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청나라의 황후들은 곤녕궁(坤寧宮)에 거처하지 않았을까? 글: 역사순간(歷史瞬間) 항간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청나라때 황후가 곤녕궁에 거처하지 않은 것은 망자(亡者)의 회기(晦氣), 즉 죽은 사람의 나쁜 기운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주황후(周皇后)는 이곳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기실 청나라가..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2020.02.26
사진자료: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는 장면 글: 왕남방(王南方) 1924년 11월 5일 오전,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는 부의(溥儀)가 양심전(養心殿)에서 자다가 태감이 부르는 소리에 일어났다. 태감은 그에게 풍옥상(馮玉祥)이 사람을 보내어 궁에서 나가라고 명령했으며, 청나라황실의 인원 전부는 3시간내에 자금성을 떠나라고 했다는 것..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부의) 2019.02.25
자금성(紫禁城) 융종문(隆宗門)의 화살촉(箭頭) 글: 이대취(李大嘴) 북경고궁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간다. 만일 주마간산격으로 여행온 사람이라면 아마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융종문의 편액에는 화살촉이 하나 박혀 있다. 먼저, 우리는 융종문의 위치부터 살펴보자. 융종문은 고궁 건청문(乾淸門) 앞 광장의 서쪽에 동쪽의 경운문(景.. 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2019.01.05
서태후는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을 어떻게 안배했는가?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자희(慈禧), 만주족. 예허나라씨. 안휘 휘냥 지광태도, 증삼등승은공 혜징(惠徵)의 딸. 옥첩(玉牒), 즉 황족족보에 기록된 내용은 이러하다: "예허나라씨. 혜징의 딸" 아명은 난아(蘭兒)이며, 예허나라가족중에서는 그녀가 행아(杏兒)라고 불리웠다. 함풍원년, 즉 1851..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2018.02.19
가경제암살사건 글: 유대화(喩大華) 가경7년 납월(臘月) 중순, 서력으로 하면 1803년 1월초이다. 가경제는 사천총독, 섬감총독, 호광총독의 연명보고서를 받는다: "사천, 섬서, 호북에서 토비역적을 토벌하는 일이 완성되었다." 원래 9년동안 5개성에 세력이 미친 백련교의 난이 진압된 것이다. 이제 천하는 ..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2016.08.23
[황자쟁위술] 투량환주술(偸梁換柱術) 후전황지패(后傳皇旨牌) 서태후편 청나라말기 중국을 반세기동안 통치했던 서태후 예허나라씨(葉赫納拉氏)는 원래 수녀(秀女)선발로 황궁에 들어가 함풍제(咸豊帝)를 모셨다. 그녀는 총명하여 점차 함풍제의 총애를 받는다. 마침 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하마터면 함풍제는 대가 끊어질 뻔한다. 함풍제가 아들을 학수.. 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2015.10.11
"황제의 침실이 10평방미터를 넘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글: 주해빈(周海濱) 최근에 <왜 황제의 침실은 10평방미터를 넘지 않았는가?>라는 글이 널리 알려졌다. 내용은 이렇다. 고대의 풍수이론에는 "집이 크고 사람이 적으면, 흉가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왜냐하면 집이 크면 사람의 기운을 많이 빼앗는데, 한 사람이 큰 집의 공간의 에너지..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2014.03.02
중국고대황제는 후궁을 어떻게 관리했는가? 작자: 미상 중국역대제왕은 후비관리제도를 규정했는데, 대체로 비슷하지만, 각각 차이는 있다. 진(秦)에서 청(淸)까지, 많은 수의 비빈을 맞이한 것은 황제의 음욕을 만족시키면서, 자손을 번성하게 하기 뮈함이다. 그리하여 삼궁육원칠십이비(三宮六院七十二妃)라는 말도 있고, 후궁가.. 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2013.12.08
원세개는 왜 융유태후를 첩으로 삼으려 했는가?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1911년 10월 10일, 국민혁명군이 무창(武昌)의거를 일으킨다. 20일후, 원세개는 청나라정부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다음 해인 1월 25일, 원세개 및 각 북양장령은 전보를 보내어 공화(共和)를 선택한다. 남방혁명정부로부터 대총통의 자리를 보장받은 후, 원세개는 청황..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2013.11.10
암살과 고두: 증국번은 서태후가 심어놓은 인물을 제거했다 글: 유강(劉剛) 이동군(李冬君) 1870년(동치9년), 새로 부임한지 2년도 되지 않은 양강총독(兩江總督) 마신이(馬新貽)가 암살당해 죽었다. 자객이 손을 쓴 곳은 양강총독의 열병장이었다. 그런데 마치 무인지경처럼 양강총독에게 걸어갔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아무도 묻지 않았으며, 자..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증국번) 2013.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