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투량환주술(偸梁換柱術) 후전황지패(后傳皇旨牌) 서태후편

중은우시 2015. 10. 11. 22:52

 

청나라말기 중국을 반세기동안 통치했던 서태후 예허나라씨(葉赫納拉氏)는 원래 수녀(秀女)선발로 황궁에 들어가 함풍제(咸豊帝)를 모셨다. 그녀는 총명하여 점차 함풍제의 총애를 받는다. 마침 황후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하마터면 함풍제는 대가 끊어질 뻔한다. 함풍제가 아들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때, 그녀가 아들을 낳아서 함풍제의 숙원을 이뤄준다. 그 아들이 바로 애신각라(愛新覺羅) 재순(載淳)이다. 예허나라씨는 이로 인하여 함풍제의 총애를 더욱 받으며, 지위가 계속 올라 난귀인(蘭貴人), 의빈(懿嬪), 의비(懿妃), 의귀비(懿貴妃)의 봉호를 차례로 받아 궁안에서 황후의 바로 다음 가는 지위를 차지한다.

 

함풍제는 제2차 아편전쟁이 터지자, 이복동생 공친왕(恭親王) 혁흔(弈訢)에게 북경을 유수(留守)하게 하고 자신은 후궁들을 데리고 열하(熱河)로 “순수(巡狩)” 명목으로 도망쳤다가, 거기서 숨을 거둔다. 임종전에 그는 유일한 아들인 재순을 즉위하도록 하면서, 숙순(肅順), 단화(端華)등 고명팔대신(顧命八大臣)에게 동치제를 보좌하여 조정이 업무를 처리하게(輔政) 하면서 동시에, 황권을 대표하는 인장을 황후(즉 동태후)와 황태자(황제의 생모인 서태후가 대신 보관함)에게 각각 하나씩 주어, 모든 조서에는 2개의 인장을 날인하도록 조치하여 상호견제할 수 있게 하였다. 청나라의 제도상으로 후임 황제가 즉위하면, 황제의 적모(嫡母) 즉, 부황의 황후는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가 되고, 황제의 생모(生母)는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가 된다. 모후황태후 자안(慈安)은 동태후(東太后) 로 불리웠고, 성모황태후 자희(慈禧)는 서태후(西太后)로 불리웠다. 재순이 황제에 오르며, 팔대신은 연호를 기상(祺祥)이라 한다.

 

그 후, 서태후는 동태후, 공친왕 혁흔과 함께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고명팔대신을 몰아내고 권력을 빼앗는다. 서태후는 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을 하면서 연호를 다시 동치(同治)로 바꾼다. 공친왕 혁흔은 의정왕(議政王) 군기대신(軍機大臣)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동치제의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조정에서는 친정(親政)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비등한다. 서태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귀정(歸政) 즉, 권력을 황제에게 돌려주고 이선으로 물러난다.

 

그녀는 이선으로 물러났지만, 다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동치제는 황궁의 후궁들은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팔대후통(八大胡同, 당시 북경의 홍등가)의 기녀들과 즐기는데 심취한다. 그리하여 매독에 걸려서, 후사를 두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생모로서 서태후는 아들이 매독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황실의 의원들에게 황제가 매독에 걸릴 리가 없다고 굳이 천화(天花, 천연두)로 치료하게 한다. 이는 한편으로 황실의 존엄을 유지하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권력을 다시 장악하고자 하는 이유때문이었을 것이다. 호랑이가 독해도 자식을 잡아먹지는 않는다(虎毒不食子)는 금기를 깨면서까지 그녀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강했던 것이다.

동치13년(1875년) 12월 5일 저녁, 동치제가 자금성의 양심전(養心殿) 동난각(東暖閣)에서 붕어한다. 동치제가 죽기 직전에 양심전의 서난각(西暖閣)에서는 동태후와 서태후 양궁황태후의 주재하에 긴급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의 주제는 단 하나였다. 누구로 하여금 황통을 잇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시 청나라의 귀족, 고관들이었다. 순친왕(恂親王) 혁종(弈誴), 공친왕 혁흔, 순친왕(醇親王) 혁현(弈譞), 부군왕 혁혜, 혜군왕 혁상, 패륵 재치, 재징, 공 혁막(황자의 등급은 친왕, 군왕, 패륵, 패자, 공의 다섯단계이다), 어전대신 보롱나모구, 이쾅, 징셔우, 군기대신 바오쥔, 콰이링, 롱루, 밍샨, 꾸이바오, 원시, 홍덕전행주 서동, 옹동서, 왕경기, 남서방행주 공각, 반고음, 손치경, 서포, 장가양등이었다.

 

청나라에서 황제가 자식을 두지 않고, 죽은 것은 동치제가 처음이었다. 청나라의 '가법'에 따르면 황제사망후 자식이 없으면, 반드시 황족의 친지중에서 다음 대의 사람을 선택하여 황태자의 신분으로 사망한 황제의 후사를 이어 황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동치제의 이름은 재순이었고, 애신각라(愛新覺羅) 가계에서 "재(載)"자 항렬에 속한다. 바로 다음은 "부(溥)"자 항렬이었다.

 

부(溥)자 항렬에서 황위를 잇기에 적합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부륜(溥倫)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부위(溥偉)였다.

 

부륜은 도광제의 장남인 혁위(奕緯)의 아들인 재치(載治)의 아들이다. 부자 항렬중 당시 가장 연장자이고, 배분등에서도 적당했다. 그런데, 재치는 혁위의 친아들이 아니라, 혁위의 양자로 후사를 이은 경우였다. 그러다 보니, 혈연관계로 보면 부륜은 친조부가 도광제의 아들도 아니고, 가경제의 손자도 아니었다. 부륜은 애신각라 집안에서 본다면 직계가 아니라 방계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부륜은 애신각라의 직계 후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적절한 황제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위는 공친왕 혁흔의 둘째 아들인 재영(載瀯)의 아들, 즉 공친왕 혁흔의 손자였다. 그리고, 공친왕의 넷째아들인 재징(載徵)에게 후사가 없자 재징의 양자로 들어갔다. 종친의 혈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위가 가장 적절한 후보였다. 다만, 부위는 계부인 재징과 함께 평상시에 기원이나 술집을 드나드는 등 행실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당시 동치제의 황후는 이미 임신중이었다. 그러므로, 황후가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에게 후계를 잇게 하고, 딸을 낳는다면 다시 후계를 논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선택한 방법은 “부”자항렬에서 선택하는 것도 아니었고, 황후가 동치제의 자식을 낳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서태후는 동치제와 같은 항렬인 "재(載)"자 항렬에서 선택할 것을 주장했고, 바로 순친왕 혁현의 아들인 재첨(載湉)을 황제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영국인들이 지은 <<자희외전(慈禧外傳)>>에는 광서제의 즉위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태후 : 동치제의 황후가 비록 임신을 하였으나, 언제 태어날 지 알 수가 없다. 황위를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즉시 후계를 정해 황위에 오르게 해야할 것이다.
공친왕 : 황자가 탄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잠시 황제의 사망을 비밀로 부치고 장례를 미루자. 만일 황자를 낳으면 후계로 삼고, 딸을 낳는다면 다시 새로운 황제를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다.
(왕공대신들 중에서 많은 사람은 공친왕의 의견이 맞다는 입장을 보이다)
서태후 : 현재 남방의 태평천국의 난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다. 그들이 만일 황위가 빈 것을 안다면 아마도 형세가 더 악화될 것이다. 국가의 근본이 흔들릴 수도 있다.
(군기대신과 신하들 중, 특히 한족 3명은 서태후의 주장에 적극 찬성하였다)
동태후 : 내 생각으로는 공친왕의 아들이 대통을 이을 수 있을 것같다.
공친왕 : 감히 그럴 수 없다. 승계의 정상적인 순서를 따른다면, 당연히 부륜이 선황의 후계를 이어야 한다.
재치(부륜의 부친) : 감히 그럴 수 없다.
서태후 : 재치는 혁위의 양자이지 않느냐. 공친왕! 예전에 이렇게 한 사례도 있느냐?
공친왕 : 명나라의 영종황제가 이렇게 계승한 적이 있다.
서태후 : 그건 적당하지 않다. 영종이 계승한 것은, 손비가 속여서 한 것이지 않느냐. 그리고, 영종이 재위했을 때는 국가가 안정되지도 못하였다.
서태후 : 내 생각으로는 혁현의 아들인 재첨을 세우면 될 것같다. 그리고, 지금 바로 결정해야지 늦춰서는 안된다. 투표로 결정하자.
동태후 : 좋다.


투표결과 순친왕등은 부륜에게 투표하였고, 세 사람이 공친왕의 아들 부위에게 투표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서태후의 뜻에 따라 순친왕의 아들 재첨에게 투표하였다. 이로써 황위가 결정되었다.

 

이 글에서 투표로 결정했다는 부분은 영국적인 사고방식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고, 청나라때 투표로 결정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당시 관련자들의 입장은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체로 서태후의 일파와 공친왕의 일파간에 재첨을 세울 것인지, 부위를 세울 것인지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결국 서태후의 의사가 관철되었다는 것이다.

 

동치제는 아들을 두지 못했으므로, 이치대로라면 임신한 동치제의 황후가 낳을 아들을 황제로 삼거나(만일 아들이라면), 동치제의 조카뻘인 “부(溥)”자 항열의 인물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동치제의 양자로 삼아 대통을 잇게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되면, 자신은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고, 동치제의 황후가 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니, 서태후는 권력을 잃게 된다. 그녀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고심끝에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이자, 동치제의 형제뻘인 4살짜리 재첨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재첨은 광서제(光緖帝)가 된다. 서태후는 나중에 광서제가 아들을 낳게 되면, 동치제의 양자로 보내어 대통을 잇게 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선통제 부의는 동치제의 양자가 되어 황제에 오른다.

 

그 후에도 1889년 명목상으로 광서제에게 귀정시키나 훈정(訓政)을 수년간 하고, 훈정이 끝난 후에도 조정의 일체 인사행정은 그녀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황상은 태후를 공손히 모셨고, 조정이 큰 일은 반드시 태후에게 물어본 후에 시행하였다” 1898년 6월 광서제가 무술변법을 시행하면서 광서제와 서태후의 갈등이 나타나고, 마침내 광서제가 원세개를 보내어 이화원을 포위한 후 서태후를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서태후는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시키고, 담사동등 무술육군자를 참살하며 다시 제2차 훈정을 시작하여 권력을 장악한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후계자로 고를 때나 부의를 후계자로 고를 때나 모두 장성한 황족들을 배제하고 나이어린 인물을 골랐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녀가 수렴청정을 통하여 대권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황제가 장성하면 일단 여론의 압력에 밀려 귀정시켜 주지만, 기회만 생기면 황제가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혹은 황제를 아예 연금시키고, 자신이 권력을 다시 장악했다.

 

황제의 나이가 어리면 모후가 권력을 독단하는 현상이 봉건시대에는 시종 존재했다. 모후칭제, 수렴청정과 외척간정은 환관농단과 마찬가지로 왕조의 통치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대왕조에서는 이런 현상을 막으려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부득이 어린 황제를 세워야 하는 경우에는 “조정의 업무일체를 재상에게 위임하고, 모후는 임조칭제할 수 없게” 하기도 하고(<남사.송본기상>의 유유가 한 말임), 한무제는 나이어린 유불릉을 태자로 세우면서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을 죽여버렸고, 북위때는 아예 황태자의 생모는 죽여버리는 것을 제도화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