.. 2020. 10. 31.
1690년 울란부통(烏蘭布通) 전투: 유목민족 철기시대의 종말 글: 비상역사(非常歷史) 표질여장풍(驃疾如長風) 시경여경도(矢勁如驚濤) 분습천리지외(奔襲千里之外) 절원주야지경(折轅晝夜之傾) 달리는 건 바람과 같이 빠르고 활쏠 때는 거센파도처럼 힘있고 천리 밖까지 달려가서 기습하고 하룻밤낮에 적군을 무너뜨린다. 이것으 고대 농경민족이 .. 2019. 1. 2.
쇠솥: 명나라와 몽골이 100년전쟁을 벌인 원인 글: 장뢰(張雷) 명나라가 건립된 후, 원나라는 쫓겨나서 몽골초원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소와 말을 기르며, 물과 풀을 찾아다니는 유목생활을 시작한다. 단일한 유목제 경제모델은 몽골인들로 하여금 소, 양, 말을 생산하는 외에 다른 기술은 뛰어나지 못했다. 특히 가정에 필수적인 물품.. 2018. 11. 28.
명왕조 4대총비 (2): 만귀비(萬貴妃) 글: 접련화(蝶戀花) 명나라의 황후는 절대다수가 모두 평민출신이다. 단지 2명의 신분이 고귀했다. 한 명은 주체의 황후인 중산왕 서달(徐達)의 딸인 서씨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명헌종(明憲宗)의 폐후(廢后)인 회녕후(懷寧侯) 손당(孫堂)의 외생녀(外甥女) 오씨(吳氏)이다. 주체와 서황후는.. 2018. 9. 30.
경태제(景泰帝) 주기옥(朱祁鈺)은 황태자를 교체하기 위해 어떻게 하였는가? 글: 두문자(杜文子) 황제가 되면 모두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한다. 경태제 주기옥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사정이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대명에는 이미 황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위는 이러했다. 명영종 주기진(朱祁鎭)이 오이라트와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다. 손.. 2018. 9. 20.
토목보지변(土木堡之變)이후 주기옥(朱祁鈺)은 어떻게 황제로 추대되었는가? 글: 두문자(杜文子) 정통14년 칠월, 대명의 북방 변관에서 긴급한 사태보고가 올라왔다. 오이라트가 침입했다!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은 왕진(王振)의 꼬드김에 넘어가 바로 친정(親征)에 나서게 된다. 명영종은 이렇게 경솔한 결정을 한 것에 대하여 참혹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 .. 2018. 9. 11.
명영종(明英宗) 복수기: 복위후 누구를 죽였는가? 글: 두문자(杜文子) 경태8년 정월, 명영종은 '탈문지변(奪門之變)'을 통하여 복위에 성공한다. 비록 다시 권력의 꼭대기로 되돌아왔지만, 이때의 명영종은 내심이 취약하고 공허했다. 다시 무슨 변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지지자들(탈문공신들)과 상상 속의 '.. 2018. 7. 24.
성화제(成化帝)는 이미 금의위(錦衣衛)와 동창(東廠)이 있는데, 왜 서창(西廠)을 만들었을까? 글: 두문자(杜文子) 성화 13년, 대명은 태감 왕직(汪直)을 우두머리로 하는 특무기구 서창을 만든다. 이전에 이미 금의위와 동창이라는 두 개의 특무기구가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두 기구의 업무능력은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성화제는 다시 힘을 들여 서창을 설립하게 되었을까? 첫.. 2018.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