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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가경제암살사건

by 중은우시 2016. 8. 23.

글: 유대화(喩大華)





가경7년 납월(臘月) 중순, 서력으로 하면 1803년 1월초이다. 가경제는 사천총독, 섬감총독, 호광총독의 연명보고서를 받는다: "사천, 섬서, 호북에서 토비역적을 토벌하는 일이 완성되었다." 원래 9년동안 5개성에 세력이 미친 백련교의 난이 진압된 것이다. 이제 천하는 태평해졌다. 9년동안 국가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2억냥백은의 군비가 들고, 제독, 총병이하 군관중 사망자가 4백여명에 이르고, 부친 건륭 태상황은 죽을 때까지도 백련교를 진압하였다는 승전보를 기다렸었다. 가경제는 졸지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는다.


이때는 연말이 다가오고 있어서, 사후처리를 하느라고 가경제는 엄청나게 바빴다. 작전에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상을 내리고, 사망한 군인들에게 위로금을 주고, 탐관오리는 처벌하고, 통치정책을 조정하며, 지방의 사후처리를 연구하고, 토벌에 들어간 군비를 결산해야 했다. 동시에, 연말에는 원래 황실에 행사가 많다. 오늘은 태묘로 가서 제사를 지내면, 내일은 속국의 사신을 접견해야 한다. 그러나 바쁜 것은 바쁜 것이고, 마음 속으로는 확실히 기쁘기 그지없었다.


바쁘게 정월을 보내고나서, 가경제는 청동릉으로 가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부친 건율제의 능앞에서, 그는 부친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했다. 청동릉에서 돌아오는데, 북경에 도착할 때가 되자,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버드나무에서 새가지가 나오고, 옥란꽃이 피는 등 완연한 봄색을 보였다. 가경제는 마음이 동하여, 자금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원명원에서 한동안 머물기로 결정한다. 확실히 황제는 힘들었다. 거의 매일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천하가 태평해졌으니, 황제가 좀 편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원명원에서 7일을 머물고, 낮에는 대신들을데리고, 시를 짓고, 밤에는 비빈을 데리고 놀았다. 가경8년 윤이월 이십사일(1803년 4월 11일), 가경제는 휴가를 끝내기로 결정하고, 자금성으로 돌아와서 다시 긴장된 업무를 시작하기로 한다. 밤나절동안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서, 정오가 되었을 때, 가경제의 마차와 수행원들은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으로 진입한다.


신무문은 실제로 하나의 성문이다. 신무문을 들어가면 남으로 몇십미터 지점에 다시 높은 담장이 있다. 이 담장을 지나라면 다시 순정문(順貞門)을 지나야 한다. 이 문을 지나면 바로 어화원(御花園)이다. 가경제는 순정문의 앞에서 마차에서 내리고, 가마로 바꾸어 타고 양심전(養心殿)으로 갈 준비를 한다. 궁을 들어서고 나면 문마다 턱이 있어서 마차로 가기는 어려워, 반드시 가마로 바꾸어 타야 했기 때문이다.


가경제가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바꾸어탈 준비를 하는 동안에, 내무부의 관원들이 속속 다가와서 인사를 하여, 현장은 비교적 혼란스러웠다. 이 때, 신무문의 서상방(西廂房)의 뒤에서 한 사내가 뛰어나온다. 손에 단도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어교(御轎)로 달려들었다. 이 사내는 가경제로부터 겨우 5,6십미터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금방 가경제의 면전까지 다가온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경제의 곁에 있는 수십명의 시위는 하나같이 몸이 굳어 꼼짝을 않고 있었다. 그저 멍한 구경꾼이 되어, 아무런 표정없이 칼을 들고 달려드는 자를 보고만 있었다.


현장에서 가장 반응이 빨랐던 것은 가경제의 조카인 정친왕(定親王) 면은(綿恩)이었다. 그는 앞으로 뛰어나가 사내를 막았고, 소매에 칼을 맞는다.


현장에서 두번째 반응이 빨랐던 것은 가경제의 자형인 나이 근 오십의 몽골귀족 라왕도르지(拉旺多爾濟)였다. 그는 한발을 앞으로 내딛으면서 칼을 든 사내의 왼손을 잡는다. 그러나 금방 사내가 뿌리치자 라왕도르지는 땅바닥에 쓰러진다.


이때 시위 단바도르지(丹巴多爾濟)가 이 칼을 든 사내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다만, 그가 힘을 써서 칼을 든 사내를 쓰러뜨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칼을 세 번 맞도 핏물속에 쓰러진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의 의미는 매우 컸다. 가경제가 몸을 빼는데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여러 젊고 건장한 대내고수들의 투지를 격발시킨다. 칼을 든 자는 단바도르지를 찌르고, 눈을 돌려 가경제를 찾을 때, 건청문 시위 한 명이 발길질을 한다. 역시 대내고수였다. 비록 반응이 몇 박자 늦기는 하였찌만, 이 발길질로 칼을 든 자는 이장 밖으로 날아가 땅바닥에 쓰러져 꼼짝을 못하게 된다. 이때 다시 두 명의 시위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덥쳐갔고, 이미 일어날 수도 없는 자객을 바닥에 꽉 누르고 있었다...


가경제는 이미 가마를 탈 정신도 없이 잰걸음으로 양심전에 돌아가서 문을 잠그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곧이어 들려온 소식에 그는 자금성에 돌아온 후 두 가지 결정을 한다: 첫째, 태의원(太醫院)에 명하여 부상자를 긴급구조하게 한다. 둘째, 자금성 수비를 책임지는 호군통령대신을 면직시킨다. 이어서 가경제는 다시 보고를 받는다. 자객은 이미 체포되었다고. <청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가경제는 이렇게 명령한다: "대학사, 군기대신으로 하여금 구경과도등과 함께 엄국(嚴鞫)하라." '엄국'은 엄히 심문하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라는 것이다. 천하가 태평해졌는데, 황제는 자기 황궁문앞에서 자객에게 공격을 받다니...천하가 정말 태평해졌단 말인가? 바깥에서 곡성들이 들려와서, 가경제가 바깥을 내다보고는 화가나서 하마터면 숨넘어갈 뻔했다. 양심전의 정원에 곡을 하며 죄를 청하는 왕공대신, 시위관원이 가득했던 것이다. 눈이 발개진 가경제는 입을 꽉 다물고 한 마디 내뱉는다: 꺼져!


황제가 암살을 당하다니 이는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조야가 진동하고 인심이 흉흉해진다. 그날 저녁 형부대당(刑部大堂)에는 대학사, 군기대신, 형부상서가 당에 올라가 밤을 세워 자객을 심문한다. 당에 오르기 전에, 그들은 연구를 거쳐 일치하여 결정한다. 자객에게 고문을 하지 않기로. 청나라때 사건심리는원래 고문을 하는 것이다. 왜 돌연 문명화되었을까? 원래 모두 고문을 하다가 잘못해서 '대역죄인'을 죽게만들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죽어버리면, 황하에 뛰어들어도 누명을 씻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형부의 오작(仵作), 요즘말로 하면 법의관은 범인을 검사한 후에 흉수의 부상이 가볍지 않다고 판단했다. 건청문의 시위가 걷어찬 것에 맞고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은 것이다. 확실히 '무술가'였다. 발길질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외상이 중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내상이 엄청났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관원들은 더더욱 고문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문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범인이 사실대로 말하는지 보증할 수 있을 것인가? 대신들은 "오심(熬審)'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심문관리가 3교대로 차륜전술을 써서 범인이 잠을 자지 못하게 하면서 심문하는 것이다. 만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다.


자객을 형부대당으로 데리고 와서, 심문을 담당하는 관리가 엄한 목소리로 자객에게 상황을 진술하라고 명령한다. 이때까지 청나라정부는 이 자객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자객은 대나무통에서 콩을 쏟아내듯이 줄줄이 진술한다. 그의 진술기록은 <장고총편(掌故叢編)>에 기록되어 있다. 자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진덕(陳德)이라고 한다. 현재 나이 마흔일곱살이다. 원래 북경 사람이다. 다만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산동으로 갔다. 진덕의 부친은 오랫동안 관료의 가노(家奴)를 했고 주인을 따라 산동의 청주, 임읍, 제남, 장구등지를 다녔다. 진덕은 산동에서 처를 얻어 아들을 낳는다. 서른한살까지 그렇게 지냈는데, 부코가 죽고, 진덕은 산동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처자식을 데리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당저(堂姐)에게 의탁한다.


사람의 소개를 받아, 몇년동안 가족을 데리고 일부 관리들의 집에서 일을 해주었다. 직업은 요리사이다. 처자식도 주인집에서 잡일을 도와주었다. 그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은 진녹아(陳祿兒)로 열다섯살이고, 차남은 진대아(陳對兒)로 열세살이다. 왜 이 두 아이의 나이를 얘기하는가? 진덕이 한 일은 구족을 멸하는 일이고, 앞으로 아들도 연좌되어 주살될 것이다. 다만, <대청률>의 규정에 따르면, 미성년의 아이는 처벌이 감경된다(청나라규정에 십육세가 성년이다), 그래서 연령은 아주 중요하다. 청정부관리는 즉시 확인을 해보고 이웃들에게 물어본다. 동시에 진덕의 두 미성년 아들을 체포한다. 그 결과 진덕의 진술이 사실이라고 확인된다.


그래서, 심문은 제2단계로 접어든다. 진덕에게 범죄과정을 추궁한다. 진덕은 이렇게 진술한다. 이십일 새벽, 그는 작은 칼을 몸에 숨기고, 장남 진녹아를 데리고 동안문(東安門) 안의 술집(酒鋪)에서 술을 마셨다. 모과주(木瓜酒) 두 사발을 마시고 황주 한사발을 마신다. 술을 다 마신 다음 부자 두 사람은 동화문(東華門)으로 들어온다.


서협도(西夾道)에서 우회하여 신무문에 도착한다. 사람들의 무리에 섞여서 경비상황과 방위를 관찰한다. 그 후에 서상방의 뒤에 몸을 숨기고, 가경제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경제가 탄 마차가 자금성 신무문을 들어왔고, 순정문에 도착했을 때, 진덕은 맹렬하게 달려들어 찌르려고 했다.


심문관원은 진녹아를 데려오게 하여 현장에서 대질했다. 그의 진술은 진덕과 일치했다. 그리고 그는 부친이 시위에서 잡혀서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크게 울면서 신무문을 빠져나가 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현장의 청나라관원들은 마음 속으로 몰래 생각한다. 자객이 동문으로 들어와서 북문으로 나가다니, 이 자금성은 아예 유리창(청나라때 북경의 문화시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진덕에게 동화문의 수비군사들을 어떻게 속였는지 추궁한다.


진덕은 자신이 내무부관리의 집에서 한동안 일을 했고, 그때 자주 자금성을 드나들어서, 자금성의 대체적인 배치를 알았고, 수비군사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하는지를 알았다고 한다. 수비군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귀찮아서 몸을 수색까지는 하지 않고, 두 부자를 들여보낸 것이다.


심문관원은 진덕을 다시 추궁한다. 어떻게 황상이 오늘 자금성으로 돌아오는지 알았느냐고.


진덕은 말한다. 오일전에 많은 아역이 백성들을 데리고 황토를 길에 뿌리는 것을 보았다. 이를 통하여 황상이 궁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알아냈다고.


그래서, 심문관리는 다시 진덕에게 범행동기를 물어본다. 이것이 사건의 관건이다.


진덕은 주심문관리에게 대청국의 신민으로서 건륭말기 이래의 비참한 운명을 진술한다. 그는 말했다: 전해의 봄에, 처가 병으로 죽었다. 그 혼자서 두 아들과 침상에 쓰러져 있는 장모를 돌봐야 해서 생활이 아주 힘들었다. 한달 전에, 생활이 힘들고, 마음이 좋지 않ㅇ아, 술에 취하여 울면서 주정을 부렸다. 그러다가 주인에게 해고를 당했다. 이제 먹고살 방법이 없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기 보다도 당장 그가 발붙일 곳조차 없었다. 원래 진덕은 비록 북경에서 십육,칠년을 생활했지만, 지금까지 집이 없었다. 그리고 온 가족을 데리고 주인의 집에 머물렀다.


진덕은 아들을 데리고, 장모를 등에 업고 당저의 집에 빌붙어 살고자 했다. 당저의 집에 가서야 비로소 알았다. 당저가 막 사망하여, 온 가족이 상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당저의 집도 부유하지 못하여 집이 무척 작았다. 이런 상황하에게 남의 집에 빌붙어 사는 것은 힘들었다. 그래서, 진덕은 다시 장모를 업고, 아들을 데리고, 친구를 찾아간다. 친구가 그를 거두어 주어서 동화문밖의 소감수정후통에 살게 된다. 다만 거기도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최근 십여일동안 진덕은 매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일거리를 찾았다. 그러나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가지고 있던 옷도 전당포에 맡기고, 심정이 매우 우울하여, 겨우 술로 기분을 풀었다. 진덕은 계속 방법을 생각하다가 결국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죽는 것이다.


심문관리는 각박하게 말한다: 죽기로 하는 것은 쉽다. 방법도 많다. 그러나 왜 황상을 암살하는 이런 대역무도한 일을 저질렀는가?


이에 진덕은 두 가지 이유를 얘기한다. 첫째, 이렇게 거창하게 죽어야 이름을 천하에 남기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고 흐리멍텅하게 죽으면 인생을 헛산 것이 아닌가. 둘째, 이렇게 죽는게 통쾌하다. 진덕은 말했다. 그는 황상에게 달려드는 과정에서 시위들의 칼에 찔려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진덕은 말한다. 그들 시위들이 멍청이들이어서 그냥 보기만 하고 손을 쓰지 않을 줄은, 칼조차 뽑지 않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그래서, "통쾌하게 죽겠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비교적 유감이다.


심무관리는 진덕에게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어떤 동료가 있는지를 물어본다. 진덕은 모조리 부인한다. 그저 혼자서 하는 일이니 혼자서 감당하겠다고 한다. 동료도 없고, 누구의 지시를 받은 바도 없다고 말한다.


심문이 여기에 이르자, 심문관원의 심정도 매우 침중해진다. 진덕의 평생경력을 보면 그가 가경제를 암살하겠다고 한 것은 주로 건륭중엽이후 민생이 힘들고, 모순이 첨예해진 결과였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하층평민이 그저 죽을 생각으로 위험한 일을 벌인 것이다. 말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 형부관원은 여러해의 경험에 비추어, 그의 진술은 대체로 믿을만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가경제에게 보고하기로 결정한다.


심문관원이 가경제에게 가서 보고할 때 마침 왕걸(王傑)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언래 왕걸은 이미 나이 팔십이 넘고 병이 있어, 며칠 전에 이미 가경제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비준을 받은 상태였다. 왕걸은 이때 가경제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청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왕걸이 황실을 위하여 일생동안 일한 것을 고려하고, 또한 자신의 스승뻘이며, 최근 몇년동안 왕걸이 국가안정에 큰 작용을 한 것ㅇ르 고려하여 가경제는 왕걸에게 수장(手杖) 하나, 인삼 1근을 하사하고, 그에게 두 수의 시를 내렸다.


심문관리가 와서 보고하려는 것을 보고 왕걸은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가경제가 그러지 말고 왕걸에게 들어보고 본인의 생각을 얘기하라고 말한다. 관원의 보고를 다 받고나서, 가경제는 표정변화없이 고개를 돌려 왕걸에게 의견을 묻는다.


왕걸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국가의 일에 의견을 내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잠시 생각한 후에 침통하게 말한다: "진덕은 비천한 요리사일 뿐인데, 어찌 이런 대역무도한 일을 생각해내겠습니까. 반드시 간악무도한 자가 배후에서 교사했을 것입니다. 명나라 장차(張差)의 일을 잊지 마시옵소서." 명나라의 '장차'는 바로 이백년전 명왕조의 '정격안'을 말한다. 당시 태자를 해치기 위하여, 태감은 궁외에서 생활이 빈곤한 장차라는 자를 찾는다. 그에게 댓가를 약속하고 궁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에게 태자궁으로 가서 암살하도록 시킨다. 왕걸의 뜻은 진덕은 바로 명나라의 '장차'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가경제는 왕걸의 그 말을 듣고 심정이 침중해진다. 그는 진덕의 진술은 상리에 벗어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의 관건은 진덕에게 배후교사자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동료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가경제는 그 혼자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심문관리은 얼굴에 난색을 표한다. 이틀동안 강경책과 회유책을 다 써보고, 우회적으로 물어보기도 하며, 주변을 통해서 알아보고 하여 이런 단서를 찾아냈다고 말한다. 만일 더 깊이 알아내려면 반드시 고문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진덕은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형부대당에서 죽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감히 고문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만일 황상께서 진덕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심문때 고문을 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말한다. 가경제는 화를 내며 관원들이 무책임하다고 책망하며, 엄형으로 심문하도록 하며, 각부상서가 심문에 참여하도록 지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