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릉군 8

광장(匡章): 변법후에 진나라의 함곡관을 격파시킨 불세의 명장

글: 일조심진기(一條尋秦記) 춘추전국시기의 명장을 꼽자면 귀에 익숙한 사람으로는 병성(兵聖) 손무(孫武), 아성(亞聖) 오기(吳起), 그리고 사대명장 기전파목(起翦頗牧, 백기 왕전 염파 이목), 그리고 악의(樂毅), 전단(田單), 조사(趙奢)등이 떠오르고 이들은 모두 사마천이 <사기>에 ..

젊고 예쁜 여치(呂稚)는 왜 나이든 유방(劉邦)에게 시집갔는가?

글: 이치아(李治亞) 계속하여 이해가 안되는 일이 있다. 젊고 예쁜 여치가 왜 나이든 유방에게 시집을 갔을까? 부친 여공(呂公)의 한 마디 말로 자신의 혼인대사를 결정짓는다면 그것은 너무 경솔한 일이 아닌가? 여치는 유방에게 시집갈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방은 ..

신릉군(信陵君)은 왜 평생 실권을 잡지 못했는가?

글: 유연빈(劉宴斌) 모두 알고 있다시피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는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신릉군 위무기(魏无己)와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이 네명은 한때 전국시대의 국면과 진전을 변경시켰다. 다만, 이 풍운을 질타한 바 있는 "사공자"가운데, 한 ..

진시황(秦始皇)과 태자단(太子丹)의 관계

글: 아체(阿杕) "풍소소혜역수한(風蕭蕭兮易水寒), 장사일거혜불부환(壯士一去兮不復還)" 이 비장한 노래소리는 이천여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흐르고 있다.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형가에 존경을 지니..

위(魏)나라는 왜 천하통일의 기회를 잃어버렸는가?

글: 가동(佳桐) 춘추전국의 역사를 읽다보면 위문후(魏文侯) 위사(魏斯)시대의 위나라를 보면 느끼는 바가 많다. 삼국분진(三國分晋)의 초기에 위문후는 현명한 인재를 널리 기용했다. 자하(子夏), 전자방(田子方)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리(李悝), 적황(翟璜)을 재상으로 삼고, 오기(吳起), 악양(樂羊)을 ..