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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부의)

사진자료: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는 장면

by 중은우시 2019. 2. 25.

글: 왕남방(王南方)



1924년  11월 5일 오전,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는 부의(溥儀)가 양심전(養心殿)에서 자다가 태감이 부르는 소리에 일어났다. 태감은 그에게 풍옥상(馮玉祥)이 사람을 보내어 궁에서 나가라고 명령했으며, 청나라황실의 인원 전부는 3시간내에 자금성을 떠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부의는 그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시간을 더 달라고 협의하고, 다른 한편으로 황급히 짐을 쌌다. 위의 사진은 부의가 떠날 때 엉망이 된 침상의 모습이다.



위의 사진은 녹종린(鹿鍾麟)이 황실대표의 안내를 받아 영수궁(永壽宮)을 살펴보는 장면이다. 녹종린은 자가 서백(瑞伯)이고, 서북군 풍욱상의 부하이다. 1924년 북경정변때 군대를 이끌고 북경성에 들어가, 명을 받아 부의를 자금성에서 내보낸다.



짐을 싸는 궁인들



부의가 자금성을 떠난 후, 건천궁(乾淸宮)은 사봉(査封)되어 출입금지된다.



부의는 출궁하기 전에 태감들에게는 1인당 대양(大洋) 10원, 궁녀에게는 1인당 대양 8원을 송별금으로 지급했다. 당시 태감은 470여명이고, 궁녀는 100여명이었다. 장면은 혼란스러웠다. 곡을 하며 우는 사람, 욕하는 사람등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위 사전은 송별금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태감들이 아문 앞에 모여서 항의집회를 하는 장면이다. 



궁에서 쫓겨난 태감, 궁녀들. 풍옥상의 군대는 태감과 궁녀들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먹고 살아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어려서 입궁하여, 아무런 생존능력이 없었다. 출궁은 이들에게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것을 의미했다. 궁녀들은 그대로 나았다. 아무 남자나 붙잡아서 살면 되었다. 가장 재수없게 된 것은 태감들이다. 출궁이후에는 혼자서 외롭게 의지할 사람없이 살아야 한다. 서글픔이 밀려와서 4미터 깊이의 호성하에 몸을 던진 사람도 있었다.



수강궁(壽康宮)의 궁녀들이 신무문(神武門)을 나서고 있다. 짐을 열어서 경비인원들의 검사를 받고 있다. 부대에서는 명을 내려 궁중이 물건은 하나도 밖으로 가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완용(婉容)이 출궁할 때, 저수궁(儲秀宮) 남창(南窓) 옆에 있는 탁자 위에는 비스켓 상자와 반쪽짜리 사과가 놓여 있었다.



완용이 출궁할 때,저수궁내 완용의 침상에는 가져가지 못한 꽃무늬베개가 놓여 있었다. 이를 보면 저수궁의 침대보와 이부자리도 가져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완용이 출궁할 때, 그녀가 쓰던 저수궁 남창 아래의 항상(炕床)



짐을 들고 떠나는 태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