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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32

왕보신(王輔臣): 일생동안 7번의 배신, 강희제에 투항한 후 왜 자결하였을까? 글: 진단설(震旦說) 스승이 어떤지에 따라, 닮은 제자가 나온다고 한다. 오삼계(吳三桂), 강양(姜瓖)이 왕보신에게 끼친 영향은 기실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삼계는 처음에 명나라의 장수였다. 이자성(李自成)이 경성에 진입한 후, 그는 이자성에게 귀순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자성이 그의 가산을 몰수하자, 다시 이자성을 배반하고 청나라에 귀순한다. 청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다시 운남에서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계속하여 배반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왕보신은 원래 농민군 출신이다. 고영상(高迎祥), 이자성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여, 자형을 죽여버린 후, 명나라의 대동총독(大同總督) 강양(姜瓖)에 투항한다. 이자성이 경성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강양은 투항을 선택하여, 왕보.. 2023. 6. 23.
미얀마는 왜 망명한 남명(南明) 영력제(永歷帝)를 받아주었다가 2년후 청나라에 넘겨주었을까? 글: 자귤(紫橘) 남명의 영력제가 멸망한 가장 관건은 바로 미얀마의 배신이었다. 주수지난(咒水之難)을 일으켜 영력제를 수행하던 신하들이 모조리 피살당하고, 영력제도 생포된다. 곧이어 오삼계(吳三桂)에게 넘겨져서 죽임을 당한다. 이정국(李定國)은 그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같은 달에 병사하고 만다. 대명은 철저히 부흥의 기회를 잃었다. 그렇다면, 미얀마는 왜 영력제를 받아주었다가 다시 그를 팔아먹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청군이 미얀마로 다가오면서 영력제를 내놓으라고 핍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후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고 자부했던 건륭제마저도 미얀마를 공격하여 격패시키지 못했던 것을 보면 미얀마군은 환경적인 우세를 이용하면 청군을 이기지 못한다고 할 수 없었다. 영력제를 돌려보낸 것은 완전히 미얀.. 2022. 7. 18.
장헌충(張獻忠)의 양자 4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글: 초근일일(草根一一) 고대의 많은 제왕들은 양자를 거두기 좋아했다. 예를 들어, 이극용(李克用), 주원장(朱元璋)등이 그러했다. 명나라말기 농민정권인 대서정권(大西政權)의 장헌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4명의 양자를 거두었는데, 나중에 이 4명이 운명은 모두 달랐다. 첫째, 진왕(秦王), 의왕(義王) 손가망(孫可望)(?-1660년), 섬서 연장현 사람. 1630년(명 숭정3년), 손가망은 장헌충을 따라 반란에 가담한다. 용맹하고 잘 싸워서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고, 이정국(李定國), 유문수(劉文秀), 애능기(艾能奇)와 함께 장헌충의 양자가 된다. 1646년(순치3년), 청군이 대거 사천으로 쳐들어온다. 장헌충은 봉명산(鳳鳴山)에서 전사하고, 나머지 부대는 손가망과 이정국이 물려받아, 운남, 귀주지.. 2021. 1. 28.
대서군(大西軍) 후기: 장수 손가망, 이정국, 유문수의 관계와 갈등 글: 화운초(和運超) 대서군이 운남(雲南)으로 들어간 후, 남명군(南明軍)과 융합하는 것은 순조롭지 못했다. 원래의 민간농민군이 신분을 바꾸어 남명군이 되는 것에 대하여, 대서군내부에서는 여러가지 갈등이 발생한다. 특히 1인자인 손가망(孫可望)과 2인자인 이정국(李定國)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더욱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용맹한 이정국으로 손가망을 대체하려고까지 한다. 이는 결국 대서군과 남명잔여세력이 서남대국에서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1. 손가망의 야심배후: 연합하지만 귀순하지 않는다. 손가망은 큰형이자 우두머리로서, 처음에는 검국공(黔國公) 목천파(沐天波)와 협력한 것은 기회를 보아 운남귀주를 점거하기 위함이고, 그후에 힘을 모아 다시 사천을 수복할 계획이었다. 순수한 공리적인 마음이었다.. 2020. 7. 15.
남명(南明)에 기회는 없었을까? 글: 구어정(九魚亭) 주체(朱棣,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예비방안을 마련해 두었다. 북방은 어쨌든 리스크가 큰 곳이다. 그래서 남경에 온전한 행정조직을 보류해둔 것이다. 육부육과(六部六科)를 모두 갖추었다. 남명에 괜찮은 지도자만 있었더라면, 그 효율은 북경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남명이 판세를 뒤집을 기회도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회는 항상 스쳐지나가 버렸다. 송고종이 건염남도(建炎南渡)할 때, 그는 1인황제라 할 수 있었다. 병사도 없고 장수도 없다. 그리고 금나라군대에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그에게서 제왕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조구(趙構)는 결국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점차 역량을 모아서 금나라와 대치한다. 조구는 비교적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가 .. 2020. 6. 26.
명나라말기의 황제들은 무능했지만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글: 문재봉(文裁縫) 북경대학 교수인 양쿠이송(楊奎松)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는 얼마나 죽기를 두려워했는가"라는 글을 쓴 바 있다. 확실히 부의(溥儀)는 무척이나 죽는 것을 겁냈다. 만주국시기 부의는 죽음을 겁내서 매번 일본 관동군의 고위참모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 2020.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